달그락, 테두리가 세련되게 세공 된 컵받침에 짝을 이루어 세공한 잔이 놓이며 무기질의 소리를 내었다. 그 소리에 퍼뜩 놀라 손에 쥔 컵 속에 처박혀 있던 시선을 들어올렸다.
“뭐?”
“헤어지자구.”
“……왜?”
“나 결혼해.”
“…….”
“진부한 이유지?”
그러게. 너무나도 진부한 이유라 마치 제가 영화나 드라마 속에 앉아 있는 등장인물 같이 느껴졌다. 현실이 먹먹하게 멀어진다. 손톱을 단정하게 잘 다듬은 손가락이 잔의 손잡이를 쥐었다. 일렁이는 커피의 표면에서는 아주 희미하게 김이 피어올랐다. 쿠로오는 그것마저도 현실 같지 않았다.
“원해서 하는 결혼은 아니지만 하지 않을 수도 없는 결혼이니까.”
“다이치.”
“…너도 언젠가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예상 했을 테지만.”
그래. 예상 했지. 그런데 그게 이렇게 빨리 닥치리라고는…, 아니, 가만 생각해보면 결코 빠른 건 아니었다. 두 사람의 나이를 생각해본다면 제가 모르는 사이에 사와무라 또한 최선을 다해 오늘을 미뤄왔으리라. 다만 제가 사와무라와 함께 하는 시간에 취해 그저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었던 거다. 정계에서 내로라하는 사와무라 가문의 장남인 사와무라 다이치의 혼약처가 어디로 정해질지에 대해서 다루는 추측이 난무한 가십지는 잊을만하면 한 번씩 잡지 가판대에 깔리곤 했었다. 그 꼴이 보기 싫어 서점에 발을 들이지 않은 것도 벌써 일년이 다 되어가는 이야기였다.
“다이치.”
목구멍이 먹먹하게 막혀 뭐라도 내뱉어야 할 것 같아 부른 이름은 끝이 조금 갈라진 소리였다. 맞은편에서 사와무라는 반듯한 자세로 앉아 쿠로오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올곧은 시선에 어딘가 어지러운 시선이 사납게 얽힌다.
두 사람이 만난 것은 대학교 교양수업이었다. 과가 달랐지만 나이가 같아 금세 친해지고 함께 과제도 하며 서로의 자취방을 들락거리게 되고, 그리고 봄바람 탓인지 청춘의 혈기 탓인지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되었다. 사와무라라는 성을 어디서 들어본 거 같다 싶었지만 희귀한 성이 아니니 그러려니 하고 가볍게 넘긴 탓이었을까. 아니면 사와무라가 제 몫이 아닌 평범한 대학생활을 즐기고 싶어 했던 소박한 욕심 탓이었을까. 어찌하여 우리는 이렇게 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를 일이었다.
사와무라는 반듯한 자세로 앉아 올곧은 자세로 쿠로오를 바라본다. 그 어떤 영화에서 들어본 것 같은 멜로디가 익숙한 노래가 카페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왔고, 카페에 사람들이 들어올 때 마다 습기와 비 냄새를 머금은 바깥 공기가 밀려들었다. 두 사람이 만남의 장소로 종종 찾았던 이 카페를 자신은 이제 두 번 다시 찾을 일이 없을 것이다. 제 눈앞의 혼란스러운 쿠로오의 얼굴 또한 제가 두 번 다시 먼저 찾을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을 한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아 사와무라는 반듯한 자세로 앉아 제 앞의 쿠로오를 올곧게 바라보았다.
눅진한 공기에 미적지근해진 커피에서는 더 이상 김이 피어오르지 않았다. 사와무라는 느슨해진 커피 향을 마시며 천천히 두 사람의 추억을 되새겼다. 다른 사람들처럼 그냥 평범하게 연애도 하고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노력 하고 회사에 취직해 평범하게 돈을 버는 샐러리맨이 되고 싶었다. 제 앞에 있는 쿠로오처럼 그렇게 살고 싶었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삶이라 할지라도 쿠로오와 함께라면 즐거울 것 같았다. 어차피 그렇게 살 수 없음을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으면서도.
“더 할 말이 없다면 이만 일어날게.”
“그래…….”
“미안해. 진심으로.”
사와무라의 사과에 쿠로오의 표정이 복잡하게 일그러진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그 표정에 목이 메었지만 어금니를 꾹 물고 부러 침을 크게 삼켰다. 의자 팔걸이에 걸어두었던 우산을 챙겨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코로 크게 숨을 들이 마시고 내뱉으며 심호흡을 했다. 습한 공기에 방향제 냄새가 섞여 콧속을 찔렀다.
“약속은 못 지키게 되었네.”
“…….”
“이럴 줄 알았으면 그런 약속 따윈 하지 말 걸…….”
담담하게 말하던 사와무라의 말끝이 천천히 흐려졌다.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겨우 내뱉은 말은 이제 와서 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는 후회일 뿐이었다. 미련 가득한 사와무라의 등은 꼿꼿하게 서서 천천히 걸어 쿠로오의 시야에서 멀어진다. 딸랑, 카페 문이 열리는 작은 종소리와 점원의 배웅인사가 날카롭게 쿠로오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여기는 침실이고. 여기는 거실, 여기에 티비를 놓을 거야.’
‘아니지 여기엔 책장을 놓아야지. 거실 창문이 이렇게 나 있으면 이렇게 멋진 채광을 낭비하면 안 되지.’
‘거실 소파에서 뒹굴 거리면서 티비 보는 게 얼마나 재밌는데.’
‘너 진짜 센스 없다.’
‘너랑 만나는 거 보면 센스가 아주 넘치는 거 같은데.’
‘말이나 못하면.’
실랑이를 하던 두 사람의 목소리는 금세 입술이 닿는 소리에 묻혔다. 킬킬 웃으며 금세 바닥을 구르는 두 사람의 곁에는 교양 과제로 그리던 건축 도면이 놓여 있었다. 서로 다른 필기구로 그려진 그림과 휘갈긴 필체가 엉망으로 뒤엉켜 미래의 두 사람을 그리고 있었다.
왜 갑자기 이런 내용을 쓴걸까요
약속이라고 하면 어린 쿨다가 짧고 통통한 새끼손가락 걸며 나중에 결혼하자 이런 귀여운 이야기를 쓰면 좋겠다 싶었는데 말이에요
사와무라는 제 눈을 벅벅 문질러 닦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오랜만에 고등학교 시절의 추억을 느끼고 싶다며 사와무라를 졸라 미야기행 신칸센에 함께 몸을 실은 쿠로오와 함께 추억의 장소에서 오랜만에 데이트를 즐긴 하루였다. 그 옛날 아직 서로의 마음을 떠보던, 그 흔히 하는 말로 썸을 타던 시기에 갔던 장소들에서 이제는 연인이 된 두 사람이 옛날과 같은 포즈로 사진을 찍고 그 때는 상상도 못했던 스킨십을 하며 다시 사진을 찍기도 했고 학생 때라 아쉬운 지갑사정으로 사먹던 추억의 음식들을 마음껏 시키기도 하면서. 그래, 거기까지만 해도 좋았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부모님도 반가웠고 부모님께 서글서글하게 인사를 하며 ‘도쿄의 룸메이트’로서 좋은 인상을 남긴 쿠로오의 모습에 제가 괜히 뿌듯하기도 했고. 그래, 거기까지만 해도 좋았었잖아. 먼저 씻고 온 쿠로오에게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고 씻을 때 까지만 해도, 설마하니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던 거였다.
“……뭐해?”
“어때?”
아니, 뭐하냐고 물은 말에 그런 대답은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해? 사와무라는 반쯤 미간을 좁히며 제 앞의 쿠로오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씻으러 가기 전에 슬쩍 떠 보는 말에 고등학교 때 입던 옷은 다 여기 있지, 하고 제 옷장 한 쪽을 대충 가리킨 게 제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고등학교 때 입던 제 교복을 용케도 찾아 꺼낸 쿠로오가 반쯤 잠그다 만 셔츠 단추를 쥐고 힛, 장난스럽게 웃는다. 자주 입지 않아 빳빳한 흰색 셔츠가 쿠로오의 몸에 빠듯하게 붙어 매끈하게 몸의 선이 드러났다.
“그거 왜 있잖아, 남친셔츠라고. 다들 좋아한다길래 한 번 입어보려고 했지.”
“니가 좋아서 입은 거 아니고?”
“들켰네?”
키들키들 웃으며 쿠로오가 셔츠 단추를 마저 잡아당긴다. 고등학교 일학년 때 샀던 교복 셔츠는 갑자기 키가 자란 덕에 어느 새 맞지 않게 되어 옷장에 넣어둔 지 오래였다. 그 뒤로는 거의 부활동복이나 기본 티셔츠를 입고 다닌 탓에 넣어둔 것도 반쯤 까먹고 있었는데 어째 용케 저걸 찾아내선. 어깨선이 하나도 맞지 않아 짧게 올라 간 소매 끝을 달랑거리며 쿠로오가 빠듯하게 셔츠 단추를 잠궈보다가 결국 포기하고 만다.
“안 맞지?”
“그렇네. 입고 한 번 놀래켜 줘야 했는데.”
“그거 나도 안 맞아. 일학년 때 산거거든.”
“일학년 때 이렇게 작았다고?”
휘둥그레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얼굴이 어쩐지 조금 귀여워서 사와무라는 푸스스 웃었다. 조금 더 놀려줄까, 괜히 장난끼가 솟아 오른 사와무라가 쿠로오 앞으로 다가가 셔츠 끝을 쥔다. 허리쯤의 단추 하나를 용케 잠궈 쿠로오의 허리쯤이 팽팽하게 당겨 있었다. 은근 말랐다니까. 왠지 부럽기도 하고 은근히 부아가 치밀기도 해 검지로 빠듯하게 잠긴 단추를 툭 끌러내었다. 셔츠 안은 아무것도 입지 않아 맨 살이었고 거기서 사와무라와 같은 바디 워시 냄새가 나긋하게 풍겨온다. 우스울 정도로 짧은 옷을 걸치고 있는 쿠로오의 앞에 셔츠 자락을 쥐고 장난스러운 손길로 쭉쭉 몇 번 당겨본다.
분명 장난을 치려고 했는데 괜히 기분이 묘해진 것은 왜일까. 쿠로오가 지껄이던 남친 셔츠라는 말이 갑자기 떠올라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다. 속옷 하나에 짧은 셔츠 하나만 걸친 꼴이 너무 우스꽝스러운데 기분이 야릇하게 달아올랐다. 미쳤지 내가 진짜…….
“다이치, 흥분했어?”
사와무라의 머리통 위에서 쿠로오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장난스러운 목소리 끝은 까슬하게 잠겨 있었다.
“……응.”
“참아. 부모님 계시니까 집에 가서…….”
“싫어.”
셔츠 끝을 쥔 손에 힘을 주고는 쿠로오의 몸을 잡아 당겼다. 바짝 가까워진 쿠로오의 가슴팍에 입을 쪽 맞추었다. 당황한 쿠로오의 손끝이 사와무라의 어깨를 쥐었지만 아랑곳 않고 가까워진 몸에 입맞춤이 쏟아진다.
“다이치…….”
“싫어?”
“아니, 싫은 건 아닌데. 부모님한테 들리면 어쩌려고.”
“니가 잘 하면 되지.”
소리 참아? 생긋 웃은 사와무라가 장난스럽게 쿠로오의 몸을 끌어 침대 위에 눕혔다. 삽시간에 올라탄 사와무라가 웃으며 제가 입은 티셔츠를 벗어던진다. 사색이 된 쿠로오의 뺨을 쥐고 진하게 입을 맞추었다. 짧은 소매 끝이 팽팽하게 당겨 어설픈 자세로 팔을 뻗은 쿠로오의 손을 무시하며 사와무라는 쪼오옥,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었다.
남친셔츠 이거, 진짜 효과 좋긴 하네. 젖은 입술을 날름 핥으며 사와무라가 짓궂게 쿠로오의 몸 위로 제 몸을 겹쳤다. 바스락, 셔츠가 구겨지는 소리와 쿠로오가 놀라 힉힉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장난스럽게 뒤엉켰다.
+) 쿠로다이 맞.....습니다
++) 시간 맞추려다보니까 이상한데서 뎅겅 잘랐습니다........웅앵웅.......(땅파고 들어감)
아마도 다음 정류장, 이었지? 버스의 정차 안내방송을 집중해서 들으며 몇 번이나 봐서 외울 것 같은 버스 노선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서 또 한참이나 걸어야 나오는 카라스노 고등학교라는 최종 목적지를 몇 번이나 머릿속에 되새기며 긴장해 바싹 마른 입술을 적셨다. 버스가 방지턱을 넘느라 덜컹일 때 마다 품에 안은 꽃다발이 부스럭거리는 비닐 소리를 냈다.
한참을 걸어 겨우 도착한 학교 주변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강당에서 졸업식을 진행하느라 텅 빈 교정을 둘러보던 쿠로오는 졸업식 종료까지 대략 1시간 정도 남은 걸 확인하고는 긴장해 잔뜩 접고 있던 어깨를 느슨하게 풀어냈다. 봄기운이 밀려들어 차가운 공기 속에 뒤섞인 꽃 냄새가 옅었다. 도쿄는 슬슬 벚꽃이 피기 시작하는 계절이지만 조금 더 추운 미야기는 꽃봉오리들이 한 움큼 정도 덜 여문 느낌이었다. 한 아름 안은 꽃다발에 묶인 카드 겉에 쓰인 사와무라 다이치라는 이름을 다시 한 번 읽어보고 괜히 제가 더 설레었다.
사와무라와 만난 것은 작년 여름의 이야기로, 여름 방학 때 미야기에 있는 친척 어른 집에 놀러 갔다가 권유 받은 입시 과외가 계기가 되었다. 나쁘지 않은 성적으로 도쿄에 있는 대학에 진학한 쿠로오에 대한 자랑을 평소부터 들어왔던 사와무라의 부모님이 적극적으로 추진한 결과이기도 했다. 우리 다이치가, 수학이 좀 약해서요. 어머님의 짓궂은 말에 아무렇지 않은 척 굴면서 귀 끝이 빨갛게 물들어 있던 것이 사와무라에 대한 첫 인상이었다.
졸업식이 끝날 때 까지 시간이 꽤 남아 그 동안 교정을 조금 둘러보기로 했다. 사와무라에게 가끔 건네 들은 이야기로 그려본 학교의 모습과는 다른 듯도, 비슷한 듯도 했다. 체육관이라는 팻말을 보며 아, 여기서 배구를 했겠거니. 운동장을 보며 아, 여기를 통해 등교를 했겠거니. 하고 생각할 뿐이다. 자신은 졸업한지 고작 1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고등학교 교정을 밟고 있으니 기분이 괜히 이상했다. 들어오면 안 될 곳에 들어온 것 같기도 하고. 바스락, 발 아래로 모래가 밟히는 소리가 제법 크게 들렸다. 천천히 걸어 교정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간혹 카라스노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을 뿐, 그 외에는 꽤나 조용한 교정이었다. 한 바퀴를 느긋하게 걸어 다시 정문 근처로 왔을 땐 제법 사람들이 모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졸업식이 끝나기라도 한지 아까보다는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더 많이 보였다. 핸드폰을 들어 천천히 메시지를 작성했다.
[체육관 옆에 있는 큰 나무 밑에 있어.]
온다는 말도 확실하게 하지 않았는데 이런 메시지를 다짜고짜 받으면 엄청나게 놀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쿠로오는 쏟아지는 학생들의 무리에서 도저히 사와무라를 찾을 자신이 없었다. 시끄러운 운동장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쿠로오는 어색하게 발을 바닥에 비비며 봉오리가 피어오르기 시작한 나무를 바라보기만 했다. 괜히 어색해서 심장이 간질거린다.
“선생님!”
잔잔하게 들리던 소리의 틈바구니로 제법 또렷한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돌아보니 기웃거리던 사와무라가 활짝 웃으며 쿠로오에게 뛰어온다.
“장난인 줄 알았는데, 진짜 오셨네요?”
짙은 초록색의 목도리를 두르고 졸업장을 품에 안은 사와무라가 활짝 웃는다. 그러고 보니 교복 입은 모습은 처음 보는 거지 참. 쿠로오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까부터 봤던 흔하디흔한 검은 가쿠란일 뿐인데 사와무라는 특별하게 보였다. 쿠로오는 흠, 흠, 목을 가다듬고 아까부터 안고 있던 꽃다발을 내밀었다.
“졸업 축하한다.”
“간지럽게 꽃다발이 뭐에요!”
놀리는 듯 말하면서도 기쁜지 사와무라의 얼굴에서 웃음이 지워지질 않는다. 하긴 남자에게 남자가 꽃다발을 주는 게 머쓱하고 낯간지러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졸업식인데 꽃다발 하나는 있어야지.”
“아 진짜, 민망해.”
그런 말을 하면서도 사와무라는 킁킁, 꽃다발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는다. 잘 몰라서 그냥 제일 예쁘고 흔하디흔한 장미꽃다발을 골랐는데 나쁜 선택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친구들은?”
“아, 잠깐 만날 사람 있다고 하고 빠져 나왔어요. 애들은 지금 사진 찍고 난리 났어요.”
“너도 사진 찍어야지.”
“에이, 괜찮아요.”
헤헤, 웃는 얼굴에 장난스러운 웃음이 듬뿍 묻어나왔다. 이 웃음을 보려고 이 먼 곳까지 고생하며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다. 여름 방학 내내 과외를 하고, 겨울 방학에 짧은 기간 과외를 하며 잠깐 수험 준비를 도와준 이후로 오랜만에 보는 얼굴에 기분이 뭉글뭉글 풀어진다. 밤톨 같은 머리카락이 조금 길어 귓바퀴를 살짝 덮었다. 너도 이제 성인이 될 준비를 하는 걸까.
“남는 건 사진 밖에 없는데, 사진 찍어야지. 부모님은?”
“아, 조금 늦으실 거 같대요. 그 때 사진 찍죠 뭐.”
“친구들이랑도 찍어야지, 내가 사진사 해줄게. 나 사진 잘 찍어.”
“에이, 거짓말.”
눈을 샐쭉하게 뜨고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는 사와무라의 이마에 아프지 않게 딱밤을 콕, 놓아주자 금세 눈을 둥글게 휘며 웃는다. 학교를 졸업하는 아쉬움 보다 후련함이 가득한 얼굴은 기분 좋게 불어오는 바람에 반쯤 눈을 내려 감는다. 콩닥, 콩닥. 설렘이 와글와글 피어오르는 분위기에 동화된 건지 쿠로오의 심장이 주책맞게 뛰어댄다.
“얼른 가자.”
“선생님.”
반쯤 몸을 돌리는 쿠로오를 불러 세운 사와무라가 엷게 뜨고 있던 눈을 또렷하게 떠 쿠로오를 바라본다. 그 조약돌 같이 단단한 시선과 마주하자 고개를 차마 돌릴 수 없었다. 큰 눈동자를 동그랗게 머금고 있는 유순해 보이는 눈매와 잘 빚은 이마를 차근히 바라보았다. 응, 하고 겨우 꺼내는 쿠로오의 대답에 사와무라는 긴장한 듯 흠, 하고 목을 한 번 가다듬는다.
“졸업선물이요.”
“응?”
“졸업선물이요.”
예상하지 못한 말에 잠시 머쓱하게 뒷덜미를 긁적였다. 그러게, 선물. 선물 뭘 해야 할지 고르지 못해서 아직 아무것도 사지 못했어. 고작 졸업선물일 뿐인데 아무것도 못 고르겠더라고. 입 밖으로 내뱉으면 변명이 될 뿐일 말이었다. 쿠로오는 머쓱하게 허허 웃었다.
“뭐 갖고 싶은 거 있어?”
“준비 안 하셨죠?”
“그래 이 녀석아.”
장난스럽게 받아쳤지만 역시 서운했던 건가 싶어 괜히 미안해졌다. 이따 맛있는 거 사줄게, 하고 변명처럼 말을 꺼내는데 사와무라가 쿠로오의 앞으로 척척 걸어온다. 허공에 덜렁거리고 있는 손을 끌어당긴 사와무라가 꽃다발을 불편하게 팔로 안아들곤 주먹 쥔 손에 쥐고 있던 걸 쿠로오의 손에 쥐여준다. 아까부터 쥐고 있던 건지 미지근하게 체온이 옮은 작고 단단한 것이 손에 잡혔다. 의아한 얼굴로 사와무라를 바라보지만 사와무라는 제 입으로 대답해 줄 의지가 없다는 듯 단단하게 입을 다물고 제 앞에 선 쿠로오를 마주할 뿐이었다. 의아한 얼굴의 쿠로오에게 대답해 줄 의지는 없는지 쿠로오의 손에 다만 조그마한 것을 쥐여주고는 펴보지도 못하게 양 손으로 꽉 붙들고 있다.
“이거 받으세요.”
“…응?”
“졸업선물, 로. 이거 받아주세요.”
졸업선물을 받을 대상자가 본인에게 졸업선물을 받아달라는 말이 의아해 잠시 머릿속이 물음표로 뒤범벅이 된다. 이거 주세요, 도 아닌 이거 받으세요, 는 조금 이상했으니까. 쿠로오의 얼굴에 떠오른 의아함을 애써 무시하며 사와무라는 단단하게 쿠로오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제야 쿠로오의 시야에 사와무라의 텅 빈 가슴팍이 들어왔다. 사와무라의 시선에 단단히 매여 미처 내려다보지 못한 가슴팍 한 곳에 당연히 있어야 할 단추 하나가 비어있었다.
“사와무라.”
“대답은 안 해주셔도 되니까, 받아주세요.”
눈 밑이 살짝 붉어진다. 지금 사와무라는 어떤 마음일지 쿠로오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맹랑하게 웃던 사와무라는 단단한 얼굴로 쿠로오에게 제 마음을 건넨다. 바보가 아닌 이상 누구나 다 알 수 있을법한 의미를.
“저는 이제 학생이 아니니까, 선생님이랑 같은 어른이고, 대학생이 될 거니까. 이 정도는 괜찮죠?”
“너…….”
“예전부터 말하고 싶었어요. 근데 제가 아직 미성년자라서 어리다고 거절당할 거 같아서 해가 바뀔 때 까지 기다렸어요. 그랬더니 입시에나 신경 쓰라고 거절당할 거 같아서 학교 합격 발표가 날 때 까지 기다렸어요. 그러고 나니까 제가 고등학생인 게 마음에 걸리더라구요.”
“…….”
“그래서 오늘이 될 때 까지 기다렸어요. 이제 저 고등학생도 아니니까요.”
“…….”
“그러니까 말하는 거 정도는 이해해주세요.”
이젠 귀까지 시뻘개진 사와무라는 땀으로 흠뻑 젖은 손바닥으로 움켜쥐고 있던 쿠로오의 손을 슬그머니 놓는다. 쿠로오는 천천히 손바닥을 펼쳐 졸업선물로 안겨진 조그만 마음을 내려다보았다. 온기를 아직 머금고 있는 조그만 금속재질의 단추를 내려다보았다. 이런 걸 믿고 있다니 진짜 고등학생답다 싶어 갑자기 슬그머니 웃음이 튀어나왔다.
“나는 블레이져였는데.”
“…그랬어요?”
“응, 그래서 나는 대답으로 뭘 줘야 할지 모르겠네.”
쿠로오는 제 앞에 단단하게 선 사와무라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쿵쾅거리며 뛰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는지 사와무라는 어느새 눈 밑에 엷게 눈물이 고여 있었다. 제 제자였던 녀석의 마음이 맹랑하기도 하고 귀엽게도 해, 쿠로오는 빈 팔에 사와무라를 담았다. 으악, 귀엽지 못한 소리를 낸 사와무라가 합, 하고 입술을 다문다. 끌어안은 팔을 살짝 풀어 낸 쿠로오가 사와무라의 입술에 천천히 입을 맞춘다. 따뜻하게 닿은 입술에 사와무라가 힉, 하고 놀라 움찔 몸을 떤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닿기만 했던 입술이 차분하게 떨어진다. 이제 쿡, 찌르면 펑 터져버릴 것 같은 사와무라의 얼굴을 보며 쿠로오가 장난스럽게 웃는다.
“입술 도장 정도면 대답이 되겠어?”
“선생님….”
“나 이제 니 선생님 아닌데. 이제 우리 관계도 변할 텐데 다른 호칭으로 불러야 하지 않을까?”
“으아악, 선생님!!”
쿠로오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안색이 바뀌던 사와무라가 와락 쿠로오의 품에 뛰어든다. 파사삭, 꽃다발이 뭉개지는 소리가 요란했지만 사와무라는 영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동그란 머리통을 쓰다듬던 쿠로오가 피식 웃는다.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요 맹랑한 학생이 날린 선빵에 정신이 어질했던 터였다. 학생이 먼저 선수치게 만들다니 선생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몇번이고 문자를 썼다가 지웠다가 낯익은 이름을 눌렀다가 지웠다가, 별 소득 없는 일을 한참동안 반복했다. 밑져야 본전이라면 이렇게 망설일 것도 없었으나 지금부터 하려는 일은 잘 해도 본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망설였으나 그래도 하지 않을 수는 없어서 결국 후우우, 깊은 숨을 내쉬었다가 단단하게 정신을 차려 눈 앞에 있는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섰다.
“어서오세, 어라? 사와무라?”
“안녕.”
대외용 얼굴로 생글거리며 웃던 쿠로오가 내 얼굴을 보자마자 반가운 표정을 짓는다. 으, 제발 좀 참아주라. 콩닥콩닥거리는 심장을 부여쥐고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손님이 없는 타이밍을 노려 들어온 덕분에 편의점 안에는 나와 쿠로오 외에는 사람이 없었다.
“뭐사러 왔어? 아, 나 보러 온거야?”
“무슨 소리야. 맥, 맥주 사러 왔어.”
악, 나 말 더듬었어! 들켰나? 후다닥 주류 냉장고 쪽으로 달려가서 괜히 맥주를 고르는 척을 했다. 시즌 한정으로 눈꽃과 산타모자가 잔뜩 그려진 맥주캔을 아무거나 집어들고는 카운터로 갔다. 능숙하게 바코드를 찍은 쿠로오가 편의점 봉지를 펼치며 맥주를 주워담는다.
“지난번엔 이거 말고 딴거 마시더니 그새 취향 바뀌었나보네?”
“하하, 그렇지 뭐.”
아냐, 그 때도 지금도 그냥 손 가는대로 집은 거야! 근데 내가 사간 걸 왜 기억하고 있는거지? 헉, 이거 그린라이트? 심장이 널을 뛰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다. 얼버무리는 내 말에 쿠로오는 그냥 가볍게 웃으며 포스화면에 나타난 성인확인 버튼을 툭, 터치한다.
“손님, 470엔 되겠습니다.”
“여기요.”
“500엔 받았습니다.”
능숙하게 계산을 하고 거스름돈까지 내어준 쿠로오가 봉지 손잡이를 가지런히 모아 내민다. 아, 괜히 어색하게 발끝으로 바닥만 비비적거렸다. 아, 진짜 밑져야 본전이기만 해도 좋으련만. 후우, 긴장해 호흡을 어색하게 고른다.
“오늘 알바 몇시에 끝나?”
“응? 곧 끝나긴 하는데...”
“끝나고 일 있어?”
“응?”
“끝나고 잠깐 볼래? 할, 할말이 있어서.”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서 갈비뼈가 아픈 것 같다던지 호흡이 모자라서 머리가 어지러운 것 같다던지 그런 감각들은 이미 아득하게 도망간지 오래였다. 오직 모든 감각 기관들이 쿠로오의 대답을 기다리느라 바짝 날이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따 알바가 끝난 쿠로오를 붙들고 나는 말해버릴 셈이었다. 나는 너는 오래전부터 좋아하고 있었노라고, 그러니까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순간부터 나는 너만 바라보는 짝사랑을 3년 동안 하고 있었노라고 그렇게 벼르고 별러왔던 고백을 와다다 쏟아내버릴 참이었다. 그러니까, 잘해봐야 본전인 짝사랑을 오늘로 끝내버릴 계획이었다. 왜 하필 그게 오늘이냐고 물어보면 나도 잘 대답할 순 없었지만, 거리에 넘실거리는 연말의 분위기라든지 몇 시간 뒤면 올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날이라는 분위기가 나를 부추겼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카운터에 선 쿠로오의 뒤로 보이는 벽시계가 10시 30분을 1분 남겨두고 있었다.
“나 오늘 11시에 끝나긴 하는데..”
“그래?”
“응 근데..”
아, 곤란한 얼굴이다. 본능적으로 온 몸의 감각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바라봐온 얼굴이니 조금만 표정이 변해도 어떤 감정인지 잘 알 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시선을 떨어뜨려 카운터에 놓인 봉지를 집어들었다.
“선약 있구나?”
“아, 그게 그러니까.... 할말이 뭔데? 급한거야?”
“응?”
“지금 손님도 없고 하니까.. 지금 하면 안돼?”
응 안돼. 아무리 그렇다고 어떻게 고백을 이렇게 얼렁뚱땅하냐. 수면 위에 뜬 나뭇잎 배를 탄 듯 넘실넘실 거리던 감정이 삽시간에 꼬르륵, 물속으로 가라앉는 기분이다. 단숨에 씁쓸해지는 표정을 얼른 털어내버리고 손에 쥐고 있던 동전을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응, 안할래.”
“아, 저. 사와무라.”
“일 있으면 나중에 따로 보자. 연말 잘 보내고, 이틀 빠르지만 새해 복 많이 받고.”
“아, 저. 이따가 전화할게 내가.”
“알았어.”
손을 흔들려 돌아서는 내 모습에 쿠로오가 다급하게 말을 꺼낸다. 그와 동시에 편의점 문에서 찰랑거리며 손님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내 모습과 손님이 들어오는 문을 번갈아 바라보는 쿠로오가 허둥거리고 있어 나는 빠르게 편의점을 벗어났다. 편의점 문이 닫히기 전에 어서오세요, 하고 손님에게 인사하는 쿠로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긴 약속을 한 것도 아닌데 먼저 다른 사람과의 선약이 있을 수도 있지 내가 너무 섣불리 굴었던거다. 그것도 바쁜 연말에 약속이 당연히 있을거였는데. 그래도 어쩐지 미리 약속을 잡아두면 고백의 말을 내뱉는 순간까지 도저히 떨림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무턱대고 질러버린거다. 그러니까 이렇게 거절당해도 할말은 없는거지. 발걸음을 옮길 때 마다 손목에 걸어둔 편의점 봉지가 덜렁거리며 차가운 맥주캔이 허벅지에 툭, 툭, 닿는다. 연말의 분위기가 묻어있는 거리를 잠시 걸었다. 그닥 번화가가 아닌 동네 골목에도 연말 연시를 축하하는 플래카드가 걸리고 연말 세일이니, 복주머니 이벤트니 하는 전단지가 상점가에 걸려있었다. 불꺼진 어두운 상점가에 한달 전 부터 걸려있던 반짝이는 복주머니 모양의 꼬마전구들이 군데군데 선이 끊겨 얼룩덜룩한 모양새였다. 간혹 차가운 공기를 스치고 지나가는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라든지 어딜 다녀오는지 하하호호 행복한 모습의 연인이 지나간다. 상점가를 지나 조금만 더 걸어가면 내가 살고 있는 맨션이 나왔다.
두어층 올라가서 열쇠로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 턱 밑까지 둘둘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 아무데나 두었다. 겨울의 냄새가 잔뜩 묻은 코트차림으로 바닥에 앉아 침대에 반쯤 몸을 기댔다. 손목에 여전히 걸려있는 편의점 봉지를 대충 풀어내어 그 안에 담긴 맥주를 꺼낸다. 달칵, 시원하고 청량한 소리가 마치 광고에서나 나오는 것 같았다. 맨정신으로는 차마 말하지 못할거 같아서 산 거였는데 이렇게 우울함을 달래려 홀짝거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아, 기운빠져. 따듯한 소재로 바꾼 침대 시트에 뺨을 기대자 포근하고 부드러웠다.
그러니까 왜 고백도 제대로 못할 상대를 좋아하게 되어버려서 이렇게 마음을 졸이고 있는지 모르겠다. 부활동으로 시작한 배구로 쿠로오를 처음 만났다. 첫 만남은 여름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한 골든위크의 연습경기였다. 첫 인상은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좋은 사람인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좋은 사람이어서 손쉽게 좋아하게 되어버렸지만 마음을 드러내는 건 역시 쉽지 않아서 이렇게 답답하게 굴고 있는 거다. 이대로 참고 있다간 나도 모르게 좋아해, 하고 입에서 튀어 나가 버릴 것 같아서 고백하자고 마음 먹은거다.
사온 맥주를 하나하나 마시며 캔을 비웠다. 힐끔, 핸드폰 시계를 바라보자 11시 39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니까 왜 그게 하필 오늘이었냐 하면 21분 뒤 있을 내 생일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생일인데 설마 거절하겠어? 미안해서라도 받아주지 않을까? 하는 안일한 생각탓이기도 했다. 정작 상대는 내 생일인지 기억도 못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괜히 코끝이 찡하게 울리며 눈밑이 뜨끈해진다. 그러니까, 잘해봤자 본전인 고백이라니까. 우울해져서 얼굴을 침대에 묻고 눈을 감았다. 아 이런 기분으로 술까지 마셔버렸더니 최악이다. 얼굴을 시트에 비비적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핸드폰이 울린다. 받을 기분이 아니라 가만히 내버려두었더니 끊겼다가 다시 울린다. 거 참 끈질기네, 하고 핸드폰 화면을 보면 두둥실 떠오른 이름은 쿠로오의 것이었다.
방금 전까지 바닥을 구르고 있던 기분이었는데 어째서 이렇게 바보같이 즐거워져 버리는 걸까. 고작 네 이름일 뿐인데. 아까 전화한다더니 진짜 전화를 한 모양이다. 지금 기분으로 전화를 받으면 분명히 기분이 뒤숭숭해질 걸 알면서도 손은 저절로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 여보세요? 사와무라? 어디야?
“아. 뭐.. 알바는 끝났어?”
- 응. 지금 어디야?
“어딘진 왜 물어봐. 너 약속 있다며.”
- 약속 없었어.
쿠로오의 목소리가 답답함을 담고 있어서 나도 모르게 피실피실 웃어버렸다. 핸드폰 너머의 얼굴을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기분이 들뜨고 겉잡을 수 없어진다. 아, 나 역시 네가 좋아.
“내가 할말이 뭔지 궁금해서 전화했어?”
-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아니, 그것도 궁금하긴 한데. 아씨, 너 지금 어디야?
“나 지금 집인데.”
- 딱 기다리고 있어.
그러더니 뚝, 전화가 끊긴다. 뭔가 이상해서 핸드폰을 들여다보니 진짜 전화가 끊겨 있었다. 얼떨떨한 기분에 화면이 꺼진 핸드폰만 내려다보았다. 기분이 넘실넘실, 간질간질 이상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조용한 방안에 잠시 앉아 있으면 쿵쾅쿵쾅, 요란한 발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계단을 뛰어올라오더니 곧 우리집 앞에 멈춰서 초인종을 누른다. 넘실거리는 기분으로 비틀거리며 일어나 현관문을 열었다.
“엇, 야. 왜 그냥 문 열어.”
“쿠로오..?”
“야, 누군지 확인은 하고 문 열어야지. 왜 그냥 문 열어, 너 술 마셨어? 아니다, 일단 들어가.”
저 혼자 다급하게 그러더니 현관에 선 나를 방안으로 떠밀어 넣는다. 얼떨떨하게 뒷걸음질을 치며 방안으로 들어가자 쿠로오가 신발을 벗어던지고는 방안으로 쑥 들어온다. 겨울의 냄새가 잔뜩 묻은 쿠로오가 빨갛게 된 얼굴로 내 방안으로 들어온다. 믿기지 않아 눈을 차분하게 꿈뻑인다.
“야, 너 술도 못하는게 그 맥주를 다 마셨어?”
“마시다 보니..”
“안 취했냐? 뭔 일 있어? 왜 이렇게 술을 마셨어.”
“그냥...”
얼떨떨하게 말하는 나를 보던 쿠로오가 고개를 돌려 벽시계를 확인한다. 12시를 5분여 남겨둔 시간, 쿠로오는 제 손에 들려있던 작은 상자를 불쑥 내민다.
“촛불 키자.”
“응?”
“아직 안 늦었네. 그렇게 서있지 말고 얼른 앉아.”
건네받은 상자를 들고 얼떨떨하게 서 있는 내 어깨를 꾹 눌러 자리에 앉힌 쿠로오가 작은 테이블을 꺼내 펼치고는 상자를 다시 가져간다. 새하얀 상자를 열면 케잌이 스르륵 나왔다. 딸기와 초코로 화려하게 장식 된 위에, 생일 축하해, 다이치 하고 써 있는.
어떤 분에게는 유쾌하지 않은 소재나 이야기일 수도 있고 같은 경험을 가진 분이 주변에 계실지도 몰라 연성에 있어 조금 망설였지만 ㄴㅇㅌ판 형식으로 쓴 이야기인지라 우리 주변에 있음직할 이야기, 정도로 생각하고 연성의 하나로 봐주시고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미야기판] 철 없는 남편과 이혼조정 중입니다. (+추가)
결시친 여러분 안녕하세요.
철 없는 남편이라는 제목으로 예전에 판을 썼었는데 오랜만에 다시 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글에 많은 분들이 위로해주시고 용기 주는 댓글 달아주셔서 남편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좋은 소식으로 찾아 뵈었다면 좋았겠지만 제목대로 결국 남편과는 이혼조정 중입니다.
모든 일이 정리가 된 다음에 말씀을 드리는 것이 순서겠지만 많은 분들이 뒷 이야기를 궁금해 하실 것 같기도 하고 저도 어떻게 하면 좋을 지 조언을 좀 구하고 싶어서 이렇게 이야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정신이 없어 이야기가 엉망진창일 것 같지만 이해해주시고 읽어 주셨으면 합니다.
신정 사건 이후로 남편도 제가 쓴 판을 봤더군요. 자기가 쓴 댓글이 베플이 되면서 많은 분들께 질타도 당하고 욕도 먹으면서 정신 차린 건지 바로 미야기로 냉큼 달려왔습니다.
저희 부모님한테 장인어른 장모님하고 세상 둘도 없는 달콤한 목소리로 살살 애교부리고 눈치보는거 보니까 다시 화가 나다가도 또 마음이 약해지더라구요. 저희 부모님이 남편을 정말 예뻐라 합니다.
전에도 말씀 드렸듯 연애 시절부터 그렇게 잘 할 수 없었어요. 저도 그 점 보고 남편과 결혼을 결심한거긴 합니다.
저희 부모님은 먼데까지 왔다고 그 늦은 시간에 부랴부랴 상을 보시더라구요. 그 때 진짜 울컥했습니다. 시댁이란 것들은 저한테 어떻게 했는데. 부모님께는 됐다고 하고 남편 끌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신정연휴라 열린 데는 하나도 없고 데이트 할 때 자주 갔던 집 근처 공원에서 얘기 좀 하자 했습니다.
너 내가 한발짝만 더 따라오면 이혼서류 떼러 간다 했냐 안했냐 라니까 바로 앞에 무릎 꿇고 싹싹 빌더군요. 자기가 잘못했다고 한번만 봐달라고.
그놈의 정이란게 뭔지 또 마음이 약해지더군요. 남편이랑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계속 만나왔습니다. 장거리 연애라 지칠만도 한데 남편은 그런 기색 하나도 안 내고 저한테 잘 했고요. 그런 남편이 결혼하고 고작 1년도 안되는 시간에 그렇게 변할 줄 몰랐기에 그런 점들이 서운했던 것이겠죠.
마음이 약해지니 눈물부터 나더군요. 남편 앞에서 눈물을 보인적은 거의 없었기에 제가 우니 남편이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는 정말 진지하게 얘기하더군요. 저를 끌어안고 보듬어 주면서 제가 너무나 좋아했던 다정한 목소리로 미안하다고 몇번이고 말해주었습니다. 제가 사랑하던 그 사람 그대로의 모습으로 진지하게 이야기 해주었고 마음이 풀릴 수 밖에 없더군요.
그 뒤로 연애시절처럼 손을 잡고 아무도 없는 거리를 걸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서운 했던 것, 미안했던 것, 고마웠던 것. 조금만 참으면 될거라고 생각했는데 참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더라구요. 남편도 그 동안 니 마음 몰라서 미안했다 진심으로 사과해주었습니다.
그 뒤로 다시 도쿄의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시댁에야 당연히 밉보였겠지만 남편이 어떻게 말해준건지 더 이상 연락은 오지 않더군요. 매일매일 안부전화 해야되는 일상도 사라졌습니다. 그야말로 남편과 저 단 둘의 결혼 생활이었고 우습게도 그제야 아 진짜 신혼이다 싶더군요.
하지만 행복은 얼마 가지 않았습니다. 결혼이 지옥이니 뭐니 하는거 다 남 얘긴 줄 알았는데 저한테도 현실이 되더군요.
한 삼년 쯤 되니 슬슬 아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저와 남편은 아이 생각이 별로 없는 편이라 두 사람의 생활을 충분히 즐기고 갖자고 결혼 전에 합의했었습니다. 근데 일년에 몇번 없는 집안 행사에 참여하면 꼭 어른들이 아이 이야기를 하시더라구요. 그 때 마다 남편이 잘 둘러대주긴 했지만 그런 집안행사들이 가시방석 같았습니다.
물론 초반엔 저도 계속 이야기를 들으니 아이에 대한 호기심이라고 할까, 이 사람과의 아이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들었고 농담처럼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남편과 나누기도 했습니다. 심각하게는 아니고 그냥 딸이 좋아 아들이 좋아 뭐 그정도의 가벼운 이야기요.
아이가 생긴 후에는 부모로서의 삶에 충실하고 싶었기에 그 전에는 부부로서 충실히 지내고 싶었습니다. 그 욕심이 너무 컸던 탓인지 아이는 전혀 소식이 없더군요. 아침에 임테기에 뜬 한줄을 볼 때 마다 제가 너무 욕심을 부린 건 아닌가 후회되고 점점 우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그런 저를 잘 알기에 별 말을 하지 않았지만 본인도 불안하고 초조했겠지요.
그러던 어느 주말이었습니다. 웬일로 시댁에서 부르시길래 같이 저녁 식사를 하러 남편과 함께 건너갔습니다. 사실 별 좋은 소리 들을 것 가진 않았지만 아이 소식이 없는 상황에서 왠지 시댁에 갈 때 마다 저는 죄인 같더군요.
좋은 고기가 선물로 들어왔다며 같이 먹게 불렀다는 시댁에는 오랜만에 보는 시누가족도 왔더군요. 거리가 멀어서 만날 일이 거의 없습니다. 아마 저희 결혼식 이후로 한 두번 정도 봤던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식구들 모이니 북적북적 거리더라구요. 저도 좋은 며느리 되고 싶어서 어머님 기분도 맞춰드리고 잘 하지도 못하는 애교도 부리면서 바쁘게 그러던 중 간장이 똑 떨어져서 제가 얼른 다녀오겠다며 지갑 들고 시댁에서 나섰습니다.
시댁 냉장고에 없던 과일도 좀 사고 시조카 먹을 간식거리도 좀 사고 양손에 마트 봉지 들고 시댁으로 갔는데 환기시켜 놓는다고 반쯤 열어놓은 현관문 너머로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오더군요.
처음엔 오랜만에 만난 가족끼리 할 얘기가 많겠거니 싶어 별 신경을 안 썼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제 이름이 자꾸 나오더라구요. 제 이름과 임신, 단 두 단어를 듣자마자 발끝이 차갑게 식는 느낌이 들더라구요.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현관께에서 그 이야기들을 다 듣고 있었습니다. 그 내용을 자세하게 쓰자니 아직도 손이 덜덜 떨려 간단하게 말하면 아직도 아이 소식이 없는데 너네 부부관계는 제대로 하고 있냐 일부러 임신 안하는 거냐 도대체 뭐가 문제여서 아직 소식이 없느냐... 네, 제가 이렇게 말했지만 실제 대화에서는 들어주기 힘든 욕설에 가까운 단어들도 종종 섞여 들려오더군요.
참 지금 생각해도 바보 같은 것이 모른 척 뻔뻔하게 현관문 뻥 차고 들어가서 저 왔다고 무슨 얘기 그렇게 재밌게 하고 계셨냐고 하하호호 웃으면서 그냥 여우짓 좀 할 걸 그랬습니다. 근데 제가 그걸 진짜 못하거든요, 여우짓. 마냥 서서 그 이야기를 다 듣고 있었습니다.
저도 그 몇년 간 말도 못할 정도로 지쳐있던 것 같았습니다. 저도 아이를 원했지만 그 것보다 주변에서 아이 이야기를 더 많이 들었기에 받은 스트레스가 저도 모르게 쌓여 있었겠지요. 너무 마음이 아프니 눈물도 나지 않더군요. 저들 말처럼 제가 지은 죄가 많아서, 성질머리가 더러워서 아이가 찾아오지 않는건가 하는 생각도 들더라구요.
그 뒤로는 모른 척 시댁에 들어가 마트 봉지 내려 놓으면서 먹고 싶은게 넘 많아서 고르는게 늦었다는 둥 어설픈 너스레를 떨다가 음료 사오는 걸 잊었다며 다시 다녀오겠다며 시댁에서 나섰습니다. 저도 참 바보 같은게 모른 척 할거면 영리하게 했어야 했는데 봉지 안에 아이스크림이 다 녹아 물이 된 걸 보였으니 제가 이야기들을 들은 걸 다 들키고 말았습니다.
나와서 아무 생각 없이 한참을 걷고 있는데 남편이 부랴부랴 쫓아오더군요. 한참 헤맸는지 얼굴엔 땀범벅이 되어서 저를 보고 뭐부터 말해야 될지 모르는 얼굴로 있는데 참 마음이 그렇더군요.
제가 왜 그렇게 시댁에 죄인이 되어야 하는지, 남편이 왜 그렇게 저에게 죄지은 얼굴을 해야하는지 저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남편과 한참을 만나왔는데 그 얼굴의 의미를 제가 어떻게 모를까요.. 남편은 저에게 적당한 잘못은 꼭 사과부터 하는 사람입니다. 사과도 못할 정도로 미안한 마음이 큰 남편의 얼굴을 보고 저는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했습니다.
제가 미안해서 요구한 것도 있으며 남편이 더 좋은 사람을 만나서 아이라는 행복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에 한 것도 있습니다. 남편은 거절했지만 저는 한번 결심이 서니 번복은 안되더라구요.
그 뒤로의 시간은 정말로 힘들었습니다. 남편에게 일부러 모질게도 굴면서 서로에게 상처주는 날들이 반복되고 결국 남편은 제 의견을 받아들여 주었습니다.
후회가 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것보다 제 결심이 더 컸습니다. 남편을 놓아주고 저도 저를 옭아매는 이 무게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남편과 합의 이혼으로 서류를 제출하고 지금은 조정기간을 가지고 있는 중입니다.
저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는 분들도, 힘든 분들도 있으시겠지만 저는 이런 선택을 하게 되었습니다.
요즘 부쩍 차라리 결혼을 하지 않았으면, 아니면 조금 늦게 했으면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참 사람 인연이라는 것이 알 수가 없네요.
저의 선택을 비난하실 수도 있으시겠지만 잘 했다고 다독여주실 분들 계실까요?
익명이라는 공간을 빌어서라도 누군가에게 잘 했다는 말을 듣고 싶기도 하네요. 이것 또한 제 욕심이겠지요.
남편과는 현재 거의 대화를 하지 않는 상황입니다. 아직 집 정리를 하진 않았구요. 매일 얼굴 보는 것도 괴롭지만 남편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날도, 얼굴 볼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그냥 조금 더 견뎌보자 싶어지네요.
배구화를 살 목적이었던가. 간만에 번화가 쇼핑센터 스포츠용품점에 함께 나왔던 사와무라와 스가와라는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유명 체인 패밀리 레스토랑에 앉아 메뉴판을 가리키며 이것저것 주문했다. 체육하는 남자애들답게 토핑이 가득 올라간 함바그와 사이드메뉴 몇개를 주문한 두 사람은 점원이 물러나고 난 뒤 이것저것 오늘의 쇼핑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배구화, 서포터, 스포츠타월 등등 무슨 브랜드가 좋다느니 이번에 산건 어떻다느니 조금 수다를 떨다말고 사와무라는 가만히 뭔가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어쩐지 먼저 쇼핑을 오자고 제안한다 했더니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사와무라는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적어도 스가와라에게는 다 보였다. 같이 지낸 세월이 몇년인데 주장의 포커페이스는 스가와라에게는 훤이 속이 들여다 보이는 것이었다. 직원이 가져다 준 음료를 빨대로 뒤적거리던 사와무라가 크흠,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다.
“스가는 졸업하고 나면 어떡할거야?”
“나? 글쎄, 지금 성적으로는 쪼오금 힘들진 모르겠지만 목표로 하는 대학이 있으니까. 합격한다면 좋겠지.”
“그렇지.”
대학인가. 조그맣게 입 안에서 가볍게 단어를 곱씹은 사와무라가 빨대로 음료를 쪽 빨아당겼다. 앞니를 세워 까득까득 빨대 끝을 튕기다가 힐끔 스가와라를 쳐다본다. 그러니까, 다 보인다니까 다이치.
“할 말 있어?”
“...응.”
말해보라는 듯 스가와라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조금 가까워지는 스가와라의 몸에 사와무라가 입술을 한일자로 굳게 다물며 결심한 표정을 짓는다.
“쿠로오가..”
“응.”
“......”
쿠로오라면 네코마의 주장. 두 사람은 여름합숙을 계기로 사귀게 되었다. 그 연애의 시작을 한 여름밤의 장난같다고 스가와라는 생각했다. 뻣뻣해서 배구 외에는 전혀 관심 없는 것 같던 사와무라와 그 쿠로오와의 연애라니. 처음엔 조금 걱정했으나 다행히 두 사람은 잘 만나고 있는 것 같았고 공과 사를 구분하는 사와무라는 연애감정을 배구에까지 끌고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전보다 배구에 좀 더 날개가 달린 것 같다고 하면 조금 오바일까? 그런가 하면 또 혼자 핸드폰을 보며 미소짓는 주기가 는 것이, 연애에 이상전선도 없어 보였다. 그래서 사와무라가 한참을 머뭇거리다 던진 쿠로오가, 라는 말에 스가와라는 의아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막상 뱉어놓고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사와무라였다. 어흠, 크흠, 어설프게 목을 가다듬는 사와무라에게 스가와라는 툭, 가볍게 물었다.
“왜? 요즘 사이 별로야?”
“아니, 그런건 아니야.”
“그러게, 다이치 요즘 얼굴 좋아보여서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어.”
스가와라의 말에 사와무라가 머쓱하게 입술을 삐죽인다. 부끄러움을 참는 표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긋해진 귓볼에서는 다 티가 났다. 스가와라는 재촉하지 않고 얌전히, 느긋하게 뒷말을 기다렸다.
“쿠로가 말이야.”
“응.”
“얼마전에 연락이 왔는데..”
“그런데?”
“졸업하면..”
또 입술을 물고 꼬물락거린다. 보나마나 뻔하지 뭐. 졸업하면 도쿄에서 같이 대학 다닐래? 아니면 같이 자취할래? 뻔히 보이는 대답에도 스가와라는 인내심 좋게 기다려주었다. 뻣뻣한 사와무라에게는 좀 쑥스러운 말일지도 모른다.
“왜, 같이 대학 가쟤?”
“결혼하쟤.”
콜록ㅡ스가와라는 빨대로 음료를 빨아 당기다 말고 기침을 내뱉었다. 괜찮아? 사와무라는 다급하게 테이블 위에 놓인 냅킨을 뽑아 스가와라에게 건넸다.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고 바튼 기침을 하던 스가와라가 느릿하게 사와무라가 내미는 냅킨을 받아들었다. 내가 지금 뭘 들은거지? 스가와라는 제 귓가를 맴도는 사와무라의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
“뭐라, 뭐라고?”
“쿠로오가 결혼, 을 하자는거야.”
웃기지 않냐. 사와무라가 크흐흐 웃으며 덧붙였다. 스가와라는 아랫 입술에 맺혀 뚝뚝 떨어지는 음료를 냅킨으로 훔쳤다. 웃긴건 지금 니 얼굴이거든. 말도 못하게 웃긴 얼굴로 웃는 사와무라의 얼굴을 할 수만 있다면 거울을 들어 보여주고 싶었다.
“더 기다릴 수가 없다나 뭐라나. 손에 물 한방울 안 묻히고 행복하게 살게 해줄테니 결혼을 하자는거야.”
아주 이것들이 쌍으로 웃기고 있네. 어이가 없어서 스가와라는 한마디 하려다가 아주 엉망이 된 사와무라의 얼굴을 보고 이마를 짚었다. 동화속 꿈나라 어딘가를 헤메는 듯한 얼빠진 얼굴의 사와무라에게 쓴소리를 하고 싶었지만 스가와라는 꾸역꾸역 치솟아 오르는 말을 집어 삼켰다.
“진심이야?”
“모르지. 장난인지, 진심인지.”
사와무라는 어쩐지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 얼굴은 스가와라 마저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어쩐지 장난인거 같은데, 근데 이번은 좀 믿어주고 싶은게, 쿠로오가 이만한, 이따만한 빨간 장미꽃 다발을 내밀면서 그러지 않겠어. 결혼하자고. 처음엔 무슨 장난인가 싶었는데, 품속에서 떡하니 반지케이스까지 꺼내는거야.”
웃기지 않냐? 푸하하 웃어버리는 사와무라의 반응에 스가와라는 웃을 수도 없었다. 어디서부터 한마디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싶어 이쯤되니 자포자기 하는 심정이 되어버렸다.
“졸업하면 성인이니 못할 것도 없으니까,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대는 거야.”
“다이치ㅡ”
사와무라의 말을 중간에 끊은 스가와라가 가만히 바라보았다.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줄곧 이야기를 이어가던 사와무라는 어쩐지 목덜미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주 웃기지도 않아서. 스가와라는 피식 웃어버렸다.
“자랑하는거야?”
“음, 굳이 그런건 아닌데.”
티 났어? 장난스러운 말에 스가와라가 일부러 인상을 찌푸리는 시늉을 한다. 스가와라는 낡아빠진 쇼파에 풀썩 등을 묻었다. 타이밍 좋게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ㅡ하고 점원이 음식을 내어왔다. 지글지글 철판에 함바그 익는 소리와 코를 자극하는 냄새가 가득 찼다.
“핸드폰 대기화면에 있던 장미 꽃다발이 그거냐?”
“엇, 그건 언제 또 봤어?”
“어울리지도 않는 새빨간 꽃다발을 해놨는데 눈에 바로 들어오지 그럼.”
포크와 나이프로 먹음직스럽게 함바그를 썰며 키득키득 웃는다. 남자끼리 결혼이라니, 웃기지도 않는 얘긴데 사와무라가 어쩐지 신난 목소리로 그러고 있으니 두 사람의 연애놀음이 그럴싸해보이는 것이었다.
“아사히한테는 너 프로포즈 받은 얘기 했어?”
“아니, 그 애송이수염한테 말해봤자 걱정부터 할게 뻔하잖아.”
“그렇지.”
키들키들,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잠깐, 프로포즈?”
“야 그럼 결혼하자고 했지 장미 다발도 줬지 반지까지 준비했다며, 프로포즈 아니냐?”
“그렇게 되는거야?”
“그럼.”
아 그건 좀 곤란한데. 사와무라가 머쓱한 표정으로 뒷덜미를 긁적였다. 결혼하자는 되고 프로포즈는 안되는 거냐고, 웃기지도 않는 사와무라의 반응에 스가와라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까, 다 보인다니까 다이치. 너 지금 부끄러워 하고 있잖아. 웃기지도 않아서 정말.
퍽, 퍽, 몽둥이를 내리치는 소리가 살벌했다. 입술을 꽉 깨물고 제 앞의 제자를 체벌하는 선생님의 얼굴에서 말로 다 하지 못할 마음 아픈 기색이 역력했다. 그걸 보고 있는 쿠로오의 얼굴에도 괴로운 기색이 역력했다. 사와무라는 그저 어설프게 질색했다.
“재밌냐?”
“넌 저걸 보며 아무렇지도 않냐?”
단숨에 따라붙는 대답이 사와무라는 야만인! 어떻게 저런 걸 이해 못할 수가 있지! 라는 속마음이 담긴 것 같아 사와무라는 샐쭉하게 눈을 뜨고 혀를 찼다. 티비 속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쿠로오는 또 다시 빠져들었다. 그놈의 한류열풍. 사와무라는 테이블 위에 놓인 대여점 DVD 커버를 힐끗 보곤 소파에 몸을 푹 묻었다. 우연히 티비에서 하는 한국 드라마를 보고 푹 빠져버린 쿠로오는 그 이후로 집 근처 대여점에 매일 출근 도장을 찍었다. 격렬한 감정이 소용돌이 치는 드라마에 푹 빠진 쿠로오는 쿠션을 꽉 끌어안으며 몸을 배배 꼬며 연신 앓는 소릴 냈다. 그래, 그건 다 좋다치고 왜 나까지 여기서 이러고 있어야 하는거지. 사와무라는 흥미를 잃고 제 주머니 속에 든 핸드폰을 꺼내 만지작 거렸다. 오늘따라 어디서 연락도 안오네. 하긴, 오늘따라가 아니고 쿠로오와 같이 살기 시작하면서 주변 지인들에게 연락이 죄다 싹 끊겼다. 애인과 동거라니 우리가 방해하면 안되잖아? 히죽히죽 웃던 지인들의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어쩌자고 이 못생기고 멀대같은 놈이랑 사귀게 되고 동거까지 하게 되었을까. 그것도 매일 드라마를 본다고 티비 앞을 떠나지도 않는 여자력 높은 이런 놈이랑. 사와무라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재미 없어?”
“자막 읽기 귀찮아.”
대충 쿠로오에게 기대면서 볼멘소리를 냈더니 쿠로오가 낮게 웃는다. 흥미라곤 전혀 없어보이는 사와무라가 신경 쓰이긴 했는지 쿠로오가 대충 사와무라의 분위기를 살피다가도 힐끔힐끔 다시 티비로 시선을 돌리곤 했다. 격정적인 드라마의 내용은 감정의 클라이막스를 향하고 있었다. 아아, 외국어가 잔뜩 쏟아지는 드라마를 며칠 동안 들었더니 소리만 들어도 피곤해졌다. 애초에 선생님이랑 제자의 사랑이라니, 그런 비현실적인 관계에는 흥미도 안 생긴다고. 사와무라는 작게 삐져나오는 하품을 깨물며 쿠로오의 무릎을 팡팡 손으로 내리쳤다.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쿠로오가 무릎을 펴주고 사와무라는 늘어지는 몸을 그 위로 기댔다. 무릎을 베고 누운 사와무라가 제가 편한대로 자세를 잡고는 무관심한 얼굴로 티비 화면을 바라봤다.
“너는 선생님 좋아한 적 있어?”
심심해서 툭 튀어나온 말이었다. 동경 같은 그런거 말고 진짜 좋아한 적..하고 덧붙이다가 어쩐지 민망해져서 사와무라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으음, 하고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쿠로오의 목소리에 은근히 긴장한 사와무라가 머쓱하게 흠흠, 목을 다듬었다.
“그러고 보니 고등학교 때 미술 선생님이 진짜 예쁘셨는데.”
얼씨구?
“진짜 그림으로 그린듯한 미술 선생님 있잖아. 미인도 화폭에서 톡 튀어나온 거 같은. 미술 수업 같은거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그땐 진짜 즐거웠는데.”
이게 보자보자하니까..
“그 선생님이 미술 용구 같은거 옮기는거 때문에 나한테 많이 부탁하셨는데.”
“헤에.”
“그리고 미술실 정리 같은거 때문에 자주 부르셨구.”
“그랬구나.”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착 가라 앉았다. 가만 생각해보면 쿠로오와 고등학생 때의 추억은 땀내나는 체육관에서의 모습 밖에 없었다. 물론 그거에 반하긴 했지만! 뭔가 저런 반짝반짝한 로망스 가득한 학창시절의 쿠로오는 제가 모르는 미지의 시절이었다. 저건 드라마야, 현실에 없는 드라마일 뿐인데 어쩐지 제가 공유하지 못한 시절이 있다고 하면 조금 언짢아지는 것이었다. 사와무라도 이 감정이 뭔지 잘 알았다. 그래, 질투. 질투라는 거겠지! 하지만 드러내면 좀 민망하니까 사와무라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고맙다고 자주 맛있는거도 사주시고 부활 끝나고 집 가는 길에 시간 맞으면 종종 데려다주시곤 하셨었지.”
뭐라고....? 마지막 말까진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사와무라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미모의 여선생님.. 그것도 미술 선생님이랑, 집까지 같이 갔다고? 야 너 그 때 나랑 썸타고 있을 때잖아! 너 나를 두고 어떻게.. 마구잡이로 떠오르는 것 중에 뭐부터 말해야할지 모르는 얼굴이 된 사와무라가 얼굴이 시뻘개진 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런 사와무라의 얼굴을 보더니 쿠로오가 풉, 웃음을 터트린다.
“라는 내용의 드라마를 봤던거 같기도 하고.”
“뭐?”
“미인도 화폭에서 톡 튀어나온 거 같은, 에서 벌써 눈치 채야되는거 아니야? 다이치 은근히 둔하네?”
“뭐라고!”
발끈한 사와무라가 발을 들어 쿠로오의 옆구리를 걷어차는 것 보다 쿠로오가 뻗은 손이 사와무라의 발목을 잡아채는 것이 더 빨랐다. 으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소파에 푹 눕혀지게 된 사와무라가 제 위로 몸을 겹쳐오는 쿠로오를 재빨리 밀어냈다.
“아 뭐하는거야, 드라마나 봐!”
“다이치가 이렇게 귀엽게 굴어주는데 어떻게 드라마를 보라는거야?”
싱글싱글 웃는 쿠로오는 즐겁다는 듯 사와무라의 뺨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좁은 소파 위에 겹쳐진 몸이 불편했지만 이런 분위기가 된게 실로 오랜만이라 사와무라는 결국 귀끝을 살짝 붉혔다. 쿠로오도 ‘그럴’ 마음이 된 건지 뺨을 꼬집던 손가락을 바꿔 부드럽게 뺨을 감싸쥐었다. 촉, 가볍게 입술이 맞닿고 깊게 입을 맞춰왔다. 요 며칠 드라마 좀 보더니 제법 분위기 잡는 시늉을 내는 쿠로오였다. 이거 나름대로 좀 나쁘지 않은 걸지도. 사와무라는 부드럽게 감싸오는 손길을 느끼며 동글하게 뜨고 있던 눈을 스르륵 감았다. 달큰한 공기에 촉, 촉, 가벼운 소리가 섞여들었다. 요령 좋게 티셔츠 안으로 파고드는 손길을 느끼며 사와무라는 오늘만은 모른 척 굴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딩동ㅡ’
뜬금 없는 타이밍에 울리는 초인종 소리만 아니었다면. 사와무라의 가슴팍을 야무지게 희롱하려던 손길이 우뚝 멈췄다. 방금까지 따끈하던 공기가 삽시간에 흩어졌다. 조금 떨어져 마주한 시선을 꿈뻑- 느리게 감았다 뜬 쿠로오와 사와무라는 이윽고 쏟아지는 소리에 현관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와무라상! 쿠로오상! 저희 왔어요 저희!”
“지난 번에 맛있다고 하신 가라아게 사왔어요!”
왁자지껄한 목소리들은 익히 아는 사람들이었다. 동거하는 집에 어떻게 놀러가냐고 히죽히죽 웃어대던 배구부 후배들이었다. 하하, 어색하게 웃은 쿠로오가 사와무라의 위에서 몸을 떼어내곤 발소리를 내며 현관으로 걸어갔다. 사와무라는 하하, 천장을 보고 어색하게 웃으며 한껏 치켜올라간 티셔츠를 천천히 끌어내렸다. 오랄 땐 안 오고 이것들이. 왁자지껄 떠들면서 두 사람의 집에 들어온 후배들이 야차같은 사와무라의 얼굴에 현관에서 다리에 힘이 풀려 오도가도 못한 신세가 되었다는 건 그 이후의 일이었다.
파스냄새가 옅게 섞인 땀냄새가 가득했다. 갓 봄을 넘긴 기온은 살짝 더운 듯 포근했다. 높은 체육관 천장, 시끌벅적한 목소리. 손바닥을 꽉 맞잡아 얽어쥐던 손바닥의 감촉, 웃음기 섞인 정중한 듯하면서도 지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던 목소리. 십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가끔씩 벼락같이 떠오르곤 하는 기억이었다. 오랜 시간을 쌓아오면서 그 언젠가의 기억은 예쁜 추억으로도 슬픈 기억으로도 되새겨지곤 했다. 사와무라는 제 앞에 놓인 낡고 잔뜩 스크래치가 난 씨디 케이스의 뚜껑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달각달각 조그만 소리를 내던 손놀림이 삐익---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에 멈칫한다. 몇번이나 본지 세는 것도 포기한 영상인데도 그날의 기억에 잠시 정신을 놓고 있으면 꼭 같은 부분에서 놀라버리곤 한다. 잘 부탁합니다!!! 우렁찬 체육계 남고생들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 나오고 잇따라 흘러 나오는 설익은 제 어린 목소리에 푸스스 웃어버리고 만다.
“나 왔어.”
그러다가 제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반쯤 고개를 돌린다. 현관에서 구두를 벗으며 인사를 하곤 제 목에 멘 넥타이를 살짝 당겨 느슨하게 만든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함께 들리는 걸 보면 근처 편의점에서 캔맥주라도 산게 틀림 없었다.
“어서와.”
“엑, 이게 뭐야? 옛날 생각나네.”
부스럭거리는 봉지가 테이블에 놓였다.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자주 가는 편의점 로고가 찍힌 비닐 봉지에 든 맥주와 조금의 주전부리. 사와무라는 소파 중간에 앉았던 몸을 옆으로 옮겨 앉으며 웃었다.
“정리하다가 보니까 있더라고. 옛날 생각나서.”
“화질 봐. 완전 구려.”
킬킬 웃은 쿠로오가 사와무라의 옆에 앉았다. 퇴근해 집에 들어오고 나서 간단하게 몇마디 나누고나면 곧장 옷을 갈아입으러 가는 쿠로오가 바로 앉는 걸 보니 오랜만에 보는 영상에 호기심이 동한게 분명했다. 쿠로오가 보자고 하면 민망하다며 외면하곤 했던 사와무라는 사실 이 연습경기 영상을 혼자서 수십번이고 보곤했다. 그 사실을 알리 없는 쿠로오는 그 사와무라가 먼저 틀었다는 사실이 흥미로운지 신난 기분으로 앉아 제 앞에 놓인 맥주를 꺼냈다. 딸깍, 경쾌한 소리가 들리고 사와무라에게 맥주캔이 내밀어졌다. 사와무라가 받아들면 쿠로오는 다시 허리를 숙여 봉지 안에서 제 몫의 맥주캔을 꺼내들어 뚜껑을 땄다.
“너네 꼬맹이들 괴짜 속공 처음 봤을 때 진짜 놀랐었는데 말이야.”
“지금 봐도 별로 다를건 없지만 지금 생각해도 저 녀석들 정말 무모했었지.”
꼴깍꼴깍 집중한 탓에 천천히 맥주를 마시면서 쿠로오는 화면에 눈을 떼지 못했다. 화면 속의 고등학생들은 배구공을 위로 쳐올리며 꽤나 기합섞인 목소리로 연신 외쳤다. 낯익은 목소리들을 듣고 있으니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졌다. 사와무라와 쿠로오는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취미로 배구공을 들었다. 가끔씩 사와무라는 모교에 찾아가서 후배들의 상담도 해주고 가끔은 연습 상대도 해주곤 했고 그것은 쿠로오도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함께 배구를 한 동료들은 달랐지만 그 때의 추억과 열정은 공유하고 있었다. 그 때 부터 계속 만남을 이어오면서 두 사람은 종종 그 날들의 이야기를 하곤 했다. 첫 연습경기, 도쿄 여름 합숙, 지긋지긋한 패널티들. 쿠로오는 주로 놀리는 목소리였고 그럴 때면 사와무라는 드물게 발끈하곤 했다. 뜨거웠던 여름, 열정 가득했던 코트 같은 것을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뛰었다.
“너 진짜 어리다.”
킬킬 웃으면서 쿠로오가 맥주를 한모금 더 삼킨다. 그런 쿠로오의 목소리에 사와무라는 조금 민망해졌다. 이래서 같이 보기 싫었던 건데. 지금보다 꼭 열살이 어린 화면 속 사와무라는 설익은 얼굴로 열정적이게 코트 위를 뛰어다녔다. 그럼에도 착실한 플레이는 자기 자신이 봐도 조금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단정했다. 밝게 웃고 동료들을 격려하고, 사회에 뒤섞여 이런저런 시간을 보낸 지금의 사와무라는 어린 제 자신이 조금 낯설면서도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그리고 그 맞은 편에서 저와 같은 몫을 하고 있는 어린 쿠로오를 보면 또 다른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맥주캔에 입술을 대다 말고 힐끔, 곁눈질로 옆에 앉은 쿠로오를 보았다. 성인이 된 쿠로오는 그 때 처럼 여전히 부스스한 헤어스타일을 고수하고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유연해지고 부드러워진 얼굴이었다. 언제 이런 얼굴이 되었을까.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제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는 얼굴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조금 모르는 사람 같은 기분이었다. 분명 함께 쌓은 시간이 만든 얼굴일텐데 어째서일까. 고개를 꺾어 제 손에 들린 맥주캔을 깔끔하게 비워낸 쿠로오가 반쯤 캔을 찌그려트리곤 테이블 위에 올려둔다. 그리고 다시 소파에 깊게 몸을 묻으며 사와무라의 등 뒤로 팔을 둘렀다. 언제나의 너무나 자연스러운 행동도 오늘은 조금 간질하고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사와무라는 괜히 긴장해 캔 입구를 앞니로 톡 물었다. 달각, 달각, 잘은 소리에 쿠로오가 몸을 조금 숙여 사와무라가 들고 있는 캔을 가볍게 가져가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리고 돌아오는 몸은 사와무라에게 가까웠다.
“이 상한다.”
여전히 등 뒤에 팔을 두른 채 쿠로오는 남은 손으로 사와무라의 입술 중간을 가만히 문질렀다. 앞니가 나 있을 부분을 엄지로 가볍게 문지른 손가락은 사뿐히 뺨을 쥐었다. 긴장한 어깨가 조금 작게 움츠러 들었다. 쿠로오는 낮게 웃으며 조금 숙인 사와무라의 턱을 가만히 잡아올리곤 입을 맞췄다. 몇번이고 돌려봐서 익숙한 영상의 소리가 귓가에 흘러 들어와 조금 낯설은 기분을 가져왔다. 사와무라는 쿠로오의 입맞춤에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이 되었다. 아마 첫키스 때도 이랬을 것이다. 어색한 자신과는 다르게 쿠로오는 느긋하고 여유롭게 굴어서 조금 화가 났던 것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이끄는 손길과 입맞춤에 조금 정신을 못차리고 있으면 등 뒤에 소파가 닿았다. 팔 안에 사와무라를 안고 자연스럽게 소파에 누운 쿠로오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입을 맞춰왔다. 야하기 짝이 없는 입술이 어설픈 입술을 베어물곤 짓궂게 굴었다. 처음 입을 맞추던 때도 어쩐지 이런 자세였다. 으응, 끙끙대는 목소리가 입술새로 새어나오고 그러면 어김 없이 쿠로오는 흐흥, 가벼운 콧소리를 내며 웃곤 했다. 그 때도, 지금도. 채 삼키지 못한 침 때문에 바튼 기침을 하면 쿠로오는 조금 떨어져 가만히 사와무라를 내려다 보았다. 어렸던 쿠로오는 지금과 꼭 닮았지만 조금 불안정하고 흥분한 날카로운 눈매로 사와무라를 내려다 보았었다. 어린 사와무라는 그런 쿠로오를 달아오른 얼굴로 밀어냈던 것도 같았다. 사와무라는 쿠로오를 밀어내는 대신 숨을 고르며 제 위의 쿠로오가 하는 모습을 올려다 보았다. 느슨한 넥타이에 손가락을 걸어 당긴 쿠로오가 바닥으로 넥타이를 떨어뜨린다. 그 손짓 하나하나에 긴장한 듯 꿀꺽 침을 삼켰다. 쿠로오는 그런 사와무라를 보며 느긋한 듯 웃었다.
“처음엔 긴장해서 울 것 같은 얼굴이더니, 지금은 아주 기대하는 얼굴이잖아 다이치.”
“뭐?”
“옛날엔 할 때 마다 처녀처럼 굴더니 지금은 언제 해주나 기대하는 얼굴이라구.”
“야, 내가 언제.”
“거울이 있으면 보여주고 싶네.”
쿠로오는 혀를 작게 내어 아랫 입술을 핥았다. 느긋한 행동이었지만 쿠로오의 미간이 살짝 접혔다. 여유로운 척 굴면서 다급한 얼굴이었다. 그 때도, 지금도. 맨 셔츠 위로 사와무라는 손을 뻗어 가볍게 쓸어올리며 쿠로오의 목덜미에 팔을 감았다. 여전히 입맞춤에 서툴었지만 쿠로오를 끌어안는 손길은 거침 없었다. 어쩐지 귀찮아질 것 같던 녀석. 쿠로오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했었다. 좋은 아이라고도 생각했었다. 인생에 좋은 사람이 되어 줄 것이라고도 생각했고. 사와무라는 달아오르는 몸을 느끼며 좁은 소파 위에서 다리를 들어 쿠로오의 허리를 무릎 안쪽으로 문질렀다. 왜 옛날 영상을 꺼내선. 조금 자책하며 사와무라는 쿠로오를 좀 더 힘껏 끌어 안았다.
아직 잠이 묻은 얼굴로 하품을 하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대충 훑어보다가 문짝에 붙어 있는 생수병을 꺼내 까드득, 뚜껑을 열었다. 목울대를 울리며 절반쯤 물을 마신 쿠로오가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흐트러진 시트와 엉킨 채 잠든 등이 조용히 오르락내리락 하며 아침 공기를 유연하게 휘저었다. 아침마다 단정하던 사와무라는 여느때와 다르게 정신 없이 잠들어 있어 부르기 망설여졌다. 물을 마시지 않으면, 하지만 섣불리 권할 용기가 없는 쿠로오는 잠시 머뭇거렸다. 알아서 챙겨 마시겠지. 쿠로오는 오른손에 든 병뚜껑을 돌려 닫았다. 삐익- 요란하게 울리는 냉장고 경고음에 쿠로오는 생수통을 밀어넣고는 문을 닫았다.
살짝 젖은 입술을 혀를 내어 날름 핥고는 찌뿌둥한 몸을 쭉 펴서 기지개를 폈다. 거실 벽에 걸린 거울 앞에 서서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제 상태를 확인한다. 상체를 대각선으로 길죽하게 가로지르는 흉터가 남았긴 하지만 실력 좋은 사와무라덕에 거뜬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이 정도 흉터쯤이야 쿠로오는 훈장처럼 여길 수도 있는 남자였다. 다만 어제의 기억이 역시 유쾌하게 남을 리가 없어서 거울 속의 얼굴은 언짢은 듯 미간을 찌푸렸다. 쏟아지던 파편과 요란스럽던 비명 그리고 저를 잡아채던 사와무라의 손길. 미간을 짓누르는 듯한 두통에 쿠로오는 입술을 베어물었다. 으음, 작게 신음하며 부스럭거리는 시트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일어났어?”
호쾌한 발걸음에 사박사박 거칠한 발바닥이 반들한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제법 크게 들렸다. 시트 위에서 몸을 작게 만 사와무라가 조금 느리게 움직여 상체를 일으켰다. 사와무라의 등은 얼룩덜룩한 정사의 흔적으로 어지러웠다.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킨 사와무라가 낮은 한숨을 내뱉었다. 사와무라는 뒤돌아 보지 않은 채 침대 옆 창문 밖을 응시했다. 따사로운 햇살이 차근하게 내리쬐는 그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아침이었다.
“..쿠로오.”
아, 그냥 물을 갖다 줄 걸 그랬나. 거칠기 짝이 없는 쉰 목소리에 쿠로오는 작게 눈을 찡그렸다.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에도 사와무라는 아랑곳 없이 이야기를 꺼냈다.
“어제 니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알아?”
“글쎄, 워낙 정신이 없었던지라.”
얄미울 정도로 느긋한 목소리에 사와무라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여느 때 처럼 주먹을 날리려나, 쿠로오는 느긋하게 옆에 한쪽 어깨를 기대고 섰다. 사와무라는 처음 만났을 때 부터 쿠로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그건 쿠로오도 마찬가지 였기에 누구의 탓을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싫으면 관두면 될 것을, 사와무라는 멍청할 정도로 착실한 남자였고 제게 주어진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첫대면부터 몇시간이랄 것도 없는 단시간에 그런 사와무라를 파악한 쿠로오는 제 입맛대로 굴었다. 그런 쿠로오의 태도에 사와무라는 화도 내고 참지 못해 주먹을 날리기도 했지만 오늘 같은 반응은 처음이었다. 조용하게 등으로 분노를 표현하고 있는 사와무라가 평소와 달라서 쿠로오는 재밌기까지 했다.
“사상자가 몇이나 되는 줄 알아?”
“그렇다고 해서 내가 출동한 것 자체를 탓할 생각은 아니겠지.”
“참 뻔뻔하네.”
“너도 알다시피 상부의 명령을 따르는게 내 일 아니었던가.”
“그래도.”
“그리고 그런 나를 컨트롤 하는 것이 니 일이고.”
쿠로오의 말에 사와무라의 입이 꾹 다물린다. 누가 들어도 그저 괴롭히기 위한 말임에도 불구하고 사와무라는 쿠로오의 마지막 말에 침묵했다. 쿠로오는 끼고 있던 팔짱을 풀고 가만히 제 손을 들어올려 바라보았다. 이 손을 한번 휘두를 때 마다 굉음과 함께 휴지조각처럼 건물이 무너져내렸다. 매캐한 연기와 치솟아 오르는 열기, 사방에서 메아리치던 비명소리. 좋을대로 날뛰던 저를 잡아 챈 것은 땀범벅이 된 사와무라의 손이었다. 믿을 수 없다는 눈동자가 제 앞에서 흔들렸다. 그 다음엔 분노에 찬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와무라의 눈동자는 여전히 이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볼썽사납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 사와무라의 얼굴에 쿠로오는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왜, 그런거야?”
사와무라의 까슬한 목소리는 작게 떨렸다.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울지는 않을 것이다 사와무라는. 다만 조금은 힘이 빠진 목소리와 조금 작게 말린 어깨는 잘게 떨고 있었다.
“그냥 그런거야, 그 어떤 센티넬들에게도 다 있을 수 있는 폭주. 너도 잘 알잖아?”
“웃기지마, 넌.”
“니가 나를 얼마나 대단한 센티넬이라고 여기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어쩔 수 없는 보통 센티넬일 뿐인걸. 힘을 쓰기도 하고 가끔은 폭주하기도 해.”
“어제 넌 폭주한게 아니잖아!!”
까슬한 목소리가 소리쳤다. 가벼운 목소리로 손바닥을 들어올리며 어쩔 수 없었단 제스쳐를 취하던 쿠로오는 그 자세 그대로 느슨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사와무라는 조금 고개를 숙인 채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제 팔뚝을 거머쥐던 손바닥이 사와무라의 어깨 너머로 보이자 입안에 침이 고였다.
“왜 그런거야, 목적이 뭐야.”
“목적이라니 무슨 소리세요.”
“목적 없이 그렇게 민간인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너는 무사할 줄 알았어? 중징계를 받을 거라고.”
사뿐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흥분해 조금 거칠어진 호흡을 달래는 사와무라의 귀에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을 터였다. 느슨하게 걸어 사와무라의 뒤에 선 쿠로오가 천천히 침대 위로 체중을 실었다. 침대 끝에 걸터 앉아있는 사와무라의 지저분한 등으로 손을 뻗어 손끝으로 살짝 훑자 움찔 몸이 떨린다.
“내가 얼마나 유능한 센티넬인지 알잖아 사와무라.”
센터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게시판에는 항상 상위권에 쿠로오의 이름이 랭킹되어 있었다. 임시 가이드로 배정 받기 전에도 쿠로오 테츠로의 이름은 이미 알고 있었다. 만날 일이 없던 두 사람이었지만 꽤나 상위권에 랭킹 되어있던 가이드인 사와무라가 배치 받은 것은 어색하지 않은 일이었다. 마음에 안드는 상대였지만 쿠로오는 유능했고 그 능력만큼은 사와무라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어제의 행동이 터무니 없었다는 거다. 느긋하면서도 진득하게 들러붙은 손가락이 사와무라의 등을 훑었다. 어느 새 가까이 다가온 쿠로오는 침대시트를 짚으며 혀를 내어 사와무라의 등을 핥았다. 고양이처럼 유연하게 흐르는 동작이었다. 젖은 소리가 질척하게 귓가를 간지럽혔다. 간밤에 이뤄진 폭력적인 정사가 떠올라 사와무라의 몸이 긴장해 움츠러들었다.
“폭주한 센티넬을 진정시켜주는게 가이드의 일이잖아.”
“...하지마..”
“넌 어제 네 일을 잘 해낸 거라고? 상부에서도 널 칭찬할거야.”
기뻐해야지 사와무라? 등 뒤에 닿은 입술의 달싹임에 발끝까지 찌릿했다. 등줄기를 보기좋게 희롱하며 쿠로오는 사와무라의 몸을 가리고 있는 시트를 걷어냈다. 미끄러지듯 사와무라의 몸에서 시트가 흘러내리고 엉망진창이 된 허벅지가 드러나 떨리고 있었다. 손가락을 엉덩이 뒤로 가져다 대 슬그머니 밀어넣자 진득거리는 입구가 단단히 아물려 쿠로오의 손길을 거부하고 있었다. 만족한 듯 쿠로오는 등에 입술을 묻은 채 미소지었다.
“내가 너무 유능해서 니가 실력을 보여줄 기회가 있었어야지. 이렇게 실력있는 가이드인데 말이야.”
“그만.”
“시험기간인데도 이렇게 니 실력을 잘 보여줬잖아? 사와무라, 상부에서 포상이라도 받으려나.”
키득키득 낮게 웃으며 쿠로오는 사와무라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싫, 형태를 이루지 못한 소리가 사와무라의 입술새로 튀어나왔다. 시트 위로 당겨 눕힌 사와무라 위에 올라탄 쿠로오가 느긋하게 혀를 내어 아랫입술을 핥았다. 헐렁한 고무줄 바지에 손가락을 걸어 벗어내리며 쿠로오는 섬뜩할 정도로 탐욕스런 눈으로 제 아래 누운 사와무라를 훑었다. 어제 밤 내내 시달린 가슴팍은 물어 뜯긴 자국들로 시커멓게 피멍이 들어 얼룩져 있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니까, 이따 센터로 가면 사와무라는 이제 정식 가이드가 될거야.”
“싫, 어.”
“유능한 쿠로오씨를 컨트롤 해줄 수 있는 인재, 이제까지 찾기 힘들었다구?”
느긋하게 웃으며 쿠로오는 바짝 선 제 것을 쥐고 사와무라의 허벅지 안쪽에 문질렀다. 불긋하게 멍든 살갗 위로 뜨거운 성기가 비벼졌다. 손으로 제 눈을 가린 사와무라는 바르작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의미 없는 저항이 귀여워보여 쿠로오는 작게 웃었다. 뜨거운 살덩이가 사와무라를 파고들었다. 아랫 입술을 깨물며 사와무라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들려 애썼다.
숨이 턱 막힐만큼 뜨거운 여름의 열기와 몇번이고 반복된 패널티에 눈 앞이 어질했다. 힘주어 땅을 딛은 발을 박차며 패널티의 마지막을 마무리 했다. 역시나 다들 지친 기색이었지만 얼굴엔 분함과 다음 시합에서의 리벤지를 위한 의욕이 넘쳐났다. 자, 다들 몸 식기 전에 다음 연습시합 준비하자. 나의 말에 부원들은 우렁차게 대답하며 제각각 방금 시합에서 부족했던 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턱 아래로 맺혀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으며 체육관 쪽으로 다가가자 승자의 여유만만한 얼굴의 쿠로오가 수고했어- 하고 손을 들어 인사한다.
“다음 시합엔 이겨야지?”
“응 그럴거야.”
땀 범벅이 된 얼굴을 손바닥으로 대충 훔쳐 닦으며 두리번 거렸다. 분명 이 쯤에 수건을 던져뒀는데. 두리번 거리다가 내 것으로 추측되는 수건을 주으려 허리를 굽히자 뒤에서 기분 나쁜 감촉이 내 엉덩이를 쥐었다 떨어진다.
“악!!!”
채 닦지 못한 땀이 튀어오른 몸의 반동에 후두둑 떨어졌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표정의 얼굴이 되어 돌아본 곳엔 장난스러운 얼굴의 쿠로오가 히히 웃으며 쫙 펼친 손바닥을 내보인다
“뭐하는거야!”
“사와무라의 엉덩이가 만져달라는 듯 있어서 나도 모르게 그만.”
“변태 아저씨냐고.”
투덜거리며 아직도 촉감이 남아있는 엉덩이를 손으로 팡팡 털어내자 쿠로오는 앞에 내밀었던 손으로 불순한 움직임을 해보였다. 왁, 변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튀어나온 내 말에 쿠로오는 데헷☆ 만화에나 나올법한 웃음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인다.
“쫀쫀하고 탱글한게... 한 10점?”
“성추행도 모자라서 품평이냐?”
“그래도 10점이잖아.”
“낮은거 보단 낫지만 그래도.”
“아 물론 100점 만점에.”
낄낄 웃는 쿠로오의 배에 꽉 말아쥐고 있던 주먹을 푹 꽂아넣자 길죽한 몸이 휘청하고 접힌다. 이런 씨.. 곧 욕지기를 내뱉을 듯 달짝이는 나의 얼굴을 본 쿠로오가 낄낄 웃으며 아픈 배를 감싸쥐고 웃는다.
“낮은거 보단 낫지만이라니 사와무라 은근 기쁜거 아니야?”
“이런 저질 장난 좀 그만 했으면 하는데.”
“그러게 누가 그렇게 탱글한 엉덩이 타고나래?”
뭐래 이 개똥논리는. 우그러진 내 얼굴에도 쿠로오는 킬킬 웃으며 장난스럽게 내 어깨를 두드린다. 아까부터 이어지는 엉덩이니 뭐니 하는 조금 낯뜨거운 단어에 드링크를 마시며 땀을 닦던 부원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몰린게 느껴졌다. 뭔가 민망해져 쿠로오를 흘겨보자 본인은 아무 잘못이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 하며 뻔뻔한 얼굴을 한다. 어유 저 여유로운 낯짝이란. 장난에 진심으로 화내는 것도 뭔가 좀 아니다 싶어 낮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뺨을 타고 도르륵 땀이 흘러 내린다. 아, 수건이랑 드링크 하고 문득 정신을 차린 순간 눈 앞이 아득하니 휘청였다. 후끈한 열기가 뺨을 덮치고 눈 앞이 울렁였다. 아찔한 경사의 언덕을 혼신의 힘을 향해 달음박칠 치고 온 이후였으니 고스란히 몸에 남은 여름의 열기가 잔뜩 피곤한 몸을 어지럽혔다. 어지러움에 휘청이는 몸을 큰 손으로 단박에 잡아채 세우는 손길이 느껴졌다. 어질한 열기에 머리가 멍멍한데 이마에 차가운 손이 닿는다.
“사와무라, 괜찮아?”
좀 전까지 장난스럽던 목소리가 사뭇 진지했다. 차가운 손이 기분 좋아 눈을 천천히 내리 감았다.
“니가 변태같은 장난을 자꾸 해대니까 머리에 열이 올라서 이러는거 아니야 내가.”
“미안미안, 드링크 좀 마셔.”
감은 시야 사이로 걱정스러운 부원들의 목소리와 여기, 하고 드링크를 내미는 시미즈의 목소리 같은 것들이 들려왔다. 손에 쥐여주는 드링크를 받아들고 목으로 넘기자 꺼끌하던 입안이 젖었다. 울렁이는 속이 좀 가라 앉는 기분이 들었다. 땀범벅인 얼굴을 수건으로 닦아주는 조심스러운 손길에 슬며시 눈을 떴다. 제법 진중한 얼굴로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쿠로오와 눈이 제대로 마주쳤다. 아 조금 민망. 하고 스치는 생각에 금세 시선을 돌렸다. 시선이 아래로 향하자 주변에 모인 부원들의 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다이치, 괜찮아?”
“응응, 잠시 어지러웠던거 뿐이야. 조금 쉬면 괜찮을거야.”
걱정하는 스가의 목소리에 웃으며 대답했다. 아직까지 조금 목이 턱 막히는 답답함이 남아 있었지만 그렇다고 안 좋은 소리를 하고 있을 수 없어서 마냥 웃었다. 앞에 선 쿠로오는 힐끔 체육관 안의 상황을 잠시 살핀다.
“나 때문에 그런 것도 있으니까, 의무실까지 데려다 줄게. 조금 쉬어.”
“아냐 괜찮아.”
“우리도 지금 딱 쉬는 시간이라 괜찮으니까.”
“다이치, 괜히 고집부리지 말고 더 안좋아 지기 전에 얼른 쉬고와. 어제 너 잠도 얼마 못 잤잖아.”
스가의 말에 쿠로오가 덥썩 내 어깨를 쥔다. 놀라 고개를 번쩍 드니 쿠로오가 씩 웃으며 어깨를 잡아 돌려 세운다.
“자자, 사와무라군 엄마 말 잘 들어야지?”
“누가 엄마야.”
스가의 말에 쿠로오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하곤 내 어깨에 팔을 걸치곤 내 몸을 억지로 끌고 어딘가로 향한다. 어, 어? 하고 허둥대는 나를 도와주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반쯤 포기한 상태로 쿠로오의 팔에 이끌려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합숙 힘들어?”
“솔직히 안 힘들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래도 우리한테 이만큼 귀중한 찬스는 없으니 배울 수 있는 건 다 배우고 가야지.”
“그렇다고 무리는 안되지 주장님.”
방학 중이라 텅빈 교사는 걸을 때 마다 운동화가 마찰하는 소리가 가볍게 울렸다. 열려 있는 의무실을 열고 들어간 쿠로오가 나를 의무실 침대에 앉히곤 의무실 책상에 놓인 일지를 가볍게 기록한다. 가볍게 종이가 팔랑이는 소리와 볼펜을 딸깍이는 소리 같은 것들이 가만히 귀를 간질였다. 침대에 걸터 앉은 채 그런 행동들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장난스럽던 얼굴이 조금 차분하게 일지를 훑으며 틀린 곳은 없는지 한 번 더 체크를 하곤 일지를 덮어 제자리에 둔다. 그리고 팔을 들어 기지개를 편 쿠로오가 터덜터덜 걸어와 내 맞은편의 침대 위에 걸터 앉는다.
“좀 쉬었다가 가자.”
“응.”
내 말에 쿠로오가 뭔가 미묘한 얼굴로 푸흡 웃는다. 의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바라보니 뭔가 또 미묘하게 짓궂어진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아, 꼭 저런 표정일 때 하는 말이라곤 대부분 쓸모 없는 장난이었고,
“방금 멘트 되게, 러브 호텔 들어가자고 꼬시는 대사 같지 않았어?”
역시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뜨악 하고 경악한 얼굴의 나를 보며 쿠로오는 만족했다는 듯 웃는다. 뭐 한참 장난 많이 칠 남고생이니까 이해는 되었지만 그 장난을 왜 나에게 치는지는 아직 이해할 수 없었다.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나는 이런 장난을 잘 치는 부류에 들어가는 사람도 아니었고 솔직히 말하면 조금 재미 없을 부류였다. 단순히 놀리는게 재밌는 거라면 그럭저럭 호응을 해줄 순 있지만 말이다. 쿠로오의 짓궂은 장난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었고 여름 합숙 내내 이어지고 있었다. 대부분은 무시하거나 적당히 대응해 주긴 하지만 얘는 이런 장난이 재밌나? 하고 생각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하긴 재밌으니까 하는 거겠지.
“........”
그러니까 이거도 장난, 인거지?
어깨를 짚은 손이 조심스럽게 어깨를 쥐어왔다. 뜨거운 숨이 닿은 입술이 차근히 아랫입술을 머금었다. 작게 내밀어진 혀가 가만히 다물린 입술을 장난스럽게 간질였다. 어깨를 짚지 않은 손이 차근히 내 턱 아래를 받쳤다. 츄웁ㅡ 젖은 소리가 조용하게 귓가를 울렸다. 장난치곤 제법 질 낮은 장난이었다. 언제나처럼 뭐야, 하고 밀어내면 그만일. 하지만 제법 단단하게 붙들린 턱은 쿠로오가 이끄는 대로 고정되어 있었고 언제나처럼 깜짝 놀라게 하는 쿠로오의 장난에 굳은 몸은 움직일 줄을 몰랐다. 말캉하고 조금 겉이 까슬한 입술이 조용히 떨어졌다. 나는 그 장난에 눈도 채 감지 못한 채였다. 조용히 떨어진 쿠로오는 나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장난으로 웃어버릴 얼굴은 조용히, 아주 차분히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