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다이 전력 60분
쿠로오 테츠로 X 사와무라 다이치
아마도 다음 정류장, 이었지? 버스의 정차 안내방송을 집중해서 들으며 몇 번이나 봐서 외울 것 같은 버스 노선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서 또 한참이나 걸어야 나오는 카라스노 고등학교라는 최종 목적지를 몇 번이나 머릿속에 되새기며 긴장해 바싹 마른 입술을 적셨다. 버스가 방지턱을 넘느라 덜컹일 때 마다 품에 안은 꽃다발이 부스럭거리는 비닐 소리를 냈다.
한참을 걸어 겨우 도착한 학교 주변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강당에서 졸업식을 진행하느라 텅 빈 교정을 둘러보던 쿠로오는 졸업식 종료까지 대략 1시간 정도 남은 걸 확인하고는 긴장해 잔뜩 접고 있던 어깨를 느슨하게 풀어냈다. 봄기운이 밀려들어 차가운 공기 속에 뒤섞인 꽃 냄새가 옅었다. 도쿄는 슬슬 벚꽃이 피기 시작하는 계절이지만 조금 더 추운 미야기는 꽃봉오리들이 한 움큼 정도 덜 여문 느낌이었다. 한 아름 안은 꽃다발에 묶인 카드 겉에 쓰인 사와무라 다이치라는 이름을 다시 한 번 읽어보고 괜히 제가 더 설레었다.
사와무라와 만난 것은 작년 여름의 이야기로, 여름 방학 때 미야기에 있는 친척 어른 집에 놀러 갔다가 권유 받은 입시 과외가 계기가 되었다. 나쁘지 않은 성적으로 도쿄에 있는 대학에 진학한 쿠로오에 대한 자랑을 평소부터 들어왔던 사와무라의 부모님이 적극적으로 추진한 결과이기도 했다. 우리 다이치가, 수학이 좀 약해서요. 어머님의 짓궂은 말에 아무렇지 않은 척 굴면서 귀 끝이 빨갛게 물들어 있던 것이 사와무라에 대한 첫 인상이었다.
졸업식이 끝날 때 까지 시간이 꽤 남아 그 동안 교정을 조금 둘러보기로 했다. 사와무라에게 가끔 건네 들은 이야기로 그려본 학교의 모습과는 다른 듯도, 비슷한 듯도 했다. 체육관이라는 팻말을 보며 아, 여기서 배구를 했겠거니. 운동장을 보며 아, 여기를 통해 등교를 했겠거니. 하고 생각할 뿐이다. 자신은 졸업한지 고작 1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고등학교 교정을 밟고 있으니 기분이 괜히 이상했다. 들어오면 안 될 곳에 들어온 것 같기도 하고. 바스락, 발 아래로 모래가 밟히는 소리가 제법 크게 들렸다. 천천히 걸어 교정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간혹 카라스노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을 뿐, 그 외에는 꽤나 조용한 교정이었다. 한 바퀴를 느긋하게 걸어 다시 정문 근처로 왔을 땐 제법 사람들이 모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졸업식이 끝나기라도 한지 아까보다는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더 많이 보였다. 핸드폰을 들어 천천히 메시지를 작성했다.
[체육관 옆에 있는 큰 나무 밑에 있어.]
온다는 말도 확실하게 하지 않았는데 이런 메시지를 다짜고짜 받으면 엄청나게 놀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쿠로오는 쏟아지는 학생들의 무리에서 도저히 사와무라를 찾을 자신이 없었다. 시끄러운 운동장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쿠로오는 어색하게 발을 바닥에 비비며 봉오리가 피어오르기 시작한 나무를 바라보기만 했다. 괜히 어색해서 심장이 간질거린다.
“선생님!”
잔잔하게 들리던 소리의 틈바구니로 제법 또렷한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돌아보니 기웃거리던 사와무라가 활짝 웃으며 쿠로오에게 뛰어온다.
“장난인 줄 알았는데, 진짜 오셨네요?”
짙은 초록색의 목도리를 두르고 졸업장을 품에 안은 사와무라가 활짝 웃는다. 그러고 보니 교복 입은 모습은 처음 보는 거지 참. 쿠로오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까부터 봤던 흔하디흔한 검은 가쿠란일 뿐인데 사와무라는 특별하게 보였다. 쿠로오는 흠, 흠, 목을 가다듬고 아까부터 안고 있던 꽃다발을 내밀었다.
“졸업 축하한다.”
“간지럽게 꽃다발이 뭐에요!”
놀리는 듯 말하면서도 기쁜지 사와무라의 얼굴에서 웃음이 지워지질 않는다. 하긴 남자에게 남자가 꽃다발을 주는 게 머쓱하고 낯간지러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졸업식인데 꽃다발 하나는 있어야지.”
“아 진짜, 민망해.”
그런 말을 하면서도 사와무라는 킁킁, 꽃다발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는다. 잘 몰라서 그냥 제일 예쁘고 흔하디흔한 장미꽃다발을 골랐는데 나쁜 선택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친구들은?”
“아, 잠깐 만날 사람 있다고 하고 빠져 나왔어요. 애들은 지금 사진 찍고 난리 났어요.”
“너도 사진 찍어야지.”
“에이, 괜찮아요.”
헤헤, 웃는 얼굴에 장난스러운 웃음이 듬뿍 묻어나왔다. 이 웃음을 보려고 이 먼 곳까지 고생하며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다. 여름 방학 내내 과외를 하고, 겨울 방학에 짧은 기간 과외를 하며 잠깐 수험 준비를 도와준 이후로 오랜만에 보는 얼굴에 기분이 뭉글뭉글 풀어진다. 밤톨 같은 머리카락이 조금 길어 귓바퀴를 살짝 덮었다. 너도 이제 성인이 될 준비를 하는 걸까.
“남는 건 사진 밖에 없는데, 사진 찍어야지. 부모님은?”
“아, 조금 늦으실 거 같대요. 그 때 사진 찍죠 뭐.”
“친구들이랑도 찍어야지, 내가 사진사 해줄게. 나 사진 잘 찍어.”
“에이, 거짓말.”
눈을 샐쭉하게 뜨고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는 사와무라의 이마에 아프지 않게 딱밤을 콕, 놓아주자 금세 눈을 둥글게 휘며 웃는다. 학교를 졸업하는 아쉬움 보다 후련함이 가득한 얼굴은 기분 좋게 불어오는 바람에 반쯤 눈을 내려 감는다. 콩닥, 콩닥. 설렘이 와글와글 피어오르는 분위기에 동화된 건지 쿠로오의 심장이 주책맞게 뛰어댄다.
“얼른 가자.”
“선생님.”
반쯤 몸을 돌리는 쿠로오를 불러 세운 사와무라가 엷게 뜨고 있던 눈을 또렷하게 떠 쿠로오를 바라본다. 그 조약돌 같이 단단한 시선과 마주하자 고개를 차마 돌릴 수 없었다. 큰 눈동자를 동그랗게 머금고 있는 유순해 보이는 눈매와 잘 빚은 이마를 차근히 바라보았다. 응, 하고 겨우 꺼내는 쿠로오의 대답에 사와무라는 긴장한 듯 흠, 하고 목을 한 번 가다듬는다.
“졸업선물이요.”
“응?”
“졸업선물이요.”
예상하지 못한 말에 잠시 머쓱하게 뒷덜미를 긁적였다. 그러게, 선물. 선물 뭘 해야 할지 고르지 못해서 아직 아무것도 사지 못했어. 고작 졸업선물일 뿐인데 아무것도 못 고르겠더라고. 입 밖으로 내뱉으면 변명이 될 뿐일 말이었다. 쿠로오는 머쓱하게 허허 웃었다.
“뭐 갖고 싶은 거 있어?”
“준비 안 하셨죠?”
“그래 이 녀석아.”
장난스럽게 받아쳤지만 역시 서운했던 건가 싶어 괜히 미안해졌다. 이따 맛있는 거 사줄게, 하고 변명처럼 말을 꺼내는데 사와무라가 쿠로오의 앞으로 척척 걸어온다. 허공에 덜렁거리고 있는 손을 끌어당긴 사와무라가 꽃다발을 불편하게 팔로 안아들곤 주먹 쥔 손에 쥐고 있던 걸 쿠로오의 손에 쥐여준다. 아까부터 쥐고 있던 건지 미지근하게 체온이 옮은 작고 단단한 것이 손에 잡혔다. 의아한 얼굴로 사와무라를 바라보지만 사와무라는 제 입으로 대답해 줄 의지가 없다는 듯 단단하게 입을 다물고 제 앞에 선 쿠로오를 마주할 뿐이었다. 의아한 얼굴의 쿠로오에게 대답해 줄 의지는 없는지 쿠로오의 손에 다만 조그마한 것을 쥐여주고는 펴보지도 못하게 양 손으로 꽉 붙들고 있다.
“이거 받으세요.”
“…응?”
“졸업선물, 로. 이거 받아주세요.”
졸업선물을 받을 대상자가 본인에게 졸업선물을 받아달라는 말이 의아해 잠시 머릿속이 물음표로 뒤범벅이 된다. 이거 주세요, 도 아닌 이거 받으세요, 는 조금 이상했으니까. 쿠로오의 얼굴에 떠오른 의아함을 애써 무시하며 사와무라는 단단하게 쿠로오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제야 쿠로오의 시야에 사와무라의 텅 빈 가슴팍이 들어왔다. 사와무라의 시선에 단단히 매여 미처 내려다보지 못한 가슴팍 한 곳에 당연히 있어야 할 단추 하나가 비어있었다.
“사와무라.”
“대답은 안 해주셔도 되니까, 받아주세요.”
눈 밑이 살짝 붉어진다. 지금 사와무라는 어떤 마음일지 쿠로오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맹랑하게 웃던 사와무라는 단단한 얼굴로 쿠로오에게 제 마음을 건넨다. 바보가 아닌 이상 누구나 다 알 수 있을법한 의미를.
“저는 이제 학생이 아니니까, 선생님이랑 같은 어른이고, 대학생이 될 거니까. 이 정도는 괜찮죠?”
“너…….”
“예전부터 말하고 싶었어요. 근데 제가 아직 미성년자라서 어리다고 거절당할 거 같아서 해가 바뀔 때 까지 기다렸어요. 그랬더니 입시에나 신경 쓰라고 거절당할 거 같아서 학교 합격 발표가 날 때 까지 기다렸어요. 그러고 나니까 제가 고등학생인 게 마음에 걸리더라구요.”
“…….”
“그래서 오늘이 될 때 까지 기다렸어요. 이제 저 고등학생도 아니니까요.”
“…….”
“그러니까 말하는 거 정도는 이해해주세요.”
이젠 귀까지 시뻘개진 사와무라는 땀으로 흠뻑 젖은 손바닥으로 움켜쥐고 있던 쿠로오의 손을 슬그머니 놓는다. 쿠로오는 천천히 손바닥을 펼쳐 졸업선물로 안겨진 조그만 마음을 내려다보았다. 온기를 아직 머금고 있는 조그만 금속재질의 단추를 내려다보았다. 이런 걸 믿고 있다니 진짜 고등학생답다 싶어 갑자기 슬그머니 웃음이 튀어나왔다.
“나는 블레이져였는데.”
“…그랬어요?”
“응, 그래서 나는 대답으로 뭘 줘야 할지 모르겠네.”
쿠로오는 제 앞에 단단하게 선 사와무라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쿵쾅거리며 뛰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는지 사와무라는 어느새 눈 밑에 엷게 눈물이 고여 있었다. 제 제자였던 녀석의 마음이 맹랑하기도 하고 귀엽게도 해, 쿠로오는 빈 팔에 사와무라를 담았다. 으악, 귀엽지 못한 소리를 낸 사와무라가 합, 하고 입술을 다문다. 끌어안은 팔을 살짝 풀어 낸 쿠로오가 사와무라의 입술에 천천히 입을 맞춘다. 따뜻하게 닿은 입술에 사와무라가 힉, 하고 놀라 움찔 몸을 떤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닿기만 했던 입술이 차분하게 떨어진다. 이제 쿡, 찌르면 펑 터져버릴 것 같은 사와무라의 얼굴을 보며 쿠로오가 장난스럽게 웃는다.
“입술 도장 정도면 대답이 되겠어?”
“선생님….”
“나 이제 니 선생님 아닌데. 이제 우리 관계도 변할 텐데 다른 호칭으로 불러야 하지 않을까?”
“으아악, 선생님!!”
쿠로오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안색이 바뀌던 사와무라가 와락 쿠로오의 품에 뛰어든다. 파사삭, 꽃다발이 뭉개지는 소리가 요란했지만 사와무라는 영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동그란 머리통을 쓰다듬던 쿠로오가 피식 웃는다.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요 맹랑한 학생이 날린 선빵에 정신이 어질했던 터였다. 학생이 먼저 선수치게 만들다니 선생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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