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그락, 테두리가 세련되게 세공 된 컵받침에 짝을 이루어 세공한 잔이 놓이며 무기질의 소리를 내었다. 그 소리에 퍼뜩 놀라 손에 쥔 컵 속에 처박혀 있던 시선을 들어올렸다.
“뭐?”
“헤어지자구.”
“……왜?”
“나 결혼해.”
“…….”
“진부한 이유지?”
그러게. 너무나도 진부한 이유라 마치 제가 영화나 드라마 속에 앉아 있는 등장인물 같이 느껴졌다. 현실이 먹먹하게 멀어진다. 손톱을 단정하게 잘 다듬은 손가락이 잔의 손잡이를 쥐었다. 일렁이는 커피의 표면에서는 아주 희미하게 김이 피어올랐다. 쿠로오는 그것마저도 현실 같지 않았다.
“원해서 하는 결혼은 아니지만 하지 않을 수도 없는 결혼이니까.”
“다이치.”
“…너도 언젠가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예상 했을 테지만.”
그래. 예상 했지. 그런데 그게 이렇게 빨리 닥치리라고는…, 아니, 가만 생각해보면 결코 빠른 건 아니었다. 두 사람의 나이를 생각해본다면 제가 모르는 사이에 사와무라 또한 최선을 다해 오늘을 미뤄왔으리라. 다만 제가 사와무라와 함께 하는 시간에 취해 그저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었던 거다. 정계에서 내로라하는 사와무라 가문의 장남인 사와무라 다이치의 혼약처가 어디로 정해질지에 대해서 다루는 추측이 난무한 가십지는 잊을만하면 한 번씩 잡지 가판대에 깔리곤 했었다. 그 꼴이 보기 싫어 서점에 발을 들이지 않은 것도 벌써 일년이 다 되어가는 이야기였다.
“다이치.”
목구멍이 먹먹하게 막혀 뭐라도 내뱉어야 할 것 같아 부른 이름은 끝이 조금 갈라진 소리였다. 맞은편에서 사와무라는 반듯한 자세로 앉아 쿠로오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올곧은 시선에 어딘가 어지러운 시선이 사납게 얽힌다.
두 사람이 만난 것은 대학교 교양수업이었다. 과가 달랐지만 나이가 같아 금세 친해지고 함께 과제도 하며 서로의 자취방을 들락거리게 되고, 그리고 봄바람 탓인지 청춘의 혈기 탓인지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되었다. 사와무라라는 성을 어디서 들어본 거 같다 싶었지만 희귀한 성이 아니니 그러려니 하고 가볍게 넘긴 탓이었을까. 아니면 사와무라가 제 몫이 아닌 평범한 대학생활을 즐기고 싶어 했던 소박한 욕심 탓이었을까. 어찌하여 우리는 이렇게 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를 일이었다.
사와무라는 반듯한 자세로 앉아 올곧은 자세로 쿠로오를 바라본다. 그 어떤 영화에서 들어본 것 같은 멜로디가 익숙한 노래가 카페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왔고, 카페에 사람들이 들어올 때 마다 습기와 비 냄새를 머금은 바깥 공기가 밀려들었다. 두 사람이 만남의 장소로 종종 찾았던 이 카페를 자신은 이제 두 번 다시 찾을 일이 없을 것이다. 제 눈앞의 혼란스러운 쿠로오의 얼굴 또한 제가 두 번 다시 먼저 찾을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을 한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아 사와무라는 반듯한 자세로 앉아 제 앞의 쿠로오를 올곧게 바라보았다.
눅진한 공기에 미적지근해진 커피에서는 더 이상 김이 피어오르지 않았다. 사와무라는 느슨해진 커피 향을 마시며 천천히 두 사람의 추억을 되새겼다. 다른 사람들처럼 그냥 평범하게 연애도 하고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노력 하고 회사에 취직해 평범하게 돈을 버는 샐러리맨이 되고 싶었다. 제 앞에 있는 쿠로오처럼 그렇게 살고 싶었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삶이라 할지라도 쿠로오와 함께라면 즐거울 것 같았다. 어차피 그렇게 살 수 없음을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으면서도.
“더 할 말이 없다면 이만 일어날게.”
“그래…….”
“미안해. 진심으로.”
사와무라의 사과에 쿠로오의 표정이 복잡하게 일그러진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그 표정에 목이 메었지만 어금니를 꾹 물고 부러 침을 크게 삼켰다. 의자 팔걸이에 걸어두었던 우산을 챙겨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코로 크게 숨을 들이 마시고 내뱉으며 심호흡을 했다. 습한 공기에 방향제 냄새가 섞여 콧속을 찔렀다.
“약속은 못 지키게 되었네.”
“…….”
“이럴 줄 알았으면 그런 약속 따윈 하지 말 걸…….”
담담하게 말하던 사와무라의 말끝이 천천히 흐려졌다.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겨우 내뱉은 말은 이제 와서 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는 후회일 뿐이었다. 미련 가득한 사와무라의 등은 꼿꼿하게 서서 천천히 걸어 쿠로오의 시야에서 멀어진다. 딸랑, 카페 문이 열리는 작은 종소리와 점원의 배웅인사가 날카롭게 쿠로오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여기는 침실이고. 여기는 거실, 여기에 티비를 놓을 거야.’
‘아니지 여기엔 책장을 놓아야지. 거실 창문이 이렇게 나 있으면 이렇게 멋진 채광을 낭비하면 안 되지.’
‘거실 소파에서 뒹굴 거리면서 티비 보는 게 얼마나 재밌는데.’
‘너 진짜 센스 없다.’
‘너랑 만나는 거 보면 센스가 아주 넘치는 거 같은데.’
‘말이나 못하면.’
실랑이를 하던 두 사람의 목소리는 금세 입술이 닿는 소리에 묻혔다. 킬킬 웃으며 금세 바닥을 구르는 두 사람의 곁에는 교양 과제로 그리던 건축 도면이 놓여 있었다. 서로 다른 필기구로 그려진 그림과 휘갈긴 필체가 엉망으로 뒤엉켜 미래의 두 사람을 그리고 있었다.
왜 갑자기 이런 내용을 쓴걸까요
약속이라고 하면 어린 쿨다가 짧고 통통한 새끼손가락 걸며 나중에 결혼하자 이런 귀여운 이야기를 쓰면 좋겠다 싶었는데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