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다이 전력 60분
쿠로오 테츠로 X 사와무라 다이치
몇번이고 문자를 썼다가 지웠다가 낯익은 이름을 눌렀다가 지웠다가, 별 소득 없는 일을 한참동안 반복했다. 밑져야 본전이라면 이렇게 망설일 것도 없었으나 지금부터 하려는 일은 잘 해도 본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망설였으나 그래도 하지 않을 수는 없어서 결국 후우우, 깊은 숨을 내쉬었다가 단단하게 정신을 차려 눈 앞에 있는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섰다.
“어서오세, 어라? 사와무라?”
“안녕.”
대외용 얼굴로 생글거리며 웃던 쿠로오가 내 얼굴을 보자마자 반가운 표정을 짓는다. 으, 제발 좀 참아주라. 콩닥콩닥거리는 심장을 부여쥐고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손님이 없는 타이밍을 노려 들어온 덕분에 편의점 안에는 나와 쿠로오 외에는 사람이 없었다.
“뭐사러 왔어? 아, 나 보러 온거야?”
“무슨 소리야. 맥, 맥주 사러 왔어.”
악, 나 말 더듬었어! 들켰나? 후다닥 주류 냉장고 쪽으로 달려가서 괜히 맥주를 고르는 척을 했다. 시즌 한정으로 눈꽃과 산타모자가 잔뜩 그려진 맥주캔을 아무거나 집어들고는 카운터로 갔다. 능숙하게 바코드를 찍은 쿠로오가 편의점 봉지를 펼치며 맥주를 주워담는다.
“지난번엔 이거 말고 딴거 마시더니 그새 취향 바뀌었나보네?”
“하하, 그렇지 뭐.”
아냐, 그 때도 지금도 그냥 손 가는대로 집은 거야! 근데 내가 사간 걸 왜 기억하고 있는거지? 헉, 이거 그린라이트? 심장이 널을 뛰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다. 얼버무리는 내 말에 쿠로오는 그냥 가볍게 웃으며 포스화면에 나타난 성인확인 버튼을 툭, 터치한다.
“손님, 470엔 되겠습니다.”
“여기요.”
“500엔 받았습니다.”
능숙하게 계산을 하고 거스름돈까지 내어준 쿠로오가 봉지 손잡이를 가지런히 모아 내민다. 아, 괜히 어색하게 발끝으로 바닥만 비비적거렸다. 아, 진짜 밑져야 본전이기만 해도 좋으련만. 후우, 긴장해 호흡을 어색하게 고른다.
“오늘 알바 몇시에 끝나?”
“응? 곧 끝나긴 하는데...”
“끝나고 일 있어?”
“응?”
“끝나고 잠깐 볼래? 할, 할말이 있어서.”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서 갈비뼈가 아픈 것 같다던지 호흡이 모자라서 머리가 어지러운 것 같다던지 그런 감각들은 이미 아득하게 도망간지 오래였다. 오직 모든 감각 기관들이 쿠로오의 대답을 기다리느라 바짝 날이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따 알바가 끝난 쿠로오를 붙들고 나는 말해버릴 셈이었다. 나는 너는 오래전부터 좋아하고 있었노라고, 그러니까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순간부터 나는 너만 바라보는 짝사랑을 3년 동안 하고 있었노라고 그렇게 벼르고 별러왔던 고백을 와다다 쏟아내버릴 참이었다. 그러니까, 잘해봐야 본전인 짝사랑을 오늘로 끝내버릴 계획이었다. 왜 하필 그게 오늘이냐고 물어보면 나도 잘 대답할 순 없었지만, 거리에 넘실거리는 연말의 분위기라든지 몇 시간 뒤면 올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날이라는 분위기가 나를 부추겼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카운터에 선 쿠로오의 뒤로 보이는 벽시계가 10시 30분을 1분 남겨두고 있었다.
“나 오늘 11시에 끝나긴 하는데..”
“그래?”
“응 근데..”
아, 곤란한 얼굴이다. 본능적으로 온 몸의 감각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바라봐온 얼굴이니 조금만 표정이 변해도 어떤 감정인지 잘 알 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시선을 떨어뜨려 카운터에 놓인 봉지를 집어들었다.
“선약 있구나?”
“아, 그게 그러니까.... 할말이 뭔데? 급한거야?”
“응?”
“지금 손님도 없고 하니까.. 지금 하면 안돼?”
응 안돼. 아무리 그렇다고 어떻게 고백을 이렇게 얼렁뚱땅하냐. 수면 위에 뜬 나뭇잎 배를 탄 듯 넘실넘실 거리던 감정이 삽시간에 꼬르륵, 물속으로 가라앉는 기분이다. 단숨에 씁쓸해지는 표정을 얼른 털어내버리고 손에 쥐고 있던 동전을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응, 안할래.”
“아, 저. 사와무라.”
“일 있으면 나중에 따로 보자. 연말 잘 보내고, 이틀 빠르지만 새해 복 많이 받고.”
“아, 저. 이따가 전화할게 내가.”
“알았어.”
손을 흔들려 돌아서는 내 모습에 쿠로오가 다급하게 말을 꺼낸다. 그와 동시에 편의점 문에서 찰랑거리며 손님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내 모습과 손님이 들어오는 문을 번갈아 바라보는 쿠로오가 허둥거리고 있어 나는 빠르게 편의점을 벗어났다. 편의점 문이 닫히기 전에 어서오세요, 하고 손님에게 인사하는 쿠로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긴 약속을 한 것도 아닌데 먼저 다른 사람과의 선약이 있을 수도 있지 내가 너무 섣불리 굴었던거다. 그것도 바쁜 연말에 약속이 당연히 있을거였는데. 그래도 어쩐지 미리 약속을 잡아두면 고백의 말을 내뱉는 순간까지 도저히 떨림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무턱대고 질러버린거다. 그러니까 이렇게 거절당해도 할말은 없는거지. 발걸음을 옮길 때 마다 손목에 걸어둔 편의점 봉지가 덜렁거리며 차가운 맥주캔이 허벅지에 툭, 툭, 닿는다. 연말의 분위기가 묻어있는 거리를 잠시 걸었다. 그닥 번화가가 아닌 동네 골목에도 연말 연시를 축하하는 플래카드가 걸리고 연말 세일이니, 복주머니 이벤트니 하는 전단지가 상점가에 걸려있었다. 불꺼진 어두운 상점가에 한달 전 부터 걸려있던 반짝이는 복주머니 모양의 꼬마전구들이 군데군데 선이 끊겨 얼룩덜룩한 모양새였다. 간혹 차가운 공기를 스치고 지나가는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라든지 어딜 다녀오는지 하하호호 행복한 모습의 연인이 지나간다. 상점가를 지나 조금만 더 걸어가면 내가 살고 있는 맨션이 나왔다.
두어층 올라가서 열쇠로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 턱 밑까지 둘둘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 아무데나 두었다. 겨울의 냄새가 잔뜩 묻은 코트차림으로 바닥에 앉아 침대에 반쯤 몸을 기댔다. 손목에 여전히 걸려있는 편의점 봉지를 대충 풀어내어 그 안에 담긴 맥주를 꺼낸다. 달칵, 시원하고 청량한 소리가 마치 광고에서나 나오는 것 같았다. 맨정신으로는 차마 말하지 못할거 같아서 산 거였는데 이렇게 우울함을 달래려 홀짝거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아, 기운빠져. 따듯한 소재로 바꾼 침대 시트에 뺨을 기대자 포근하고 부드러웠다.
그러니까 왜 고백도 제대로 못할 상대를 좋아하게 되어버려서 이렇게 마음을 졸이고 있는지 모르겠다. 부활동으로 시작한 배구로 쿠로오를 처음 만났다. 첫 만남은 여름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한 골든위크의 연습경기였다. 첫 인상은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좋은 사람인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좋은 사람이어서 손쉽게 좋아하게 되어버렸지만 마음을 드러내는 건 역시 쉽지 않아서 이렇게 답답하게 굴고 있는 거다. 이대로 참고 있다간 나도 모르게 좋아해, 하고 입에서 튀어 나가 버릴 것 같아서 고백하자고 마음 먹은거다.
사온 맥주를 하나하나 마시며 캔을 비웠다. 힐끔, 핸드폰 시계를 바라보자 11시 39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니까 왜 그게 하필 오늘이었냐 하면 21분 뒤 있을 내 생일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생일인데 설마 거절하겠어? 미안해서라도 받아주지 않을까? 하는 안일한 생각탓이기도 했다. 정작 상대는 내 생일인지 기억도 못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괜히 코끝이 찡하게 울리며 눈밑이 뜨끈해진다. 그러니까, 잘해봤자 본전인 고백이라니까. 우울해져서 얼굴을 침대에 묻고 눈을 감았다. 아 이런 기분으로 술까지 마셔버렸더니 최악이다. 얼굴을 시트에 비비적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핸드폰이 울린다. 받을 기분이 아니라 가만히 내버려두었더니 끊겼다가 다시 울린다. 거 참 끈질기네, 하고 핸드폰 화면을 보면 두둥실 떠오른 이름은 쿠로오의 것이었다.
방금 전까지 바닥을 구르고 있던 기분이었는데 어째서 이렇게 바보같이 즐거워져 버리는 걸까. 고작 네 이름일 뿐인데. 아까 전화한다더니 진짜 전화를 한 모양이다. 지금 기분으로 전화를 받으면 분명히 기분이 뒤숭숭해질 걸 알면서도 손은 저절로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 여보세요? 사와무라? 어디야?
“아. 뭐.. 알바는 끝났어?”
- 응. 지금 어디야?
“어딘진 왜 물어봐. 너 약속 있다며.”
- 약속 없었어.
쿠로오의 목소리가 답답함을 담고 있어서 나도 모르게 피실피실 웃어버렸다. 핸드폰 너머의 얼굴을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기분이 들뜨고 겉잡을 수 없어진다. 아, 나 역시 네가 좋아.
“내가 할말이 뭔지 궁금해서 전화했어?”
-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아니, 그것도 궁금하긴 한데. 아씨, 너 지금 어디야?
“나 지금 집인데.”
- 딱 기다리고 있어.
그러더니 뚝, 전화가 끊긴다. 뭔가 이상해서 핸드폰을 들여다보니 진짜 전화가 끊겨 있었다. 얼떨떨한 기분에 화면이 꺼진 핸드폰만 내려다보았다. 기분이 넘실넘실, 간질간질 이상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조용한 방안에 잠시 앉아 있으면 쿵쾅쿵쾅, 요란한 발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계단을 뛰어올라오더니 곧 우리집 앞에 멈춰서 초인종을 누른다. 넘실거리는 기분으로 비틀거리며 일어나 현관문을 열었다.
“엇, 야. 왜 그냥 문 열어.”
“쿠로오..?”
“야, 누군지 확인은 하고 문 열어야지. 왜 그냥 문 열어, 너 술 마셨어? 아니다, 일단 들어가.”
저 혼자 다급하게 그러더니 현관에 선 나를 방안으로 떠밀어 넣는다. 얼떨떨하게 뒷걸음질을 치며 방안으로 들어가자 쿠로오가 신발을 벗어던지고는 방안으로 쑥 들어온다. 겨울의 냄새가 잔뜩 묻은 쿠로오가 빨갛게 된 얼굴로 내 방안으로 들어온다. 믿기지 않아 눈을 차분하게 꿈뻑인다.
“야, 너 술도 못하는게 그 맥주를 다 마셨어?”
“마시다 보니..”
“안 취했냐? 뭔 일 있어? 왜 이렇게 술을 마셨어.”
“그냥...”
얼떨떨하게 말하는 나를 보던 쿠로오가 고개를 돌려 벽시계를 확인한다. 12시를 5분여 남겨둔 시간, 쿠로오는 제 손에 들려있던 작은 상자를 불쑥 내민다.
“촛불 키자.”
“응?”
“아직 안 늦었네. 그렇게 서있지 말고 얼른 앉아.”
건네받은 상자를 들고 얼떨떨하게 서 있는 내 어깨를 꾹 눌러 자리에 앉힌 쿠로오가 작은 테이블을 꺼내 펼치고는 상자를 다시 가져간다. 새하얀 상자를 열면 케잌이 스르륵 나왔다. 딸기와 초코로 화려하게 장식 된 위에, 생일 축하해, 다이치 하고 써 있는.
“어우, 연말이라서 생일케잌 파는데가 없길래 메세지 겨우 받아왔네. 너 여기 케잌 좋아하잖아.”
“.....”
“열두시 땡 하면 축하하자, 아직 안 늦어서 다행......너 울어?”
눈 앞이 흐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와중에 쿠로오의 목소리만 들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냥 저절로 눈물이 나서 쿠로오가 뭐라고 하든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안 울어.”
“우는데?”
“안 울려고 했는데.”
“야, 그렇게 감동이냐?”
“그래.”
울음기로 꽉 막혀 뜨거운 목으로 내뱉은 숨이 뜨겁다. 홧홧하게 열오른 몸으로 울음기를 꾸역꾸역 주워삼키다가 어지러워 눈을 꽉 감았다. 아, 내뱉은 목소리에는 울먹임이 잔뜩 묻어 있어 꼴사나웠지만 멈출 순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내 생일 챙겨주려고 이렇게 뛰어왔는데, 그럼 감동하지 안하냐?”
“....응?”
“너 좋다고. 너 좋아한다고 내가.”
“응???”
쿠로오의 놀라는 목소리에 나는 그냥 손바닥으로 얼굴을 푹 묻어버렸다. 눈 앞이 어두워지니 이유 모를 용기가 나서 하던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 지금 고백하는거잖아 너한테.”
“어...”
“생일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받아주면 안돼?”
잠시 정적이 감돈다. 훌쩍거리는 내 소리만 간간히 들려왔다. 시야는 어둡고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아 혹시 나 혼자 두고 나가버린 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밀려든다. 후우, 숨을 내쉬는데 따뜻한 체온이 나를 가득 안아온다.
“어, 저. 그러니까 사와무라.. 내가 지금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거든?”
“......”
“그러니까, 니가 나를 좋아한다고?”
“.....응.”
“그러니까, 친구...로서 좋아하는게 아니고?”
“..그래.”
“그럼 나 너보고 사귀자고 해도 돼?”
응?
“그러니까, 우리 이제 사귀면 되는거야?”
순간 눈이 번쩍 떠져 나를 끌어안고 있는 쿠로오를 밀어냈다. 엉망진창이 된 내 얼굴 따위는 신경쓰이지 않았다. 쿠로오는 어쩐지 살짝 상기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백 받아주는거야?”
“응.”
“생일 선물로?”
“아니.”
밀어내던 모양 그대로 굳은 내 손목을 턱, 하고 쥔 쿠로오가 날 다시 끌어당겨 안아버린다. 뭐가뭔지 도저히 모르겠다. 어질어질한 시야에 엉망진창으로 이것저것 복잡한 감각이 쏟아진다.
“왜 니가 고백을 먼저 해. 내가 하려고 잔뜩 벼르고 있었는데.”
“응?”
“나 니 생일 서프라이즈로 챙기려고 알바 끝나고 바로 케잌가게 뛰어가서 예약한거 찾아온거야.”
“....”
“나 친구한테 그럴 정도로 착한 애 아니거든.”
어, 그러니까 이거..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갑자기 쾅, 하고 심장이 귓가에서 박살 난 기분이었다.
“나도 너 좋아하거든 사와무라.”
라고, 쿠로오가 귓가에서 말을 꺼낸다. 마치 생일선물처럼. 눈을 느슨하게 깜빡이는 내 뺨을 쥐고 쿠로오가 조심스럽게 입을 맞춘다. 천천히 눈을 감아 어두운 시야 건너편으로 핸드폰에 메세지가 들어오는 소리가 몇갠가 들려왔다. 아마도, 생일이 되었나보다 하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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