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다이] 터닝포인트 下
쿠로오 테츠로 X 사와무라 다이치
* 과거 연성을 리네이밍 한 단편입니다.
집어던지듯 연필을 내려놓았다. 지저분하게 연필로 사방팔방 그어진 음표들의 향연이 꽉 뭉쳐진 내 머릿속을 억지로 헤집으며 음의 흐름이라는 걸 만들어 내려 발버둥을 친다. 나름대로 머릿속에서 깜빡깜빡 거리는 어떤 악상을 기록하곤 마침표를 꾹 찍었다. 스쳐봐도 손볼게 많은 악보라는 게 훤히 보인다. 하지만 이게 지금의 나로서는 최선이다.
“다했어?”
작업실 문이 빼꼼히 열리더니 오이카와가 슬쩍 고개를 들이민다. 나는 피곤함이 묻어나는 눈을 한 손으로 문지르며 악보를 내밀었다. 말이 좋아 악보지 낙서투성이인 종이 나부랭이를 받아 든 오이카와의 표정이 기막히게 구겨진다.
“뭐야?”
“악보지 뭐긴 뭐야.”
지랄을..하고 읊조리던 오이카와가 뒤적뒤적 종이를 뒤진다. 나는 피곤함에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한 쪽 어깨를 주물럭거렸다. 영화를 보다 말고 내려진 그 엉뚱한 결말에 나는 아무 말도 없이 벌떡 일어나 대뜸 작업실에 처박혔다. 어이가 없는 오이카와의 시선이 나를 향하는 걸 느꼈지만 나는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책상 앞에 앉았다. 몹쓸 버릇이다. 뭔가 머릿속을 스치면 어떻게든 저렇게 콩나물 대가리로 표현해야 하는 것은. 그렇다고 저렇게까지 막무가내로 휘갈긴 건 또 처음 보는지 오이카와의 표정은 울상이 섞여있다. 만족하냐고? 아니, 만족 못한다. 작곡가 쿠로오 테츠로 자존심에 저런 낙서는 말도 안 되는 거다. 말도 안 되는 거긴 하지만 지금 내 마음도 말도 안 되는 거잖아. 지금 내 상황도 말도 안 되는 거잖아. 슬럼프에 허덕거리고 있는 것도, 바보같이 케케묵은 감정에 휘둘리고 있는 것도.
“오랫동안 널 알아왔지만 이건 참... 솔직히 지금 니가 뭔 의도로 나한테 이걸 내미는지 모르겠다.”
팔랑팔랑 종이를 넘기는 소리와 함께 오이카와의 투덜거림이 들린다. 나는 그저 입술을 일자로 꾹 다물었다.
“뭐, 일단 니 상태 보니까 이걸로 만족은 해야 할 거 같고..”
“너 능력 좋잖아. 한 번 알아서 해봐.”
“이럴 때만 칭찬이지.”
허탈한 듯 웃으며 내 목에 헤드락을 걸곤 꾹꾹 눌러대던 오이카와가 결국 픽 웃어버린다. 나도 덩달아 건조하게 웃어버렸다. 애석하게 답답한 상황에서도 웃음은 나왔다.
해야만 하는 일까지 사라지고 나니 정말 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바보가 된 듯이 있었다. 어느새 어둑해진 거실 소파에 멍하니 앉아 쿠션 끝에 달린 술을 만지작거렸다. 순전히 다이치 취향인 단정한 커튼이 바람에 흔들리는 걸 보고 있다가 벽지의 기하학적인 무늬를 보고 있다가 조용히 잠들어 있는 TV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베란다에 둔 화분들을 보다가...시선이 천천히 집안 구석구석을 훑었다. 이 빈집에 만약에 혼자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새삼 넓게 느껴지는, 존재감이라곤 깡그리 비워낸 이 거대한 공허함 속에서 이리도 끔찍하게 느릿느릿 흘러가는 시간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새삼스럽게 혼자라는 그 흔한 단어가 가슴에 쿡 박힌다. 차분하게 내쉰 한숨이 생각보다 크게 거실을 가득 메운다. 그 어마어마한 상실감을 견딜 수 없어서 차키를 집어 들고는 무작정 시동을 걸었다. 평소처럼 조수석을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지자 목적지도 없이 그저 엑셀을 밟아댔다. 주황빛의 가로등이 켜진 도로는 퇴근시간을 한참 넘기고 나니 거짓말같이 한적했다. 멋대로 속도를 올리고 떠나가라 크게 노래를 틀었다. 거기다가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비까지 내리기 시작하니 한밤중의 드라이브는 가히 환상적이었다. 대중교통을 타는 걸 더 좋아했지만 비오는 날의 드라이브를 위해서 차를 꼭 사야한다던 다이치가 마치 옆에서 숨을 쉬고 있는 마냥 생생하다. 차선이며 신호 따윌 싸그리 무시하며 달리다가 한적한 강변 주차장에 아무렇게나 차를 세웠다. 뻑뻑한 마찰음을 내며 시야를 확보하던 와이퍼가 느릿하게 앞 유리를 닦아낸다. 귀가 얼얼할 정도로 큰 음악을 틀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숨 섞인 호흡이 귓가를 괴롭힌다. 신경질적으로 오디오 전원을 끄자 시끄럽게 유리창을 때려대는 빗소리가 들린다. 우습게도 지금 상황에서 적막하다는 표현이 불현듯 떠오른다. 우습다. 천천히 허리를 굽히며 핸들 위로 엎드렸다. 편안하게 받쳐 입은 셔츠가 동선이 매끄럽도록 도와준다. 이것 또한 다이치가 골라준 셔츠. 코끝에 닿는 향기도 다이치가 고른 방향제. 지금 울리고 있는 이 전화벨은 다이치가 직접 골라 준 벨소리.
눈물 날 정도로 큰 다이치의 존재감에 호흡마저 엄숙해진다. 관계의 끝을 생각했던 내 자신이 엄청난 바보 같았다. 조수석에서 울리고 있는 벨소리를 조심스럽게 허밍으로 따라 읊조렸다. 건조한 음의 나열. 눈앞을 요란하게 어지럽히는 악보의 형상에 눈을 감았다. 그리곤 핸드폰을 덥썩 집어 들었다가 액정에 뜬 이상한 번호의 조합에 미간을 찌푸렸다. 요즘 부쩍 늘어난 광고 전화가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다시 내려놓으려다 말고 거짓말처럼 무서운 그 어떤 예감이 들어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당연히 나와야 할 목소리는 잠시 꾹 담아 둔 채.
- 쿠로.
와이퍼가 스르륵 앞 유리를 문질렀다가 제자리로 돌아간다. 잠시 닦여나갔던 앞 유리는 삽시간에 다시 빗물로 뒤덮이고 말았다. 수화기 너머로 수많은 사람들이 떠드는 왁자지껄한 소리에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지만 그 속에서도 내 이름을 부르는 한 사람의 목소리는 분명히 들려왔다.
- 야, 여보세요? 쿠로오??
“어.”
- 뭐야, 왜 대답을 안했어. 놀랬잖아.
너 놀래라고 그랬다 왜. 평소 같은 농담도 나오지 않았다. 시끄럽게 쏟아지는 외국어의 향연 속에서 똑똑하게 들리는 일본어가 이질적이라서 그런 거라고 둘러대고 싶었지만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런 게 아니라는 건.
- 밥은 잘 챙겨 먹구 있어?
“어.”
- 여기 너무 좋다. 너 작업 끝나면 같이 오자. 너랑 볼려구 관광 명소도 나 혼자 다 안 보러 갔어. 나 잘했지?
“그래.”
- 작업은 좀 잘 되어가?
“그럭저럭..”
- 내가 커피 안 타줘서 작업 진행 안되는 건 아니고? 하하.
십년씩이나 겪었는데 모를 리가 없다. 우리가 싸운 것도 잊은 채 장난처럼 말하면서 나를 걱정하고 있는 다이치의 표정이 눈앞에 생생했다.
- 그래도 다행이다. 너 화나서 내 전화도 안 받을 줄 알았어.
그러곤 작게 웃는 웃음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전해진다. 그 한숨 같은 웃음소리에 갑자기 눈 밑이 쓰렸다.
“뭐가 다행이야.”
- 그럼 다행 아니야? 응? 하하.
“니가 뭘 잘못해서 내가.. 전화도 안 받어.”
십년을 봐왔지만 사와무라 다이치는 바보인 게 틀림없다. 아니면 단기 기억 상실증. 아니면 판단력 부족. 뭐가 그렇게 잘못해서 맨날 자기 혼자 미안하고 자기 혼자 잘못 했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단 한 번도 다이치가 그럴 짓을 한 적이 없는데.
- 쿠로오.
“왜.”
- 진짜 화 안 났어?
“그래.”
- 그럼 됐어.
“.....”
- 뭘 잘못한 게 무슨 상관이야. 화 안 났으면 그걸로 됐어.
“후...”
- 웬 한숨이야.
“바보같이 한심할 정도로 깔끔한 게 딱 사와무라 다이치라서 그런다 왜.”
뭐야 그게. 으하하 넘어가는 소리가 기계음이 섞여 선명하게 들린다. 한 박자 늦은 대답은 국제전화라는 것을 실감케 해준다.
- 아, 쿠로. 나 지금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은데..
“그래..”
- ......
“......”
- 괜찮지?
“어.”
잠시 수화구를 반쯤 막고는 영어로 누군가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다이치가 난감한 목소리로 그런다. 나는 보일 리도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 그래.
“.....”
- .......
“들어가 봐.”
- 응.
미련이 가득 남은 목소리로 머뭇거리던 다이치가 급하긴 정말 급했던 모양인지 전화를 툭 끊는다. 나는 잠시 아무렇게나 전화기를 내버려 둔 채 멍하니 있었다. 그제야 다이치와 통화를 했다는 게 실감이 나서 비죽비죽 웃음이 나왔다. 뭔가에 홀린 듯 천천히 전화기를 제대로 조수석에 내려 두고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묘한 웃음기로 일그러진 지금의 내 표정을 만약에 다이치가 봤었다면 웃을 것이 분명해서.
딱 한 번 내 노래를 부른 적이 있었다. 앞으로 두 번 다시 만들 수도 없는 노래를 며칠을 새가면서 완성해 내고 창피함을 무릅쓰고 무려 연습씩이나 하면서 생각했다. 그래, 내 마음 속에 있는 이런 예술성들을 표현하는데 음악이 가장 좋은 도구라면, 나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할 수도 있는 게 음악이 아닐까. 좋아해, 사랑해, 설렘이 가득 담긴 가사를 쓰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날 이렇게 만든 게 넌데 이 노래를 받아야 할 사람도 니가 아니겠냐며, 억지로 다이치의 손을 잡아끌었다. 볕이 아주 예쁘게 드는 텅 빈 강당 중간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다이치를 앉혔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다이치를 뒤로하고 천천히 무대 위에 올라가 피아노 앞에 앉았다. 누군가를 위해 불러보는 노래는 어버이날 노래 밖에 없는 나에게 그만큼 다이치는 특별했다. 며칠 동안 내내 끌어안고 살아서 머릿속에 아예 새겨둔 악보를 따라 피아노를 치면서 단 하나만을 생각했다. 오늘 이 노래가 다이치에게 닿을 수 있으면 앞으로 노래를 쓸 모든 힘을 여기에 다 담을 수도 있다고. 그만큼 특별했다.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린 날의 그 때 나에겐 다이치와 노래, 그 둘 밖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온통 사랑 투성이에, 너 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진부하지만 진심이 담긴 노래가 끝나는 마지막 소절을 따라 두드린 건반 위로 천천히 눈물이 떨어졌다. 널 이렇게 생각하고 가슴에 담는 것만 해도 나는 이렇게 설레고 가슴이 벅차서, 눈물이 날 수 밖에 없어 다이치.
“내 마음이야.”
“.......”
“널 사랑한다구.”
사랑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가슴 벅찬 걸 너를 통해 알았어. 다른 사람의 마음이 되어 쓴 노래는 당연히 진심이 전부 담길 수가 없었다. 그런 진심이 빠진 내 노래에 생명을 불어넣는 건 늘 다이치였다. 그런 나에게 활기를 불어 넣는 것도 다이치였고.
몇 번 음정이 틀렸다든지 그런 실수는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정말 모든 감정을 다해서 부른 노래였다. 머릿속에서 맴돌던 마음이란 것을 입으로 털어내는 순간 느끼는 그 가슴 벅참을 과연 다이치가 온전히 이해했을지는 여전히 모를 일이지만 적어도 묽은 눈으로 날 바라보던 다이치의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천천히 무대 위로 걸어 올라와 그 단단한 손으로 내 눈물을 닦아 주던 다이치가 결국엔 날 끌어안고 울어버렸던 그것을,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얹어져 있던 무거운 먼지 더미를 닦아낸 듯 그 순간의 엄청난 감정이 다시 생생하게 떠오른다. 나는 다이치가 떠난 후, 처음으로 소리 내어 울었다. 마치 버려진 아이처럼 얼굴을 파묻고는 엉엉 울어댔다. 따지고 보면 하나도 미안할 것이 없는데 잠시 이 감정을 잊고 있었다는 게 너무나 다이치한테 죄스러운 것을 보니 나도 어쩔 수 없는 바보인 모양이다.
숨 쉬는 매 순간 느낀다. 내 사랑이 너라는 것을.
*
안정이 필요했다. 말하자면 휴식이 필요했다. 비비꼬였던 속내를 억지로 풀어내려 애쓰다 기어이 썩둑 잘라내 버린 마냥 속이 시원했지만 그 텅 비어버린 공간을 메우기 위해서라도 어쨌든 나는 쉬어야한다. 어제 겉옷 하나 없이 집에서 입던 간편한 옷 그대로 나가 폭우가 쏟아지는 그 추운 곳에 있었더니 미열이 있는 것도 같고. 핑계를 대자면 하나부터 열까지 있는 핑계 없는 핑계 만들어서 댈 수도 있었다. 나는 침대 위에서 오전 내내 뒹굴었다. 대자로 뻗었다가 몸을 둥글게 말았다가 이리저리 팔다리를 휘적거리다가 요가비디오에서 본 듯한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작업할게 없으니 그저 신이 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은 간사하다. 내 짐이고 내 족쇄였던 작업이 마음먹기 따라서 이렇게 가볍게 느껴질 줄이야. 나는 침대 끝에 머리를 축 늘어뜨리곤 천장을 보고 누웠다. 축 처진 머리끝으로 피가 묵직하게 몰린다. 지금 마음으로는 수십 개도 넘게 곡을 쓸 수 있을 것만 같았지만 왠지 미뤄두고 싶었다. 지금 심경이 어떠한지 표현을 하라면 난 여전히 표현할 순 없었다. 하지만 어제까지의 그 꽉 막힌 답답함은 충분히 가신 상태였다. ‘못’ 하는 것과 ‘안’ 하는 것의 차이가 이렇게 클 줄이야.
“사와무라 다이치.”
그대의 존재감은 그야말로 언빌리버블.
“뭐해. 어서와.”
중얼거리다 말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머리끝으로 피가 잔뜩 몰려 있는 상태에서 순간적으로 몸을 일으키니 현기증이 났다.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흠흠 목을 가다듬었다.
“아- 안 돼. 청소도 해야 하고 점심 준비도 해야 하고, 난 너처럼 할 일 없는 게 아니잖아.”
점짓 엄한 목소리를 섞어가며 다이치의 목소리를 흉내 내다가 배를 잡고 큭큭 웃어댔다.
“내가 왜 할 일이 없어. 작업도 해야 되고, 너랑도 놀아줘야 되고..”
이젠 별 짓을 다 한다 진짜.
“나 지금 바뻐 쿠로오. 나중에, 응? 아 바쁘긴 뭐가 바뻐, 이리 와. 나 지금 청소해야 된다니깐? 야, 까짓 청소 내가 하지 뭐.”
혼자 실랑이를 벌이다가 침대 시트에 얼굴을 묻고는 큭큭 웃어댔다. 진작 이렇게 싸워볼걸. 웃음기 섞인 한숨을 서서히 내쉬었다. 진작 그렇게 해볼 걸이라는 후회는 작은 다짐으로 다가온다. 그렇게 해야지 하고.
그래서 화장실 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어색하게 자리 잡은 고무장갑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태어나 처음 시도해보는 욕실청소란 것에 묘하게 긴장감이 맴돌았다. 까짓 거 지가 대단해 봤자 화장실이지. 한 평 남짓한 공간에는 비장함마저 감돌았다. 욕실 세제를 짜서 바닥에 문질렀다. 수세미를 찾다가 못 찾아서 신발을 빠는 솔로 정성스레 문질러줬다. 이 귀한 손으로 씻겨준 건 아빠랑 다이치 뿐인데 화장실 주제에 호강한다. 쪼그려 앉아서 바닥을 구석부터 북북 닦다가 다리가 저려서 콧등을 씰룩 거렸다. 이럴 땐 코에 침 바르면 한 방에 해결된다. 첨엔 뭔 개소리냐 했는데 정말로 효과가 직빵이다. 다이치가 아니었으면 몰랐을 사실들이었다. 화장실 청소가 이렇게 힘들다는 것도. 북북 힘차게 바닥을 문지르던 손이 점점 잦아든다. 복작거리던 마찰음이 멎자 욕실은 정적으로 가득 찼다. 화장실 문을 닫으면 완벽하게 외부와 단절되는, 이 좁디좁은 공간에서 다이치는 혼자 무슨 생각들을 했을까. 내가 배를 긁으며 개그프로 따위나 보며 낄낄 거릴 동안 다이치는 이곳에서 나름대로의 외로움과 씨름했을지도 모른다. 그 외로움을 내가 조금만 더 일찍 알아줄 수 있었다면, 다이치가 잠시 자리를 비운 지금 내가 이렇게 괴롭다든가 공허하다는 그런 쓸데없는 감정 따윈 느끼지 않았어도 되었을 텐데.
“힘들다..”
내 혼잣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세면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물방울이 바닥을 둔탁한 소리를 내며 이젠 사그러들고 있는 거품 위로 툭 떨어진다. 힘들다. 너도 힘들었을까? 똑같이 힘들었을 거야. 근데 넌 어떻게 계속 버텨왔을까? 힘들다는 투정이 당연할 텐데. 눈앞에 있다면 끌어안아 주고 싶었다. 어깨를 다독거리며 보듬어 주고 싶었다. 당연히 다이치랑 계속 살 거니까 결혼 따윈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내게 아내가 생긴다면 꼭 이런 느낌이 들 것 같았다.
[밥은 꼭 챙겨먹어야 해. 귀찮다고 쌀 한꺼번에 많이 씻어두지 마. 다 상해. 빨래는 내가 다녀와서 하면 되니까, 청소랑 밥만 제대로 챙겨. 가뜩이나 예민한 기곈데, 먼지 많으면 금방 고장 나잖아. 너 또 기계 탈나면 삼박 사일 동안 뿔 세울 거지? 그러니까 미리미리 청소 좀 잘 하고. 책상까진 내가 바라지도 않아. 그냥 기기에 있는 먼지 좀 자주 털어주고. 밥 꼭 챙기고. 음, 차라리 시켜먹는 게 좋으려나. 아니다, 요즘 바깥 음식은 영 믿을게 못 돼서. 좀 귀찮더라도 챙겨먹어 알았지?]
지금 생각해 보면 죄다 나를 걱정해서 하는 소리였는데. 싸울 것 까진 없었는데. 뭐가 그렇게 짜증이 나서 배웅조차 제대로 못하고. 다시 생각해 보면 나도 너를 걱정해서 투덜거린 건데. 멀리까지 가면서 자기 짐 하나 덜 챙긴 거 없나 보는 게 아니라, 자기 일은 뒷전이고 나만 걱정하는 게 왠지 고마우면서도 속상해서 투덜거린 다는 게 어쩌다보니 싸우기까지 해버리고. 쪼그려 앉은 채로 모아진 무릎 위에 턱을 괴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까 우린 좀 웃겼다. 지들 앞가림도 못하는 둘이서 괜한 오지랖들이다. 닮은꼴이다. 같이 살다 보니 닮은꼴이 된 건지 애초부터 닮은꼴이라서 서로에게 끌렸던 건지는 모를 일이지만.
쌉쏘롬하게 웃고 있는데 이젠 다이치의 목소리마저 들린다. 귓가에 속삭이듯 쿠로오, 쿠로오, 하고 부르는 다이치의 목소리가. 쿠로오 테츠로 드디어 정신줄을 놓았구나. 하던 청소나 마저 할까 싶어 으휴, 하고 다시 고무장갑 낀 손으로 솔을 집어들었는데 갑자기 화장실 문이 벌컥 열린다.
“으악!!!!!!!!!!!!!!”
너무 놀라서 때 솔을 집어들다 말고 악 하고 비명을 지른 그 상태로 굳어 있었다. 그런 나 보다 더 놀란 모습으로 화장실 문고리를 잡고 있는 다이치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나 이만큼 놀랐어요 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드디어 미쳤나 부다. 먼 나라 지구 반대쪽에 있어야 할 다이치가 보이다니. 제대로 밥을 안 챙겨 먹었더니 헛것이 보이는 게 분명하다.
“뭐해??”
근데 그 헛것이 말까지 한다. 목소리마저 사와무라 다이치다. 으악. 또 비명을 지를 뻔 했는데 너무 꼴사나워서 영화에서 하던 것 마냥 진부한 모션으로 손등으로 눈을 슥슥 비볐다. 넌 누구냐. 어디서 본 영화배우 흉내라도 내볼까 했는데 손등에 묻어 있던 세제가 눈에 들어가는 바람에 진짜 모냥 빠지게 으악 소릴 지르며 뒹굴 뻔 했다.
“너, 너, 너, 너 뭐, 뭐야.”
“뭐긴 뭐야. 나지.”
무슨 소리냐는 듯 무심하게 대답한 다이치가 욕실을 휘휘 둘러보더니 날 보곤 풉 하고 웃는다. 그제야 머쓱해져서 스르륵 일어났다. 느적느적 고무장갑을 벗고 있으려니 다이치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는 억지로 웃음을 참는 게 보인다. 으윽. 이제 앞으로 모든 일에-특히 욕실 청소에- 헌신적으로 도와주리라 마음먹었던 건 취소.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너 왜 그러고 있어?”
욕실 슬리퍼를 직직 끌며 거실로 나오는 나를 보며 다이치가 여전히 놀란 표정으로 묻는다. 묻지 마라. 저 손바닥만 한 곳에서 너의 외로움과 고독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있었노라고는 차마 낯 뜨거워서 읊을 수가 없으니까 말이다.
“그나저나 넌 어떻게 된 거야?”
대답을 회피하듯 말을 돌렸는데 거실에는 트렁크며 온갖 짐이 한 무더기 놓여 있었다. 온갖 삽질을 하다못해 결국엔 날짜 감각마저 상실했나 싶어서 거실에 있는 전자 달력을 봤는데 다이치가 귀국하는 날짜는 이틀 뒤가 확실했다. 어라, 뭐야 이 황당한 상황은.
“짤렸어?”
“그런 거 아냐.”
말을 단박에 끊은 다이치가 기어들어 갈 듯한 목소리로 대답을 마저 한다.
“아직까지는...”
뭐냐, 더 불안한 저 대답은!!!!!!!
“안 괜찮잖아.”
당연히 안 괜찮지. 니가 짤리면 일단 내가 너를 먹여 살려야 하잖아. 이제 그만 일에서 좀 벗어나서 쉬는구나 싶었는데 갑작스럽게 며칠 내로 곡을 뽑아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머릿속을 휘감는다. 알겠다. 걱정 마라. 너 하나 정도는 이 오빠가 먹여 살릴 수 있어.
“너 목소리 듣는데, 괜찮다고 하면서.. 목소리가 하나도 안 괜찮았잖아.”
느닷없는 다이치의 말에 눈을 둥그렇게 떴다. 저게 뭔 소린가 싶어서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데 순간 머릿속에 낀 부연 안개 같은 게 서서히 걷히는 기분이다.
“니 목소리 듣는 순간 안 괜찮은 게 확 티가 나는데, 정신 차리니까 짐 챙겨서 공항으로 가고 있더라고. 아, 그리고”
그 뒤로 다이치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근데 더 참아주고 들어 주고 있을 만큼 내 인내심은 깊지 않았다. 무작정 다이치를 끌어안고는 허겁지겁 입을 맞추었다. 마치 안달난 사람처럼 끌어안고 무작정 입술을 들이댔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잠깐, 잠깐만 하며 말리던 다이치가 이젠 제가 못 참겠다는 듯 물러서던 발걸음이 내 쪽으로 다가온다. 축축한 숨이 진짜 다이치라는 걸 말해준다. 진짜 다이치가, 내 앞에서, 정말로 나랑 입을 맞추고 있다. 그 사실에, 그 현실에 나는 꼴사납게 감동했다. 고작 오일동안 못 본 주제에 나는 별난 이별을 했던 사람처럼 굴었다. 그렇지만 난 그 오일동안 피가 마르는 줄 알았다. 감촉이 없는 사와무라 다이치의 환영에서, 사와무라 다이치의 흔적에서, 헤어 나오지도 매만지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앓았으니까.
“죽을 뻔 했어.”
숨을 가까스로 들이마신 다이치의 눈은 이미 풀려 있었다. 그런 다이치를 정성스럽게 매만졌다. 나는 첫사랑의 열병에 들끓던 그 때 처럼 마음속에 있는 말을 죄다 털어내었다.
“보고 싶어서 죽을 뻔 했어.”
아랫입술을 쭉 빨아 당기며 입술 새로 흘리듯 뱉은 내 말을 용케 들었는지 다이치가 물기 섞인 웃음을 푸흣 하고 뱉어낸다. 사랑스럽다. 왜 이렇게 새삼스러운지는 모르겠지만 10년 동안 꼬박 꼬박 들어왔던 저 장난스러운 웃음이 오늘 따라 유난히 사랑스럽게만 느껴진다.
“그럴 것 같아서 이렇게 왔잖아.”
아쉽게 주춤거리며 떨어진 입술이 닿아 살짝살짝 스친다. 차분하고 단정한 저 얼굴에서 가끔씩 보이는 이런 섹시함은 나만 아는 다이치의 매력이다. 정말 그 매력에 숨질 것 같다. 엄마, 나 일찍 죽으면 다 얘 때문이야. 심장이 너무 비정상적으로 뛰어. 달큰한 목덜미에 입술을 푹 묻자 기묘한 콧소리가 흘러나온다. 단숨에 다이치의 벨트를 휘리릭 풀었다. 그러자 눈을 둥그렇게 뜬 다이치가 주춤 하는 게 느껴진다. 이곳저곳 보이는 곳에 죄다 입술 도장을 찍으면서 셔츠 단주를 푸는데 다이치가 말리는 게 느껴진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 같았다. 다이치의 손길을 무시한 채 소파까지 밀어붙여 넘어뜨렸다.
“쿠로오, 잠깐만.”
“싫어.”
“잠깐만, 잠깐, 우리 좀 있다가..”
“가만 있어봐.”
“쿠로. 사실, 읏.”
“다이치 너 짐은 이게 다지????”
소파 위에서 한참을 뒹굴고 있는데 현관문이 소란스럽더니 문이 벌컥 열리며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나와 다이치의 시선이 한꺼번에 꽂힌 그 곳에는 다이치의 짐 가방을 든 오이카와가 바퀴벌레 씹은 마냥 표정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오이카와랑...같이 왔다구........”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꺼낸 다이치가 부랴부랴 옷을 추스린다. 투둑, 짐가방을 내팽개치듯 떨어뜨린 오이카와가 심기 불편한 얼굴로 그런다.
“씨발, 아주 에로 영화를 찍어라.”
“어, 찍을 거야. 그러니까 삼초 내로 좀 꺼져줘.”
다이치의 바지춤을 덥석 집으며 그랬더니 다이치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른다. 고맙게도 진짜 나가버리는 오이카와에게 다이치가 가까스로 ‘데려다 줘서 고마워!’ 그런다. 채 내뱉기도 전에 발음이 죄다 뭉개져 버리긴 했지만. 슬쩍 돌아보자 오이카와랑 눈이 마주쳤다. 입으로 작게 땡큐 이랬더니 닫히는 문 사이로 가운데 손가락을 번쩍 치켜들며 씩 웃는다.
'쿠로다이 > 완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쿠로다이] 터닝포인트 中 (0) | 2016.08.19 |
---|---|
[쿠로다이] 터닝포인트 上 (0) | 2016.08.19 |
너와 나, 그리고 - 쿠로오 번외 (교류회회지 수령자 한정공개) (0) | 2016.06.22 |
* [쿠로다이] 야속한 그대여下 (0) | 2016.03.18 |
[쿠로다이] 야속한 그대여上 (0) | 2016.03.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