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다이] 터닝포인트 上
쿠로오 테츠로 X 사와무라 다이치
* 과거 연성을 리네이밍 한 단편입니다.
넓은 공간에서 작업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탓에 운동장만한 책상을 샀는데 지금은 손바닥만한 공간도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잡동사니들이 난잡하게 널려 있었다. 머릿속에서 아까부터 가물가물 맴도는 것을 조금이라도 구체화 시키려 억지로 미간을 모으고 손톱만큼 남아 있는 집중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곧 힘이 빠져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가 괜히 밀려오는 짜증을 눈앞에 놓여있는 종이에 휘갈겨댔다. 시시 때때로 작업 노트에 떠오른 악상 같은 걸 음표로 휘갈겼다가, 혹은 어린아이 낙서 같은 것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어떨 땐 색깔이름 같은 것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 목숨과도 같은 노트가 가끔 손에 잡히는 거리에 없을 때면 급한 대로 잡아끌어 갈겨댄 이면지나 전단지 같은 것들도 이미 책상 위에 수북했다. 아까부터 간질간질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니는 그 어떤 것은 이상한 형태를 만들었다가 다시 흩어졌다가 마치 흑백티비처럼 무색으로 변하기도 했다. 젠장 망했다. 펜 뒤꼭지를 질겅질겅 씹다가 욕지기를 뱉어냈다. 체념하듯 펜을 내려놓자마자 복잡한 책상이 그제야 한 눈에 들어와서 이걸 한꺼번에 쓰레기통에 쓸어버릴까 아니면 사람을 불러서 정리할까 할 짓 없을 때 깔끔 떨까 하며 별의별 생각을 다했다. 그런 다음에는 광고지들이 눈에 들어와서 괜히 원색으로 눈을 어지럽히고 있는 그 종이 쪼가리들을 흘겨봤다. 아 탄탄멘 먹고 싶다. 그런 다음에는 밝은 스탠드 조명에 존재감을 더 확실하게 하고 있는 대기 중의 먼지를 하나씩 일일이 세어댔는데, 그러다보니 문득 내가 점점 미친놈이 되어가는 게 아닌가 하는 자문이 들어 나는 고개를 갸웃 거렸다. 차라리 미친놈이라도 되면 그 광기를 표현이라도 해보겠는데 말이다.
“노크 못 들었어?”
그러다가 제풀에 지쳐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는데 코끝에 커피향이 닿는다 싶더니 좁은 영역에 커피 잔이 하나 놓인다. 그 잔을 내려놓는 손은 단단하지만 끝은 맨들하다. 약간 피곤에 잠긴 목소리는 자상하고 단정한 목소리. 직업 때문인지 소리라는 것에 민감한데 노크소리 하나 제대로 못 들을 정도로 아무래도 나는 지금 정신이 온전치 못한 모양이다. 의자를 돌려 몸을 틀고는 올려다보니 화답하듯 따라오는 미소. 늦은 시간이라서 조금은 피곤한 감이 담겨 있지만.
“진짜 못 들었구나.”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는 나를 보더니 고갤 끄덕이며 제멋대로 결론을 내린다.
“잠이 안와서……. 잠깐 나왔는데 왠지 너 아직 작업할거 같아서.”
그리곤 묻지도 않은 약간의 변명 같은 것을 늘어놓고. 나는 긍정의 것도 아닌 의미를 알 수 없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는 피곤한 모션으로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왜 잠이 안와.”
“독수공방 하니까 외로운가보지.”
제 딴에는 흡족한 농담에 어깨를 한 번 좁혀 풋 하고 웃어내곤 내 의자 팔걸이에 스르륵 걸터앉는다. 나는 그 느긋한 몸짓 같은 것을 슬로모션으로 보는 양 하나하나를 일일이 기억했다. 그리곤 목덜미에 작게 팔이 둘러져 오더니 이내 체중을 실어 몸을 온전히 기댄다. 나는 모처럼 느끼는 체온에 무의식적으로 고갤 기댔다. 어쨌든 오랜 시간 지내온 연인의 체온이란 것엔 감성도 이성도 필요 없이 무의식이라는 것이 맹렬하게 작용하므로.
“피곤할 텐데.”
“피곤해.”
무척. 덧붙이는 말에 걱정하는 표정으로 작게 웃는다.
“얼른 자.”
“조금만 더 하고.”
내 말에 미련 없이 몸을 떼어내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켜 내곤 이따 봐 하고 브로마이드 등이 덕지덕지 붙어 있어 무거워 보이는 문을 밀고 나간다. 퉁, 하고 방음소재로 되어 있어 두터운 문이 닫히는 소리에 나는 눈을 스르륵 감았다. 갑자기 불편하게 잠이 달아났다.
음악을 한 지는 벌써 십년이 넘었다. 그 때 당시에는 그게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서 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때 내 머릿속에서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그런 예술적인 감각 같은 것을 최대한으로 표현하고 담아낼 수 있는게 그 당시에는 음악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학교에서 노래 좀 한다고 소문 난 학생한테 찾아가서 너 내 노래 안 해볼래 라고 쥐뿔도 없는게 당당하게 말했다. 그게 사와무라 다이치였다. 나는 적당히 공부를 하고 적당히 놀 줄 알고 적당히 반항도 할 줄 아는 그런 평범한 학생 중에 하나였는데 사와무라 다이치는 달랐다. 책만 펴놓고 있어도 남들과 달랐고 하다못해 쉬는 시간에 친구들이랑 복도를 뛰어다녀도 시선을 몰고 다니고 아닌 일에 반항을 해도 제대로 할 줄 아는, 뭘 해도 난 놈이었다. 심지어 전혀 안면 튼 적 없는 나의 뜬금없는 제안에도 웃으며 그래, 라고 말한 것부터 아주 제대로 난 놈이었다. 악기를 전공하는 누나 덕분에 볼 줄 알게 된 악보에다가 막무가내로 갈겨댄 내 곡을 갖다 바친 건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처음 쓴 곡을 다른 사람이 노래로 표현 한다는 것은 매우 매력적인 것이었다. 그 매력에 책잡혀서 이제껏 나는 곡을 쓰고 있는 거다. 이렇게 구겨진 전단지 뒷장에다가 심오한 이별상황 따위를 표현해 가면서.
내가 처음으로 작곡한 노래를 처음으로 불러 준 사와무라 다이치는 학교생활 하는 내내 내 노래만 부르다가 지금은 책 표지 디자인을 하는 프리랜서가 됐다. 그건 순전히 다 나 때문이다. 운 좋게 좋은 기획사에 오디션을 봐서 연습생으로 들어간 다이치는 데뷔가 기대 되는 촉망받는 연습생이었지만 시기 부적절하게 터진 스캔들 때문에 데뷔의 꿈을 접고 기획사에서 단호하게 내쳐져야 했다. 아무리 기대주라고 해봤자 거물급의 기획사에서 스캔들 터진 사와무라 다이치는 그냥 사방에 널린 돌멩이랑 다를 게 없었다. 정작 스캔들의 대상인 나는 여전히 음악을 하고 있고 몇 개의 곡을 히트 쳐서 나름대로 젊은 나이에 좋은 위치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그건 너무나 미안한 일이었지만 고등학교 삼년, 대학교 사년을 내내 곡만 써댄 나는 살기 위해서도 곡을 써야했다. 지금 손에 쥐고 있는 연필 한 자루 살 돈도, 하다못해 탄탄멘 한 그릇 사먹을 돈도 없던 절체절명의 시기였기 때문에. 다이치가 이해를 해줬지만 그래도 미안한 건 미안한 거다. 곡을 쓴다고 유난을 떨며 독수공방을 시켜 잠을 설치게 할지언정.
결국 더 이상 진행 되지 않는 작업에서 손을 떼고 나는 침대로 기어들었다. 잠 안 온다는 건 다 뻥인지 숨을 깊게 쉬며 편하게 잠을 자던 다이치가 잠을 방해하는 반동에 앓는 소릴 내며 몸을 뒤척인다. 그러더니 금세 숨을 깊게 몰아쉬며 다시 잠이 든다. 낮게 켜두었던 스탠드 불을 당겨 끄고는 베개에 깊게 몸을 묻었다. 새벽에 오히려 더 청정하게 빛나는 어둠이 서슬 퍼렇게 날을 세운다. 나는 한기가 묻어나올 것 같은 그 어둠을 눈을 똑똑히 뜨고 바라보았다. 작업실에 있을 땐 안개가 낀 듯 뿌옇게 흐렸던 머릿속이 말끔하게 닦아졌지만 어쩐지 곡은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멀찍이서 풀벌레 우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가 바람 소리 같은 것도 들렸다가 다이치의 깊은 숨소리가 섞여 들리기도 했다. 직업 때문인지 유난히 청각이 또렷한지라 나는 잠을 뒤척였다. 한숨도 잘 수 없는 그 와중에 나는 내일 점심엔 탄탄멘을 시켜 먹어야 겠다는 결심을 했다. 국민가요라고 칭송받는 대히트곡의 작곡가가 이런 생각을 하며 잠든 다는 건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
점심 때 들이닥친 라멘을 보며 욕실 청소를 하던 다이치가 팔을 걷고 나선다. 다이치가 랩핑 된 라멘을 받아 주고 계산할 동안 나는 부은 눈으로 핸드폰을 손에 쥐고 주문 전화를 했던 그 자세로 침대에서 몸을 비비적댔다. 탄탄멘 하나에 쇼유라멘 하나 그리고 교자에 가라아게까지 따라온 푸짐한 점심상에 주문한 나보다 점심하는데 일손을 던 다이치가 더 좋아했다.
“엑, 이 집 교자 왜 홀수야.”
“너 다 먹어, 난 가라아게 먹을 거야.”
배를 긁으며 다이치가 바리바리 가져다 나른 음식이 가득한 식탁 앞에 앉는데 다이치가 차곡차곡 포갰던 그릇을 내려놓더니 랩포장을 벗기기 시작한다. 음, 그러고 보니 둘이서 배달을 시켜 먹은 기억이 까마득하다.
“너 원래 교자 좋아하지 않았어?”
한참 연애 할 때 서로 하나라도 더 먹을 거라고 싸운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가라아게도 좋아해.”
그러더니 뜨거운 탄탄멘 그릇에 손을 조심조심 가져가며 랩 포장을 벗겨낸다. 나는 입이 찢어져라 하품하며 라멘집 이름이 크게 적힌 나무젓가락의 포장을 뜯었다. 다이치가 포장을 벗겨낸 탄탄멘 그릇이 내 앞에 놓인다.
“그래도 라멘엔 교자지.”
그 교자 포장을 뜯어낸 다이치가 그릇을 내 앞에 내민다. 그리곤 소스 포장을 뜯고 가라아게 포장을 뜯는다. 제일 마지막으로 뜯는 건 쇼유라멘.
“맛있겠다.”
아이처럼 즐거워하는 얼굴로 쇼유라멘을 이만큼 집은 다이치가 후루룩 소리를 내가며 열심히 라멘을 먹는다. 나는 붓기가 덜 가라앉은 눈으로 탄탄멘 국물을 열심히 마셨다. 스물일곱 살 남정네 둘의 점심식사는 이런 식이다.
다 먹고 난 그릇을 현관 앞에 내고 들어오니 다이치는 다시 욕실 청소 마무리를 하기 위해 청소용 고무장갑을 낀다. 내가 방정맞게 트림이나 하며 개그 프로 재방송을 볼 동안 두어 평 남짓한 화장실을 열심히 청소하며 다이치는 땀을 흘린다. 기껏해야 몸 씻고 똥 싸는 손바닥만한 화장실에서 왜 저렇게 깔끔이고 유난인지 난 이해를 못하고 그런 이해 못하는 나를 다이치는 이해 못한다. 연애한지 이제 구년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는 게 많다. 처음에는 화를 내며 싸웠었다. 그럴 기력이라도 있던 아주 젊고 싱싱한 나이었다. 지금은 그냥 한숨만 한 번 쉬고 만다. 언성을 높일 기력으로 나는 곡을 뽑아내는데 열중했고 다이치는 그걸 받아줄 힘으로 자기 일을 한다. 욕실 청소든 활자들을 나열하는 책표지를 디자인 하는 일이든.
“작업은 잘 되가?”
욕실 청소를 하느라 흠뻑 젖은 티를 갈아입은 다이치가 조금 젖은 머리카락 끝을 수건으로 가볍게 털며 내 옆에 털레털레 와서 앉는다.
“죽겠어.”
영 안 나오네. 심드렁한 목소리로 죽을 타령을 하는 나를 보고 다이치가 멍청아, 하고 작게 중얼거린다.
“며칠 내로 뽑아야 된다며 핏대 세울 땐 언제구?”
“아 몰라몰라. 씨알도 안 먹히는 바가지 좀 긁지 마.”
“얼씨구.”
“절씨구.”
“지화자.”
“지화자는 무슨.”
쓸데없는 농담으로 기운 빼긴 싫은데 이노무 천부적인 음악 감성 때문에 나도 모르게 흥을 돋우고 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난 단 한 번도 내가 지은 노래를 제대로 불러본 적이 없다. 쓸데없이 민망함만 넘쳐서 노래방에서 한 번도 불러본 적이 없다. 내가 쓴 곡이 처음으로 노래방에 나왔을 때는 감격에 말도 못하는 날 위해서 다이치가 그 옛날처럼 내 노래를 불러줬다. 그 노래는 원래 다이치가 불렀어야 하는 노래다. 녹음까지 다 마친 노래는 다이치가 아닌 다른 딴따라 신인 가수의 데뷔곡이 되었다. 그렇지만 다이치는 마치 자기 노래인 마냥 완벽하게 불러주었다. 그런 다이치의 노래를 들으며 나는 울었던가 웃었던가.
“영, 안살아 주시네.”
“그 분이 안 오셔?”
“엉.”
큭큭 하고 웃어댄 다이치가 내 쪽으로 고갤 기댄다. 욕실 청소 한다고 땀을 한바가지나 흘렸던데 샤워를 했는지 뭣을 했는지 몸에선 시원한 시트러스 계열의 향이 난다. 특이한 신첼세.
“캔슬하고 나랑 놀자.”
“밥숟가락 놓고 싶냐.”
“아니.”
“둘 다 손 놓으면 누가 돈 벌어와.”
“나도 돈 벌거든?”
존심을 건드렸는지 퉁명한 목소리로 대답한 다이치가 짓궂게 고갤 힘주어 콱 기댄다. 다 큰 남정네 둘만 사는 집에 여성부터 아동까지 다양한 대상으로 하는 형형색색의 디자인인 책들이 줄지어 꽂혀 있다는 건 어찌 보면 아이러니한 일이다. 매콤한 탄탄멘 국물 덕분에 입가심으로 씹은 껌이 단물이 죄 빠져 느물거린다. 이걸 뱉을까 삼킬까 계속 씹을까 쓸데없는 고민을 했다. 그러다가 내가 왜 이렇게 쓸데없는 고민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고민을 또 다시 했다. 답도 안 나오는 고민을 하고 있는 게 갑자기 짜증나서 욕지기를 씨부렸다.
“갑자기 웬 발작이야.”
“내 맘이다.”
“안되면 좀 쉬든가.”
“싫어.”
이제껏 작업하면서 이상하게 쉰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같은 소재라도 지금 쓰는 곡과 한 달 뒤에 쓰는 곡의 느낌이 다를 거라는 생각에 나는 매순간 곡에 충실했다. 쉰다는 것은 그 시간에 해당하는 그 감정을 허비한다는 생각에. 그렇다고 날 일벌레라고 생각하진 마시라. 나라고 버튼만 누르면 곡이 튀어나오는 자판기가 아니니.
“그러지 말고…….”
노곤하게 녹아나는 목소리로 말을 꺼낸 다이치가 내 얼굴을 바라본다. 얼결에 눈을 마주쳤는데 스르륵 다이치가 눈을 감아낸다. 아, 그건가. 나는 멍청하게 눈을 꿈뻑이다가 고갤 숙여 입술을 부딪쳤다. 팔년도 넘게 한 연애 중에 우리가 키스를 나눈 시간을 차곡차곡 모으면 얼마쯤 될까. 이년? 삼년? 나는 거의 기계적으로 혀를 움직였다. 거기에 맞추어 따라오는 반응은 매우 교과서같이 일목요연하다. 우리는 공식에 대입이라도 한 듯,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키스를 나누었다.
“출장을 가게 됐어.”
내 어깨에 손을 얹은 채 입술을 떼어낸 다이치가 작게 고해하듯 말을 꺼낸다.
“무슨.”
프리랜서 주제에 출장이야. 무심하게 뱉은 내 말에 다이치가 울듯이 찡그린 표정으로 웃는다.
“지난번에 디자인 맡았던 업체에서 느낌이 좋다고, 잠시……해외에 다녀오는 게 어떻겠냐고 그러더라고. 혼자 가는 게 아니고, 같은 계열사에 여러 사람들이랑 같이 관련 업자들 만나러 가는 거야. 일만 잘 해결 되면 눈이 파란 애들도 내 디자인으로 된 표지의 책을 읽는 날이 오게 될지도 몰라.”
꿈꾸는 표정으로 말을 꺼낸 다이치가 가슴팍에 얼굴을 묻는다. 나는 뜻밖의 통보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서 그저 멍청하게 있었다.
“너 그거 그냥 하는 거 아니었어?”
그러니까 밥벌이, 아니아니 용돈 벌이용으로. 이 말은 그냥 삼켰다. 자존심을 박박 긁다 못해 발기발기 찢고 싶은 마음은 눈꼽만큼도 없었기 때문에.
“이번에 일만 잘 해결 되면 정기적으로 큰일을 맡을지도 몰라. 그럼 그냥 하는 게 아닌 게 되는 거지 뭐.”
“언제 가는데?”
“내일 모레.”
그걸 왜 이제……하고 말이 나오다가 말았다. 가끔 대범한 행동을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생뚱맞은 인간은 아니었던 거 같은데.
“말하려고 했었어. 니가 작업한다고 유난 떨지만 않았으면.”
그러고 보니 요 며칠은 심하게 틀어박혀 있긴 했었다.
“오래 가는 거 아니니까 너무 걱정 하지 마. 일주일 다녀오는 거니까.”
일주일이면 길다고 하기엔 민망하지만 그렇다고 짧다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는 시간이다. 일주일에 한 번 하는 드라마도 한 주 놓치면 이야기가 얼마나 많이 진행 되어 있는데. 겨우 일주일이야. 싱긋 웃은 다이치가 내 허리를 꼭 끌어안는다. 나는 얼결에 다이치의 등을 같이 끌어안았다.
*
그 내일 모레가 되는 날 다이치는 이따만한 트렁크를 질질 끌며 집을 나섰다. 마지막으로 본 모습은 다른 이들이 그렇듯 공항이 되었어야 하는데 우리는 현관이 마지막이었다. 그렇게 된 계기가 뭔고 하면 씨알도 안 먹히는 다이치의 바가지였는데 지 짐 똑바로 다 챙기기에도 여유 없어 보이는 인간이 어찌나 그렇게 잔소리가 많은지. 이거 챙겨라 저거 해야 된다 밥은 어떻게 챙겨먹고 빨래는 저렇게 해라, 결국 참다 참다 소리를 빽 질렀더니 본인도 같이 소릴 빽 질렀다. 어떻게 둘러대서 말하든 결과는 아침 댓바람부터 싸웠다는 거다.
“처참하네.”
쉬는 날이라고 놀러온 오이카와가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지나다니지 않을 정도로 말끔한 부엌을 보며 혀를 끌끌 찬다. 나는 거실에서 널부러져 있다 말고 고개만 빼꼼히 들어 왔냐, 하고 작게 대답했다.
“밥은 먹고 다니냐.”
“잘 처먹고 다니니 걱정 노노해.”
“뭘했길래 그 얌전한 애가 화를 다 내고 나가냐.”
“아 몰라.”
오이카와는 다이치가 데뷔 준비를 할 때 같이 작업 하다가 알게 된 사이인데 같이 작곡을 하다가 가수로 훌렁 데뷔를 해버렸다. 못다 이룬 다이치의 꿈은 내가 이뤄준다며 큰 소리 땅땅 칠 때는 농담인 줄 알고 콧방귀를 팽팽 뀌었는데 진짜 해낸 거다. 신기한 인간. 오이카와의 노래는 술 취해 부르는 것 밖에 들어 본 적이 없어서 설마 가수를 하겠냐 했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 술 취해 꼬부라진 혀로 부른 노래도 제법 근사했다. 그런 정이 하나씩 차곡차곡 쌓여 꽤나 다이치를 이뻐라 했는데 이렇게 다이치랑 싸운 날이면 고민 상담은 늘 내가 먼저 얘한테 하는데, 얘는 늘 다이치 편을 들어준다. 내가 뭐가 모자라다고 정말.
“그만 뒹굴 대고 일어나. 간식 사왔어.”
“아싸.”
질펀하게 퍼진 궁뎅이를 발로 한번 깐 오이카와가 마치 지 집인양 알아서 상을 펴고 두툼하게 무언가가 담긴 종이 봉투를 주섬주섬 편다. 오이카와님 사랑합니다. 진지한 내 말에 오이카와가 도끼눈을 뜨고 종이 봉투에서 뭔갈 꺼내 집어 던진다. 얼굴로 날아오는 주먹만한 걸 탁 받아 들었는데 말캉하게 손에 잡히는 감촉에 갑자기 불안감이 느껴진다.
“뭐야 또 빵이냐!”
“거 참 말 많네. 그냥 닥치고 먹어.”
한 소리 더 지껄이려고 하다가 그냥 에라 모르겠다 싶어서 덥썩 물었는데 아니라 다를까 단 맛이 확 끼쳐온다. 단 걸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데 맨날 집에 올 때 마다 사오는건 순전히 지 취향의 달콤한 빵들이다.
“우린 이런 거 안 먹어.”
“야 여기 엄청 유명한 집이야. 줄서서 사와야 되는 집인걸.”
그러니까 이렇게 속 뒤집어 질 거 같이 단내가 확 끼치는 빵을 누가 먹는다 이 말이냐고.
“작업은 언제 끝나냐.”
결국 그 단내가 펄펄나는 빵은 오이카와 혼자 다 먹었다. 돼지시끼. 이건 그냥 속으로만 생각했다. 뒤처리에 능숙치 못한 남정네 둘이 있어서 그런지 덕지덕지 부스러기가 담긴 봉다리와 냅킨 조각들이 아무렇게나 나뒹군다. 왠지 모르게 어깨가 무거워서 바닥에 벌렁 누웠다.
“몰라 나도.”
“너 전에 내가 땜빵 해준 거 기억하지? 뭐시기 기념일이라고 놀러간답시고 나한테 다 떠넘겼었잖아.”
허허, 내가 그랬던가?
“아 본인이 곡 쓸 줄 알면 본인이 쓰면 되지 않겠냐고.”
“그게 안 된다고 몇 번을 말해 임마.”
이상하게 오이카와는 자기가 부를 노래를 쓰는 재주는 없었다. 마치 내가 쓴 노래를 내가 부르지 못하는 것처럼. 그래서 얘 데뷔곡도 내 노래였다. 그리고 다음 앨범의 타이틀곡을 내놓으라고 지금 닦달하고 있는 거다. 먹지도 못할 단내나는 우유빵을 뇌물로 바쳐가면서.
“쿠로오 작곡가님.”
“됐거든요 토오루씨.”
작업상 쓰는 예명으로 부르니 대번에 심통이 나서 흘겨본다. 다이치가 하면 나름대로 애교스러운 표정인데 저 분이 하시니 저렇게 살벌하실 수가.
“좀 기다려봐.”
“그 기다리란 소리가 도대체 언제부터야.”
“내가 무슨 자판기야? 돈 넣고 버튼 누르면 곡이 튀어나오게?”
“그래도 너 좀 너무하지 않냐? 기다리는 것도 한계가 있지. 뭐야, 뭐가 문젠데. 너 슬럼프야?”
“아니야.”
“아니면 왜 갑자기 배 째라고 버티고 있어?”
“좀 기다려봐.”
“또 그 소리.”
“댁이나 또 그 소리.”
몸을 옆으로 누이며 몰라몰라 하며 손사래를 치니 어김없이 발길질이 날아온다. 어김없이 배 째라 심정이 되어서 바닥에 눌러 붙은 듯이 느물거렸다. 그러게, 뭐가 나올게 있다고 지금 내가 이렇게 버티고 있는 거람. 진작에 곡 써다 던져 줬으면 단내나는 우유빵따위 먹지 않았어도 됐잖아.
억울해서 작업실에 틀어박혔다. 아니, 사실은 딱히 할 게 없어서 작업실에 틀어박혔다. 실컷 구박만 하다가 자릴 털고 일어난 오이카와가 결국 뒷정리를 안 하고 가서 코가 간지러울 정도로 단내 강렬한 빵 봉지는 내가 다 치웠다. 내 나름대로 정리를 하고 나서 티비를 틀었는데 재밌는 건 개미 콧구멍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또 바닥에 눌러 붙어서 비비적대다가 결국 늘 하던 대로 작업실로 고고씽 했다. 밥은 먹고 살아야지, 읏쌰. 그렇게 파이팅 하며 의자에 앉았는데 또 머릿속이 텅 비고 만다. 벌써 며칠 짼지 모르겠다. 원래부터 척하면 탁하고 뽑아져 나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까지 반응이 없긴 처음이었다. 내 영감도 이제 기력을 다한 모양인가 싶다가 쓸데없는 생각이라 고개를 휘휘 저었다. 주제도 분위기도 하나도 감이 오지 않아서 그저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았다. 천장 무늬를 의미 없이 세어대다가 그 속에서 의미를 찾아내려 애썼다. 하다못해 뒤꽁지가 이빨자국으로 구겨진 연필에서라도 영감을 얻으려 했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 거기서 영감을 얻는 사람이야 말로 진짜 천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미동 하나 없는 잔잔한 수면 같은 머릿속에 조금이라도 파동 같은 것을 일으키려 애를 써 봐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고작해야 아까 먹은 우유빵이 다다. 그렇다고 내가 쓸데없이 단 우유빵으로 노래를 쓸 수 도 없는 노릇 아닌가. 말간 빛의 스탠드 밑에서 나는 시간과 인력을 낭비해가며 낙서를 해댔다. 의미 없는 그림 같은 걸 그렸다가 작대기 인간도 그렸다가 좋아하는 개그맨 얼굴을 그리다가 코 근처에 있는 왕점의 위치가 기억이 잘 안 나서 직직 그어버렸다. 막막하다.
“이 인간은 뭘 하구 있누…….”
서방이 새벽까지 작업하고 있으면 커피라도 한 잔 대령해 줄 것이지. 나는 괜히 궁시렁 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 문을 빼꼼히 열었다. 얼마나 깊게 자기에 숨소리 하나 안 내고 자나 싶었는데 반쯤 연 문 사이로 보이는 침대는 황량했다.
“…….”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의 난 조금 바보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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