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다이] 터닝포인트 中
쿠로오 테츠로 X 사와무라 다이치
* 과거 연성을 리네이밍 한 단편입니다.
이튿날 아침은 굶었다. 새벽까지 작업실에 틀어박혀 되도 안하는 낙서를 해대느라 늦게 잠이 들어 늦잠을 자서 때를 놓쳤다고 하는 게 더 맞겠다. 불편한 자세로 책상에 엎어져서 잤더니 목이 뻐근하다. 나는 어김없이 퉁퉁 부은 눈으로 거실 창문에 붙어 섰다. 뾰족하게 깨뜨려 놓은 듯한 햇살에 눈이 부셔 눈을 찡그렸다. 아침을 먹기도, 점심을 먹기도 애매한 시간에 일어나니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평소 이 시간 같으면 라디오를 들으며 점심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 다이치가 있었다. 나는 여전히 사람 손이 닿지 않아 말끔한 부엌을 힐끔 쳐다보았다. 나름대로 연애 초기에는 종종 저기 서서 같이 음식도 하곤 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작은 맨션에서 매달 집세 걱정하며 살다가 나름대로 둘이 같이 돈을 벌고 인세 들어오는 걸 꼬박꼬박 모으다 보니 어느 샌가 우리의 집을 마련할 돈이 생겼다. 크진 않았지만 둘이 살기에는 충분했다. 침실을 제외하고 남은 공간은 개조해서 서로의 작업공간으로 사용했다. 그리곤 음식 하길 좋아하는 다이치를 위해 주방을 정성껏 꾸몄다. 그 땐 비린내 나는 오백 원어치 콩나물을 다듬는 일을 해도 충분히 재밌고 행복했었다. 그 땐 그랬지. 나도 모르게 한숨 같은 웃음을 지었다. 언제 부턴지 주방에 출입하는 건 다이치 혼자뿐이었다. 내가 뭐 구시대 남자도 아닌데 왜 스스로 주방 출입을 금하고 있는지 나도 모를 일이었다.
[음식 못해서 하기 싫다며?]
[그래도…… 내가 도와 줄 수 있는 건 도와 줘야지.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말이 있잖아.]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그냥 티비 봐.]
[괜찮아. 이 정도는.]
심지어 수저 하나 놓는 것도 니가 하니 내가 하니 실랑이를 벌이던 때였다. 지금 생각하니 진짜 웃음 밖에 나오지 않는다. 부엌에 놓인 작은 라디오를 켜니 익숙한 목소리의 디제이가 사연을 읽어준다. 나는 아무것도 차려지지 않은 식탁 앞에 가만히 앉아 라디오를 들었다. 멘트의 화제는 시청자의 사연이 되었다가 오늘 점심 추천 메뉴가 되었다가 뉴스를 재미있게 설명해주기도 했다. 나는 평소에는 제대로 듣지도 않았던 라디오를 꼼꼼히 경청했다. 그렇게 오후로 향하는 시간은 평소보다 더뎠다. 정신없이 작업을 하다 보면 며칠씩 몰두하는 경우가 생기는데 정신 차려보면 이틀씩 지나있고 그런다. 차라리 뭐에 하나 정신없이 몰두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오늘 점심은 어떻게 하지, 작업은 언제 마무리하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저 혼자 꽥꽥 떠들어 대던 라디오가 내일 방송을 기약하는 디제이 멘트를 내뱉는다. 퍼뜩 시계를 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한 시간 씩이나 생각을 했는데 아무것도 결론지어진 게 없었다. 하다못해 오늘 점심 반찬 까지도.
결코 지금 다이치가 없다고 해서 내가 이렇게 축 늘어져 있는 게 아니다. 어제 싸운게 마음에 걸려서 그러는 것도 아니다. 아니 그럼 도대체 내가 왜 이러고 있냐고 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봐도 아까부터 대답이 안 나온다. 아까부터? 사실 한참이나 나는 결론 나지 않는 상념 속에서 허덕거리고 있었다. 꽤나 긴 시간인 며칠 동안. 그 것 때문에 한참이나 작업도 못하고 괜히 다이치랑 아침부터 언성을 높이고 단내나는 우유빵에 신경질을 냈다. 먼지만 간간이 앉아있는 식탁 위에 엎드렸다.
[너 슬럼프야?]
그래 맞다 슬럼프. 처음 겪어봐서 몰랐는데 그 망할 놈의 슬럼프가 맞는 거 같다. 난 식탁 앞에서 얻은 엄청난 깨달음을 얻은 도인처럼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어느 날 갑자기 신의 계시를 받은 것처럼 인연도 없던 음악을 시작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는 이제껏 폭주기관차처럼 앞만 보고 달려왔다. 그게 벌써 십년이다. 대학도 당연히 관련학과로 갔으니까 곡 쓰고 곡 평가 하는 거 말고는 다른 건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 늘 곡 쓰는 게 습관이고 생활이었는데 그걸 아예 시작도 안 한 것처럼 턱 하고 막혀버리니 무얼 해야 할지 갑자기 무섭도록 막막해 진다. 마치 수족을 잃은 마냥 나는 무기력하게 있었다. 고갤 설레설레 저으며 작업실로 본능처럼 발걸음을 옮겼는데 작업실 손잡이를 손에 쥐는 순간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입술을 꾹 깨물며 두터운 문을 힘겹게 밀었는데 전쟁판같이 난리가 난 작업실을 보니 기운이 빠진다. 필사적으로 작업에 매달렸을 때는 보이지도 않았는데 나는 도대체 어떻게 이런 데서 일을 하려고 각을 잡고 있을 수 있었단 말인가. 내 자신의 경이로움에 박수를 보낸다. 귀신 나올 듯한 이 어마어마한 책상 앞에서 나는 흠 하고 한숨을 쉬었다.
[꼭 이런 식으로 예술가인 티를 내야겠어? 망친 악보 구겨 던지고 밤을 새는 몰골을 하면서?]
이런 식으로 쌓이기 전에 다이치가 일일이 치워줬던 책상이었다. 작업실이 지저분할 수가 없었다. 손바닥만한 화장실 청소에도 죽어라 매달리는 사와무라 다이치가 작업실을 그냥 넘길 수 있을 리가. 잔소리가 늘 귀찮아서 귀를 콱 틀어막고 있으면 보이지 않게 정돈을 하고 조심스레 자리를 비켜주곤 했었다. 나는 너저분한 책상 앞을 서성였다. 발끝에는 구겨서 던져낸 종이뭉치들이 사정없이 채였다.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지저분한 책상을 천천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제멋대로 뽑아서 펼쳐보고 팽개쳐 두었던 책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종이류는 모으고 버릴 건 여기에 모으고 펜들은 연필꽂이에 꽂아두고. 이런 게 청소의 법칙이야. 다이치가 아주 오래 전 가르쳐 준 그 청소의 법칙이라는 것에 따라 하나씩 정돈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머릴 굴리다 보면 혹시 여기서라도 뭔가 반짝하고 떠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과 함께. 제법 긴 시간을 끙끙 거리며 애를 썼는데 한 발짝 떨어져서 보니 어째 정리한 티도 안 난다. 허무하게시리. 갑자기 나는 벼락같이 커피가 땡겼다. 작업 중에 늘 다이치가 가져다주던 커피가. 하지만 지금은 다이치가 없다. 지금쯤 혀가 꼬부러지는 말을 해가며 이리저리 관광이나 다니고 있겠지. 나는 처음 겪는 슬럼프에 이렇게 혼란스러워 하고 있는데.
괜히 신경질이 나서 정리될 기미도 보이지 않는 책상을 발로 퍽 걷어찼다. 그러자 발끝에서부터 지잉 하고 고통이 스물스물 올라오는데 책상은 꿈쩍도 안한다. 괜히 억울하다. 배는 고프고 방은 난잡하고 머릿속은 혼란스러운데 이 모든게 억울하고 화가 난다. 어떤 감정이든 나는 그걸 곡으로 써댔다. 그런 식으로 밖에 표현할 줄을 몰랐다. 어린 나이에는 그게 옳은 줄 알았다. 그건 제법 폼 나고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희로애락을 음악에 담고 기쁨을 극대화 시키고 슬픔을 해소 하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늘 내 직업에 자부심을 가지고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도대체 뭐람. 머릿속에서 쓸데없는 것들이 이리저리 맴돌다가 머릿속을 깔끔히 비워내고는 메슥거리듯 이상한 것들이 어지러지면서 판단력 같은 것을 흐리게 만든다. 말로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이런 걸 음악으로 표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주저앉아서 아픈 발가락을 매만졌다. 그래 슬럼프라는 걸 깨달은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다. 정말 대단한 일인데, 그래서 뭘 어쩌라고. 지금 내가 뭘 어쩔 수 있는데. 갑자기 화가 울컥 치솟아 올랐다. 빨갛게 물든 발끝마저 날 비웃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화를 삭히기 위해 어깰 들썩이며 씨근거리고 있는데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어두었던 핸드폰이 웅-하고 진동음을 낸다. 발신자를 확인하니 오이카와다.
“왜.”
- 왜는 무슨 왜야. 잘하고 있나 싶어 전화했지.
“잘 안하고 있어, 끊어.”
- 잘 안하고 있다는 게 뭔 뻔치로 이렇게 당당하게 전활 받냐.
“아 몰라.”
- 니가 모르면 누가 아냐.
“말장난 할 기분 아니야, 끊어.”
- 무슨 일 있어?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어김없이 일 얘기가 먼저 튀어나온다. 민감하게 굴기 싫은데 지금 내 상황에서 말이 곱게 튀어나올 리가 없었다.
- 다이치가 밥 안 해주고 도망가서 그렇냐?
“그 얘기가 왜 나와.”
- 아니면 뭔데, 왜 다짜고짜 신경질 내고 지랄이야.
“아 몰라 끊어!!!!!”
버럭 소릴 지르며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신경질 나서 핸드폰을 집어던지려고 이만큼 들었다가 아직 할부도 안 끝나서 소심하게 던지는 시늉만 했다. 그러다가 이런 내 소심함까지 화가 나서 괜히 소릴 꽥꽥 질렀다. 작업 하느라 방음 시설이 잘 되어 있는 방인지라 주민 신고 들어올 일도 없어서 나는 모처럼 원 없이 소릴 바락바락 질렀다. 꼴이 영락없이 미친놈이라 이쯤 하고 멈춰야 하는 걸 아는데 그게 잘 안 된다. 뭐 어떤가, 난 슬럼프에다가 지금은 애인도 없이 혼자 있으니까 좀 미쳐도 괜찮다.
*
시간이 쓸데없이 게으름을 피우며 지나간다. 할 게 사라져 버리니 하루가 서른 시간은 되는 것 같다. 멍하니 공상에 잠겼다가 황량한 거실에 누워서 베란다로 천천히 떨어지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그 절경을 보며 감탄했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너무 예뻐서 음으로, 가사로 쓰기 바빴을 예전과 다르게 나는 또각또각 흘러가는 시계소리만 듣고 있었다. 확실히 혼자보기 아까운 절경이긴 하다. 며칠 같은 몇 분 동안 나는 서서히 하루를 마감하고 있는 태양을 보았다. 저렇게 죽어가는 태양을 보며 덩달아 지하로 삼백 미터는 땅 파고 들어갈 기세로 삽질을 해댔다. 저 해는 저렇게 숨지고 나면 그 뒤론 무엇을 할까. 낮 동안 몸을 태워 빛을 내고 저렇게 기울면 사람들은 밤에 취해 잊고 마는데. 사람들이 자신을 잊고 있는 그 반나절 동안 태양은 땅 속에서 숨어서 무얼 하고 있는 걸까. 사람들처럼 이불을 덮고 곤히 자고 있을지도 몰라. 이런 유아적이고 유치한 발상은 실로 오랜만에 해보는 것이라서 나는 의미 없이 헛웃음을 지었다. 사실 태양이 땅속으로 숨고 나면 그 지구 반대편을 지치지도 않고 밝히고 있을 거라는 건 초등학생도 다 아는 사실이다. 얼마전까지 동화책을 읽어대던 누군가의 영향일 것이다.
무슨 생각으로 시작했을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어느 날 갑자기 다이치가 책 표지 디자인을 하기 시작했을 때엔 난 묘하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팔자에도 없었던 타블렛를 쥐고 마치 아이가 장난쳐놓은 마냥 이리 삐뚤 저리 삐뚤 어색한 코끼리를 그리고 나서 환하게 웃던 다이치의 얼굴이 아직도 선명하다. 동화책 표지를 맡은 날엔 병아리가 쏟아졌고 로맨스 소설 표지를 맡은 날엔 애정이 퐁퐁 솟아나는 달짝지근한 디자인이 나왔다. 난 아무리 봐도 정체 모를 도형의 나열일 뿐인데 다이치는 마치 대단한 일이라도 한 듯 뿌듯한 표정을 짓곤 했다. 그렇게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게 이상하게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그림이라고는 생전 그려본 적이 없는데다 심지어 실력이 그렇게 좋은 편도 아니었지만 왠지 다이치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디자이너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은 이상한 믿음이 생겼다. 실력이 뛰어나지 않으면 뭐 어떤가. 많은 이야기를 누구보다도 더 가슴 깊이 이해하는 사람인데. 원래도 그렇게 독서를 좋아했는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다이치는 종종 저 혼자 몇 시간씩 쌓아놓고 책을 읽다가도 좋은 게 있으면 꼭 날 앉혀놓고 읽어주곤 했었다. 동화책을 읽을 땐 구연동화를 하는 사람처럼 조곤조곤 예쁜 제스처를 섞어 가면서, 그 구연이 끝나기도 전에 내가 자빠뜨려 버린 게 허다할 정도로 사랑스럽게 말이다. 하지만 그 느낌이 말끔히 가실 정도로 굉장히 오래 된 일이다. 그게 몇 년 전이었지? 곰곰이 생각해 봐도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정말 오래 된 일이라서 나는 잠시 당황했다. 그 땐 분명히 좋았었다. 사랑이 끓어 넘친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땐 그랬었다고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 느낌이 정말 말끔히 가신 지금은 그 사실이 있었는지 의심이 될 지경이다. 가슴 설레고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 그런 달콤한 감정이 언제까지였지? 순간 나는 발작적으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이미 어둠이 내린 거실은 간간히 다른 건물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으로 물건들의 실루엣을 나직하게 그리고 있었다. 언제까지라고 묻는 내 자신에게 순간 경멸을 느꼈다. 순간 우리의 모든 관계가 뎅겅 잘려나간 느낌이 들어 머리가 멍해진다. 가만히 앉아 있는데 이상하게 숨이 차올라서 나는 숨을 크게 들이 쉬었다. 분명 우린 끝나지 않았는데 심장이 콩닥거리질 않는다. 그 예전처럼 생각만 해도 설레고 가슴 벅찬 그 감정이 누군가 송두리 째 앗아간 듯하다. 언제부터일까. 재빨리 머릴 굴려 곰곰이 되뇌었다. 그러다가 허탈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끝나버린 사이처럼 단정 짓는 내 사고에 소름이 오골오골 돋는다.
..우리가 왜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
“처참하네.”
오늘도 할 일 없어 놀러온 오이카와가 식상한 대사를 내뱉으며 혀를 끌끌 찬다. 바닥에 들러붙은 채로 고개만 슬쩍 들어 눈인사만 까딱 했다.
“어서옵셩.”
“오냐, 이 식충이 같은 놈아.”
모시라?
“디비디 빌려왔어.”
미간을 구기려하는 찰나에 내밀어지는 시커먼 봉지에 오만 신경이 죄다 쏠렸다. 가끔 이렇게 이쁜 짓 하니까 내가 봐주는 거지. 결단코 내가 봐주는 거다.
어느덧 다이치가 떠난 지도 삼일 째 되는 날이다. 집안 꼴은 엉망이고 그 동안 제대로 끼니를 챙겨먹은 적도 없었다. 나는 답답한 공기에 한숨을 푹 쉬었다. 내 집이지만 진짜 도망가고 싶을 정도. 청소는 해본 적도 없고 바깥 밥은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요 모양 요 꼴이다.
“밥은 먹고 사는 거야?”
거지소굴 같은 집에 비해 비교적 깨끗한 주방을 훑어보던 오이카와가 식충이 같다고 할 땐 언제고 제법 걱정 같은 걸 해준다. 별로 고마운 걱정은 아니지만.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제법 걱정스럽게 본 오이카와가 제가 알아서 뚝딱뚝딱 디비디를 켜더니 알아서 주전부리를 부랴부랴 펴댄다. 아무리 집에서 보는 거라고 해도 분위기 확실하게 낼 셈 이었는지 맥주와 나쵸칩까지.
“이 형아가 아주 기막힌 걸로 빌려왔지. 예술적 영감을 얻기엔 아무래도 영화 밖에 없어.”
암 그렇고말고. 자기 혼자 만족한 채 고갤 끄덕끄덕한 오이카와가 이젠 조작이 익숙한지 나도 잘 다루지 못하는 버튼 많은 리모컨을 이리저리 눌러댄다. 나름대로 웅장한 소리와 함께 뜨는 오프닝 시그널을 바닥에 들러붙은 채 멍하니 보고 있는데 이 놈이 기어이 날 일으켜 앉힌다.
“그렇게 귀신같은 꼴로 퍼져 있지 말고 좀 보란 말이야.”
“어.”
“넌 사람 성의를 좀 생각해라 이눔 자식아.”
“어.”
툴툴 거리는 등 뒤로 무성의 하게 대답을 뱉었더니 얼러 보려던 의지를 싹 거둔 오이카와가 대뜸 노려보려고 폼을 잡는다. 그 기세에 져주듯 자세를 잡고 보는 척이라도 해주기 위해 브라운관을 보는데, 아뿔싸 외화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외화. 자막 읽기 귀찮은데...하고 중얼거렸지만 제법 빵빵한 사운드에 묻혀 내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못 들은 척 하는 걸지도.
영화를 그렇게 좋아하는 편도 아니지만 외화는 더더군다나 싫어해서 다이치랑 데이트 할 때 애를 먹은 적이 있었는데 다이치가 일본에 개봉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던 유명한 외화 때문이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그걸 꼭 봐야겠다는 다이치와 땅이 꺼져도 외화만은 못 보겠다는 내가 영화관 앞에서 세 시간 동안 말다툼을 해댄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그럼 각자 따로 보자고 했던 다이치와 그럼 이게 무슨 데이트냐며 화를 낸 내가 결국 선택한 것은 룸카페로 향하는 것이었다. 다행이 유명외화라 일찍 VOD 서비스를 시작한 덕분에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자막 읽기를 귀찮아하는 나를 위해 다이치는 두 시간 반짜리의 길고 긴 영화가 끝날 때 까지 내 귓가에 대고 제법 실감나게 자막을 속삭여 주었다. 귀찮다는 듯 어쩔 수 없이 굴면서도 본인이 더 신난 것 같았다. 그 뒤로 부턴 외화가 더더욱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어쩌다 선택한 영화가 외화였다면 다이치는 어김없이 내 귓가에 대고 대사를 읊어주었다. 한 번씩 대사가 필요 없는 야릇한 씬이 나올 때엔 아주 실감나게 귓가에 대고 아주 음담패설을 읊어대기도 했지만.
그렇게 영화 하나에도 서로에게 열정을 다 하던 때가 우리에게도 분명하게 있었다.
“너는 사랑의 유효기간이 얼만큼이라고 생각해?”
“갑자기 무슨 소리야.”
주의 깊게 보지 않아서 내용도 모르는 외화에 집중하던 오이카와가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는 둥 쳐다본다. 나는 가만히 발끝을 바라보았다.
“사랑에도 유효간이 있을 거야. 하다못해 이 나쵸도 유효기간이 있는데 사랑이라고 없을 리가 있어?”
“영화나 보시지.”
콧방귀를 팽하고 뀐 오이카와가 다시 영화에 집중한다. 이미 절반 이상 지나간 영화에는 흥미가 떨어져서 꾸역꾸역 나쵸칩을 집어먹었다. 바작바작 부서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자 영화에 몰입하던 오이카와가 괜히 짜증 섞인 표정으로 날 힐끔 본다.
“시끄러.”
“영화나 보시지.”
이번엔 내가 콧방귀를 팽하고 뀌자 오이카와가 발꾸락으로 내 허리를 푹 찌른다. 나는 맥아리 없이 픽 쓰러졌다가 궁뎅이를 발로 퍽퍽 깠다. 둘 다 영화에서 시선을 떼고 당분간 몸싸움을 했다. 다 큰 남정네 둘답게 제법 둔탁한 소리들이 났는데 며칠 동안 피죽도 못 먹은 내가 먼저 항복을 청한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밥 제대로 먹고 한판 뜨면 내가 이긴다. 진짜다- 한참 거실에서 그러고 있는데 갑자기 빠방한 사운드로 틀어놨던 영화에서 습윤하고 끈적거리는 여자의 음성이 흘러나와 우리는 바닥에서 뒹굴다가 동시에 티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더헙. 아까 까지만 해도 시크 하던 가슴 졸라 빵빵한 여배우가 갑자기 남자배우랑 얽히더니 옷을 훌훌 벗고 한 마리 짐승이 되어 폭주하기 시작한다. 아 야한 영화였으면 진작 말을 해야지!!!
“너 때문에 놓쳤잖아!!!”
“누가 그러게 먼저 시비 걸래?!”
이걸 노리고 보기 시작한 영화인지 오이카와가 대번에 소릴 꽥 지른다. 나 때문에 놓친 건가, 지가 시작한 거지. 우린 2차 전쟁을 발발하려다 말고 점점 농도 짙어지는 영화 속의 은밀한 애정행각에 본능적으로 시선을 주고는 집중하기 시작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감각이 풍부한 예술 하는 사람들이라지만 가끔은 이렇게 단순 무식 할 때가 있어서 좋다. 난장판에 뭉개진 나초칩에 잠시 애도의 표정을 짓고 있으려니 덤덤한 목소리가 툭 떨어진다.
“끝났어?”
“....”
“유효기간이.”
저렇게 물으면 할 말은 없다. 과연 누구 마음대로 그 유효기간이라는 것을 정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 차라리 그렇게 도장 찍히듯 선명하게라도 새겨졌으면 좋겠다. 너희 사랑은 여기까지노라고. 그 유효기간을 알면 썩어나가기 전에 처리라도 할 수 있으니까. 얼른 먹어치우든, 나누어 주든, 다른 것들이 상하기 전에 버리든. 하물며 음식 따위도 그럴 수 있는데 그 보다 더 위대한 사랑이란 것은 현명하게 처리 할 수도 없게 분명한 경계선이 없지 않은가. 그래서 난 지금 주저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게 유효기간이 지난 것인가, 아니면 아직 유효기간이 한참 남은 참치캔처럼 밀봉 되어 있는 건 아닌가, 그게 헷갈려서.
“유효기간이 정말 있다고 생각해?”
“......”
만약에 삼년도 더 남은 참치캔이라면 그 누가 버릴 수 있겠느냐 이 말이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난 잘 모르겠어.”
“근데 왜 갑자기 생각하게 됐는데?”
“글쎄..”
“......”
“왜 일까.”
휑하니 열려 있는 침실 문 사이로 말끔한 침대가 보인다. 태초부터 누구도 눕지 않았었던 마냥 깔끔하다. 나 자신도 언제부터인가 묻기 시작했던 질문을 남에게서 들으니 기분이 이상하다. 난 왜 갑자기 사랑의 유효기간에 대해서 의심을 품고 궁금해 하기 시작한 걸까. 왜 갑자기 생각하게 되었는지 이유를 알지도 못하면서. 콧잔등이 시큰거린다. 황량한 겨울바람이 잔뜩 가슴 속으로 저민다. 이유를 모른다는 것은 상당히 괴로운 것이다.
“구년이야. 되게 오래 됐지.”
“그러게.”
“이젠, 끝날 만도 해.”
응, 그래. 고갤 끄덕였다. 그래, 유효기간이 있다면 그게 끝날 만도 하다. 아무리 꽁꽁 밀봉해 놓은 것도 언젠가는 썩게 마련.
“오래 되었다고 해서 다 끝난다는 건 모순이야.”
“......”
“그럼 몇 십 년씩 같이 사는 부부들은 그럼 뭐가 되는 거냐.”
“이건 연애고 그건 결혼이야.”
“그래서, 니네가 결혼씩이나 하시게?”
“.....”
“너네가 뭘 어쩔 수 있는데. 결혼할거야? 구청 가서 혼인신고 하고 룰루랄라 신나게 살 거야? 백년해로 하자,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 까지 살자, 드레스 입고 식이라도 올릴 거냐고.”
갑자기 다이치가 드레스 입고 부케를 던지는 상상이 되어서 우스웠지만 나는 차마 웃을 수 없었다.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할 수 있는 그게, 너네한테는 연인이라는 관계잖아.”
“......”
“그런 연인이란 형태에 정해진 유효기간 따위가 있을 리가 없잖아.”
이상하게 화난 표정으로 말을 하는 오이카와를 보면서 나는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실실 웃어버렸다. 눈썹을 이상하게 일그러뜨리며 내 웃음을 이해 못하는 오이카와를 보면서 아주 웃음을 대놓고 터트렸다. 미친놈 같이 뒹구는 내 모습을 보면서 결국 한 소리 한다. 저 미친놈.
“맞아.”
“뭐가, 너 미친놈인 거?”
“유효기간 따위가 있을 리가 없어.”
“......”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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