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다이 60분 전력
쿠로오 테츠로 X 사와무라 다이치
파스냄새가 옅게 섞인 땀냄새가 가득했다. 갓 봄을 넘긴 기온은 살짝 더운 듯 포근했다. 높은 체육관 천장, 시끌벅적한 목소리. 손바닥을 꽉 맞잡아 얽어쥐던 손바닥의 감촉, 웃음기 섞인 정중한 듯하면서도 지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던 목소리. 십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가끔씩 벼락같이 떠오르곤 하는 기억이었다. 오랜 시간을 쌓아오면서 그 언젠가의 기억은 예쁜 추억으로도 슬픈 기억으로도 되새겨지곤 했다. 사와무라는 제 앞에 놓인 낡고 잔뜩 스크래치가 난 씨디 케이스의 뚜껑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달각달각 조그만 소리를 내던 손놀림이 삐익---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에 멈칫한다. 몇번이나 본지 세는 것도 포기한 영상인데도 그날의 기억에 잠시 정신을 놓고 있으면 꼭 같은 부분에서 놀라버리곤 한다. 잘 부탁합니다!!! 우렁찬 체육계 남고생들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 나오고 잇따라 흘러 나오는 설익은 제 어린 목소리에 푸스스 웃어버리고 만다.
“나 왔어.”
그러다가 제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반쯤 고개를 돌린다. 현관에서 구두를 벗으며 인사를 하곤 제 목에 멘 넥타이를 살짝 당겨 느슨하게 만든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함께 들리는 걸 보면 근처 편의점에서 캔맥주라도 산게 틀림 없었다.
“어서와.”
“엑, 이게 뭐야? 옛날 생각나네.”
부스럭거리는 봉지가 테이블에 놓였다.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자주 가는 편의점 로고가 찍힌 비닐 봉지에 든 맥주와 조금의 주전부리. 사와무라는 소파 중간에 앉았던 몸을 옆으로 옮겨 앉으며 웃었다.
“정리하다가 보니까 있더라고. 옛날 생각나서.”
“화질 봐. 완전 구려.”
킬킬 웃은 쿠로오가 사와무라의 옆에 앉았다. 퇴근해 집에 들어오고 나서 간단하게 몇마디 나누고나면 곧장 옷을 갈아입으러 가는 쿠로오가 바로 앉는 걸 보니 오랜만에 보는 영상에 호기심이 동한게 분명했다. 쿠로오가 보자고 하면 민망하다며 외면하곤 했던 사와무라는 사실 이 연습경기 영상을 혼자서 수십번이고 보곤했다. 그 사실을 알리 없는 쿠로오는 그 사와무라가 먼저 틀었다는 사실이 흥미로운지 신난 기분으로 앉아 제 앞에 놓인 맥주를 꺼냈다. 딸깍, 경쾌한 소리가 들리고 사와무라에게 맥주캔이 내밀어졌다. 사와무라가 받아들면 쿠로오는 다시 허리를 숙여 봉지 안에서 제 몫의 맥주캔을 꺼내들어 뚜껑을 땄다.
“너네 꼬맹이들 괴짜 속공 처음 봤을 때 진짜 놀랐었는데 말이야.”
“지금 봐도 별로 다를건 없지만 지금 생각해도 저 녀석들 정말 무모했었지.”
꼴깍꼴깍 집중한 탓에 천천히 맥주를 마시면서 쿠로오는 화면에 눈을 떼지 못했다. 화면 속의 고등학생들은 배구공을 위로 쳐올리며 꽤나 기합섞인 목소리로 연신 외쳤다. 낯익은 목소리들을 듣고 있으니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졌다. 사와무라와 쿠로오는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취미로 배구공을 들었다. 가끔씩 사와무라는 모교에 찾아가서 후배들의 상담도 해주고 가끔은 연습 상대도 해주곤 했고 그것은 쿠로오도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함께 배구를 한 동료들은 달랐지만 그 때의 추억과 열정은 공유하고 있었다. 그 때 부터 계속 만남을 이어오면서 두 사람은 종종 그 날들의 이야기를 하곤 했다. 첫 연습경기, 도쿄 여름 합숙, 지긋지긋한 패널티들. 쿠로오는 주로 놀리는 목소리였고 그럴 때면 사와무라는 드물게 발끈하곤 했다. 뜨거웠던 여름, 열정 가득했던 코트 같은 것을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뛰었다.
“너 진짜 어리다.”
킬킬 웃으면서 쿠로오가 맥주를 한모금 더 삼킨다. 그런 쿠로오의 목소리에 사와무라는 조금 민망해졌다. 이래서 같이 보기 싫었던 건데. 지금보다 꼭 열살이 어린 화면 속 사와무라는 설익은 얼굴로 열정적이게 코트 위를 뛰어다녔다. 그럼에도 착실한 플레이는 자기 자신이 봐도 조금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단정했다. 밝게 웃고 동료들을 격려하고, 사회에 뒤섞여 이런저런 시간을 보낸 지금의 사와무라는 어린 제 자신이 조금 낯설면서도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그리고 그 맞은 편에서 저와 같은 몫을 하고 있는 어린 쿠로오를 보면 또 다른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맥주캔에 입술을 대다 말고 힐끔, 곁눈질로 옆에 앉은 쿠로오를 보았다. 성인이 된 쿠로오는 그 때 처럼 여전히 부스스한 헤어스타일을 고수하고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유연해지고 부드러워진 얼굴이었다. 언제 이런 얼굴이 되었을까.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제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는 얼굴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조금 모르는 사람 같은 기분이었다. 분명 함께 쌓은 시간이 만든 얼굴일텐데 어째서일까. 고개를 꺾어 제 손에 들린 맥주캔을 깔끔하게 비워낸 쿠로오가 반쯤 캔을 찌그려트리곤 테이블 위에 올려둔다. 그리고 다시 소파에 깊게 몸을 묻으며 사와무라의 등 뒤로 팔을 둘렀다. 언제나의 너무나 자연스러운 행동도 오늘은 조금 간질하고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사와무라는 괜히 긴장해 캔 입구를 앞니로 톡 물었다. 달각, 달각, 잘은 소리에 쿠로오가 몸을 조금 숙여 사와무라가 들고 있는 캔을 가볍게 가져가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리고 돌아오는 몸은 사와무라에게 가까웠다.
“이 상한다.”
여전히 등 뒤에 팔을 두른 채 쿠로오는 남은 손으로 사와무라의 입술 중간을 가만히 문질렀다. 앞니가 나 있을 부분을 엄지로 가볍게 문지른 손가락은 사뿐히 뺨을 쥐었다. 긴장한 어깨가 조금 작게 움츠러 들었다. 쿠로오는 낮게 웃으며 조금 숙인 사와무라의 턱을 가만히 잡아올리곤 입을 맞췄다. 몇번이고 돌려봐서 익숙한 영상의 소리가 귓가에 흘러 들어와 조금 낯설은 기분을 가져왔다. 사와무라는 쿠로오의 입맞춤에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이 되었다. 아마 첫키스 때도 이랬을 것이다. 어색한 자신과는 다르게 쿠로오는 느긋하고 여유롭게 굴어서 조금 화가 났던 것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이끄는 손길과 입맞춤에 조금 정신을 못차리고 있으면 등 뒤에 소파가 닿았다. 팔 안에 사와무라를 안고 자연스럽게 소파에 누운 쿠로오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입을 맞춰왔다. 야하기 짝이 없는 입술이 어설픈 입술을 베어물곤 짓궂게 굴었다. 처음 입을 맞추던 때도 어쩐지 이런 자세였다. 으응, 끙끙대는 목소리가 입술새로 새어나오고 그러면 어김 없이 쿠로오는 흐흥, 가벼운 콧소리를 내며 웃곤 했다. 그 때도, 지금도. 채 삼키지 못한 침 때문에 바튼 기침을 하면 쿠로오는 조금 떨어져 가만히 사와무라를 내려다 보았다. 어렸던 쿠로오는 지금과 꼭 닮았지만 조금 불안정하고 흥분한 날카로운 눈매로 사와무라를 내려다 보았었다. 어린 사와무라는 그런 쿠로오를 달아오른 얼굴로 밀어냈던 것도 같았다. 사와무라는 쿠로오를 밀어내는 대신 숨을 고르며 제 위의 쿠로오가 하는 모습을 올려다 보았다. 느슨한 넥타이에 손가락을 걸어 당긴 쿠로오가 바닥으로 넥타이를 떨어뜨린다. 그 손짓 하나하나에 긴장한 듯 꿀꺽 침을 삼켰다. 쿠로오는 그런 사와무라를 보며 느긋한 듯 웃었다.
“처음엔 긴장해서 울 것 같은 얼굴이더니, 지금은 아주 기대하는 얼굴이잖아 다이치.”
“뭐?”
“옛날엔 할 때 마다 처녀처럼 굴더니 지금은 언제 해주나 기대하는 얼굴이라구.”
“야, 내가 언제.”
“거울이 있으면 보여주고 싶네.”
쿠로오는 혀를 작게 내어 아랫 입술을 핥았다. 느긋한 행동이었지만 쿠로오의 미간이 살짝 접혔다. 여유로운 척 굴면서 다급한 얼굴이었다. 그 때도, 지금도. 맨 셔츠 위로 사와무라는 손을 뻗어 가볍게 쓸어올리며 쿠로오의 목덜미에 팔을 감았다. 여전히 입맞춤에 서툴었지만 쿠로오를 끌어안는 손길은 거침 없었다. 어쩐지 귀찮아질 것 같던 녀석. 쿠로오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했었다. 좋은 아이라고도 생각했었다. 인생에 좋은 사람이 되어 줄 것이라고도 생각했고. 사와무라는 달아오르는 몸을 느끼며 좁은 소파 위에서 다리를 들어 쿠로오의 허리를 무릎 안쪽으로 문질렀다. 왜 옛날 영상을 꺼내선. 조금 자책하며 사와무라는 쿠로오를 좀 더 힘껏 끌어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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