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다이 60분 전력
쿠로오 테츠로 X 사와무라 다이치
언제나처럼 부활동을 하고 대회를 앞두고 연습을 하고 가끔은 만날 약속을 했다. 대략 한달에 두번 정도, 많으면 세번정도. 학생인지라 용돈 문제도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배구에 좀 더 시간을 보내고 싶기도 했다. 언제나처럼의 만날 약속인가 싶어서 응, 하고 젖은 머리를 털며 대답을 또각또각 써내려갔다. 이번주면 13일인가?
"아"
그러고 보니 일요일이 마침 14일이었다. 연인들의 최대 이벤트라고 하는 '그' 발렌타인데이 말이다. 쿠로오랑 사귀고 처음 맞는 연인스러운 기념일이었다. 음, 그러니까 그거잖아 발렌타인데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초콜렛을 건네며 고백하는 날. 제과회사의 상술. 그러고 보니 편의점에 잔뜩 리본이 달리고 핑크색 팝업카드가 즐비했었더랬지.
"근데 사귀는 사이끼리도 챙기는 건가 그런거."
아니 애초에 고민할 것도 없는게 그건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렛을 주는 날인거잖아? 내가 고민 할 필요도 없고. 목에 걸린 수건으로 젖을 머리를 마저 털고는 빨래통에 수건을 툭 던져넣었다. 동시에 부웅- 핸드폰이 울렸다.
[그럼 주말에 만나. 일요일에 돌아가는 차표로 끊어둘게.]
그말인 즉슨 발렌타인데이에도 만난다는.. 뭐 그런거겠지? 쿠로오가 그런 걸 신경쓰는 애는 아닐 것 같지만. 아니 애초에 체육계 남자애들이 그런 핑크핑크한 선물따위 주고 받는거 자체가 좀 부끄럽지 않나? 대놓고 사랑이 넘치는 초콜렛이에요~ 이런 느낌의 선물 말이야. 벅벅 머리를 긁다가 에라이, 하고 몸을 침대로 풀썩 뉘였다. 애초에 '여자'가 '남자'한테 주는 거라니까 그거. 초콜렛.
쿠로오와 만남은 조금 운명적인 그 무언가 같다고 생각했다. 소문으로만 들어왔었던 그랬다더라, 했던 두 학교의 인연이 3학년이 되고서야 갑자기 이어진 건 누가 생각해도 좀 운명적이지 않을까? 그것도 두 사람 다 주장이라는 포지션에서 만나 악수를 하는 순간 그냥 그 순간은 쿠로오도 나도 둘 다 알았을 것이다 우리의 만남이 운명적인 그 무언가를 띄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랬기에 둘 다 미야기와 도쿄라는 거리적 장애따윈 신경쓰지 않았다. 인터하이, 여름 합숙 등을 거치며 배구 파트너로서, 연인으로서 함께 하는데 단 한순간의 망설임도 고민도 없었다. 연애는 평범했지만 즐거웠고 만나고 싶을 때 못 만난다는 건 조금 외로웠지만 상대에 대한 애틋함이 더해져서 행복함이 가득했다. 도쿄로 대학진학을 하기 위해 공부에도 더 집중할 수 있었고. 서로가 알고 있는 운명적인 그 무언가의 관계에서 초콜렛 같은걸 주고 받으면서 새삼스럽게 나 너 좋아하는데~라고 말하는 것도 조금 부끄럽고 쑥스러운 뭐 그런게 있었다.
그래도, 우리 얼마만에 만나는 거였지? 입시 준비가 겹치면서 가만히 손가락을 세어보니 이번 주 만남이 3주만이었다. 그런 시간적 거리감에 조금 감성적이 되어버린 걸지도 몰라 나. 당장이라도 핸드폰을 들어서 물어보고 싶었다. 쿠로오 너 초콜렛 필요해? 내가 준비한거 말이야. 아 진짜.. 이불을 훅 뒤집어 썼다. 연애라는게 하면 할 수록 더 모를 거 같다.
"주면 좋아할 거 같긴 한데."
근데 그거라니까. '여자'가 '남자'한테 주는거.
"근데.. 일단 내가... 그거기도 하고."
그렇지 포지션으로 하면 일단... 내가 밑이니까.
"....준비해야하나?"
그 크고 정갈한 손에 내가 준비한 초콜렛을 받아들고는 활짝 눈을 접어 웃는 쿠로오의 얼굴이 떠올랐다. 벌겋게 얼굴이 달아오른다. 내가 좋아하는 웃는 얼굴이 눈 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주말을 맞이한 광장에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래도 시즌을 앞둬서 그런지 연인의 비중이 꽤 높았다. 사정상 일찍 만난 연인들이 제 나름대로 한아름 선물상자를 안고가기도 했고 여고생들이 꺄꺄 소란을 떨며 형형색색의 초콜렛을 가지고 가기도 했다. 그리고 나도.
"부끄럽네."
"뭐가?"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휙 돌아보니 언제 왔는지 쿠로오가 살짝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한다. 들, 들켰을까? 나도 모르게 어깨에 맨 가방을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그냥 넘어가긴 뭐 해서 간단하게 기분만 낼 생각으로 산 초콜렛이 가방 안 한구석에 꼭꼭 숨겨진채였다.
"아, 아냐. 언제 왔어?"
"방금. 보고 싶었어 다이치."
활짝 웃으며 팔을 벌려 나를 끌어안는다. 푹, 단박에 품에 안기자 미소가 가득 터졌다. 오랜만에 느끼는 체향과 감촉, 그리고 살짝 추운 날씨를 감싸는 따뜻한 체온까지. 나도 등 뒤로 팔을 둘러 가만히 등을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어 나도. 작게 얘기하니 낮게 웃으며 뒷덜미를 만지작거린다.
"그 동안 별일 없었어?"
"응. 별일 없었지. 밥부터 먹으러 갈까?"
으레 가곤하는 정식집으로 가서 꽁치구이 정식을 먹고 디저트로 가볍게 커피를 마시고 늘 그렇듯 평범한 데이트를 했다. 하지만 매번 이 시간이 새롭게 느껴지는 것은 분명 너이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다가 황급히 머리를 털었다. 아, 러브러브 발렌타인 바이러스에 취한게 분명하다 이런 간지러운 생각을 하다니. 갑작스운 내 행동에 쿠로오는 푸하하 웃는다. 나도 그냥 웃어버렸다.
"그러고 보니 나 숙소 예약하려고 했는데 숙소가 다 찼더라고. 괜찮으면 나 오늘 재워줄 수 있어?"
"주말이니까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너무 없더라고."
너무 없을 수 밖에 없잖아. 내일이 발렌타인이니까. 투덜거리며 볼멘소리를 내는 쿠로오가 하는 모양을 보니 내일이 무슨 날인지 전혀 신경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체육계 남자애니까 별로 신경 안 쓰는 것도 당연한가. 그리고 어차피 우리는 남자들이니까. 괜히 부끄러워져서 흠흠 헛기침을 했다.
"부모님한테 미리 말해둘게."
"역시~ 다이치!"
"애초에 나보러 온 사람인데 그렇게 매정하게 길바닥에 버려두진 않을거거든?"
"전에 키스하다가 엉덩이 좀 만졌다고 새벽에 밖으로 내쫓은 사람이 누구더라?"
"그건 부모님이 계실 때 니가 덤벼드니까..!!"
얼굴이 달아오른 나를 보며 와하하 웃던 쿠로오가 내 손을 잡고는 어딘가로 이끈다. 추운 겨울, 아직 일루미네이션이 조금 남은 광장을 걷는다. 곧 봄이 다가오려는 듯 밤공기가 조금 말랑하게 코끝에 닿았다. 아, 어쩐지 초콜렛 냄새가 섞여서 그렇게 느껴지는 걸 수도 있고. 쿠로오는 단지 내 손을 잡고 걷는 것 만으로도 어쩐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된 것 같은 얼굴을 한다. 그 얼굴 앞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저 마음에 가만히 떠오르는 행복감을 고스란히 내비추는 수 밖에.
간단한 야식거리를 사고 부모님께 드릴 쿠키세트를 고른 쿠로오와 함께 골목길을 걸었다. 익숙한 골목길은 주택가라서 늦은 시간엔 꽤 조용했다. 졸업과 함께 이 골목길을 걷는 것도 곧 졸업할 것이다. 후반부에 성적이 나쁘지 않았으니 도쿄의 대학을 조금 노려봐도 괜찮지 않을까 뭐 그런 쑥스러운 생각을 했다.
"나 도쿄에 가면 우리 더 자주 볼 수 있겠지."
"흠, 쿠로오씨가 그렇게 한가하지 않아서 말이에요."
"...하긴 나도 새내기 되서 사람들 사귀고 다니다 보면 시간 많이 못 낼테지만."
"괜찮아요~ 쿠로오씨는 관대하니까~"
안 괜찮은거 얼굴에 다 보이거든.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삐죽이던 입술을 금세 끌어올려 웃는 시늉을 한다. 정작 도쿄에 가면 내가 외로워질 것만 같은데 이런 내 마음을 알고는 있는건지. 목에 둘렀던 머플러에 가만히 얼굴을 묻었다. 어쩐지 부끄러워졌다. 그러니까 이제껏 살아오면서 한번도 신경쓴적 없던 제과회사의 상술에 놀아나버릴 만큼 기분이 이상하고 싱숭생숭했던 건 다 이런 이유에서였다. 막연히 도쿄에서 너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도쿄의 대학 준비를 하면서 점점 외로움을 느꼈다. 내가 너 하나만 바라보고 도쿄를 가도 너는 나만을 바라봐줄 수 있을까. 이렇게 운명같은 우리가 어쩌면 조금 멀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같은 그런 찌꺼기들이 나를 외롭게 만들기도 하고 풀죽게 만들기도 했다. 나는 네가 좋았다. 그런데 너도 나만큼 내가 좋을까. 그런 감정들이 결국 선반대에 놓인 초콜렛을 집어들게 만들었다. 어쩐지 조금 달콤한 초콜렛에 묻어 내 마음을 전하면 이 씁쓸한 마음이 달콤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조금 섞어서.
"다이치."
타박타박 걸음을 옮기다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우뚝 멈췄다. 쿠로오는 조금 느린 걸음으로 내 뒤에서 선 채였다.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니 팔을 잡아당겨 몸을 돌린 쿠로오가 내 입술 위에 입술을 꾹 눌러온다. 뜨겁고 달큰한 그 입술에 천천히 입을 열자 평소보다 조금 더 질척한 혀가 밀려들어왔다. 그리고 코끝까지 훅 끼치는 단내에 눈을 둥글게 떴다. 혀 위를 굴러다니는 작고 부드러운 알맹이가 천천히 녹아들어간다. 아, 너도 기억하고 있었구나. 제과회사의 상술. 눈을 감고 쿠로오의 옷깃을 붙들고 초콜렛 덕에 부드러워진 혀를 얽었다. 코끝까지 진하게 치고 올라오는 단내에 기분이 어쩐지 달큰하게 들뜨는 기분이다. 초콜릿이 다 녹아들 때 까지 욕심스럽게 혀를 얽던 쿠로오가 천천히 입술을 떼어낸다. 녹은 초콜렛이 들러붙은 입술을 쪽 빨아당기더니 혀로 살짝 핥는다.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도쿄에 오면. 같이 살자."
응? 여운에 취해 풀린 눈을 둥그렇게 뜨고 쿠로오를 바라보았다. 가로등을 등지고 선 쿠로오의 얼굴이 어둑하게 보였다.
"장거리 연애는 지금으로도 충분하니까. 지금까지의 시간 보상받고 싶으니까. 그러니까."
같이 살자 우리. 입술을 달싹일 때 마다 단내가 펄펄 풍겼다. 지금 내 얼굴이 뜨거운 건 분명 키스의 여운일 거야. 벌겋게 달아오른 고개를 푹 숙이자 앞에선 쿠로오가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쿠로오, 우리는 분명 뭔가 운명같은 그런 사이일거야. 우연이라기엔 너무나 기막힌 인연이었잖아. 그 운명히 끊어질리 없는데 우리는 뭐가 그렇게 불안했을까. 둘 다 고백에 서툰 아이처럼 초콜렛에 의지해서 마음을 꺼내고 말이야. 푹 숙인 고개를 옆으로 돌려 가방을 뒤적였다. 들킬까봐 안쪽에 꼭꼭 넣어둔 초콜렛 상자를 꺼내들었다. 화려한 리본이나 핑크색 하트는 없지만 나름대로 단정하고 정갈한 초콜렛 상자를 앞으로 쑥 내밀었다.
"이거 대답이니까.
"....."
"그러니까."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어쩐지 부끄러워서 입술만 앙 다물었다. 눈 앞에 선 쿠로오는 손을 뻗어 상자를 내미는 내 손채로 초콜렛을 받아든다. 아,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쿠로오의 손목에 찬 시계는 꼭 12시를 넘긴 시간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처음 맞는 발렌타인 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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