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다이 60분 전력
쿠로오 테츠로 X 사와무라 다이치
제대로 잠들지 못해 뻑뻑한 눈을 억지로 비볐다. 해가 잘 드는 남향의 방은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햇살이 그득 차올라 피곤한 몸을 저절로 깨웠다. 찌뿌둥한 몸을 풀기 위해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불을 걷었다. 하품을 하며 욕실로 가자 퉁퉁 부은 얼굴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아.. 이거 너무 심하잖아.”
손바닥을 얼굴에 대고 주물주물 뺨을 주무르자 빡빡하게 굳은 피부가 조금 이완된 기분이 든다. 피로가 풀릴 정도의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거실로 나오자 코타츠 위에 뭔가가 놓여있다.
[나 오늘 일 있어서 먼저 나가. 늦게 오니까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조금 서툰 글씨로 휘갈겨 쓴 쿠로오의 메모였다. 꽤 이른 시간이었는데 용케 나갔네. 아침이 약해 오전 수업은 거의 신청하지 않은 쿠로오였다. 후, 조금 가라앉은 한숨을 쉬었다.
춘고에서 기대 이상의 좋은 성적을 냈다. 그래도 체육 전형으로 진학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라 춘고 이후 진학에 꽤 애를 먹었다. 그래도 도쿄의 대학에는 무사히 올 정도가 되었고 우연히 쿠로오와 같은 대학에 진학을 하게 되었다.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도쿄에서 쿠로오는 은인과 같았고 도쿄의 어마무시한 월세를 절약할 겸 같이 자취를 하게 된 것도 이번 겨울을 넘기면 꼭 1년이 되었다.
수업 비는 시간에 종종 학식도 같이 먹고 배구 동아리에 같이 들어가 꾸준히 배구를 했다. 네트 건너편에서 내 스파이크를 막아내던 상대가 지금은 상대편의 공격을 막아주는 든든한 블록이 되어주는 게 처음엔 신기하기도 했다. 공격이 성공한 뒤 의기양양한 얼굴로 으스대는 그 얼굴에 엄지를 치켜올려주는게 즐거웠다.
쿠로오는 늘 그렇듯 사람을 좋아하고 붙임성이 나쁘지 않았으며 적의를 가지고 다가오는 상대에게도 미움 사지 않을 정도의 솔직함으로 상대해 주변에 사람이 많았다. 네코마 배구 부원들과 함께 있는 모습이 익숙했던 나는 처음엔 조금 그런 쿠로오가 낯설었지만 그 무리를 벗어나면 언제나 그렇듯 익숙한 얼굴로 나를 상대했다.
성인이 되어 술자리가 잦아지자 한번은 쿠로오가, 한번은 내가 데리러 가기도 하고 술자리가 근처면 기다렸다가 같이 택시를 타고 집에 들어오기도 했다. 새로운 신분으로 사는 타지에서 아는 사람이 있다는 건 든든한 일이어서 쿠로오랑 같은 대학이라는 이 우연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어제도 술자리가 있던 그런 날이었다. 예상보다 조금 일찍 끝난 술자리에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찰나에 쿠로오가 간단하게 한 잔 더 하고 가자며 값싼 이자카야로 내 팔을 잡아 끌었다. 나도 조금 아쉽던 참이라 즐겁게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묵직한 생맥주잔을 부딪히고 벌컥벌컥 마시자 갈증이 풀리는 느낌에 기분이 좀 더 좋아졌다.
“사와무라는 말이야, 도쿄 생활 어때?”
“재밌어. 생각보다 훨씬.”
“헤에- 재미 없게 책만 들여다보고 도서관에서 사는 줄 알았더니?”
“꼭 그런 건 아니거든. 아무래도 고등학교 공부랑 다르니까 모르는 건 한 번 더 확인하는 정도고.”
조금 불퉁한 반응에 하하하 웃는다. 살짝 눈 밑이 붉은게 술이 올라오는 모양이었다.
“너는?”
“응?”
“너는 어떤데? 재밌어? 아니, 재밌냐고 물어보는 것도 이상한가? 넌 원래 도쿄 사람이니까.”
“재밌어. 자취는 처음이니까 좀 더 자유로워진 것도 좋고 책임감도 좀 생기는 것 같고.”
“그래?”
“너랑 사는 것도 재밌고.”
조금은 진지한 듯, 조금은 짙어진 눈으로 그렇게 말한 쿠로오는 그렇게 차분하게 바라보다가 슬쩍 웃는다. 술기운이 올라올 때 가끔 쿠로오는 그런 눈으로 사람을 보곤 했다. 조금 강한 눈매의 쿠로오의 그 시선을 느끼면 어쩐지 침착해질 수 없는 기분도 들었다.
“그렇게 성실해 보이던 사와무라군이 설마 가사에 1도 소질 없을 줄이야. 지난 번에 너 카레 만들겠다며 냄비 시커멓게 다 태워먹은거 생각하면 진짜.”
“야, 지금 그 얘기 왜 하는거야!”
앞에 놓인 안주를 집어들어 쿠로오의 입에 쑤셔넣자 파하하 웃던 쿠로오가 입안에 들어온 안주를 우물우물 씹는다. 처음 하는 자취 생활에 익숙하지 못한 집안일은 쿠로오가 거의 다 해주었다. 물론 나도 빨래나 청소 같은 건 돕기도 했지만 그러면 다다미가 상하다는 둥 창문 닦은거 자국 다 났다는 둥 쿠로오의 잔소리만 늘려준 꼴이 되어 그 뒤로는 그냥 시키는 단순한 일만 도와주곤 했다.
“넌 나중에 좋은 남편 될거야.”
“그래? 그럼 니가 데리고 살래?”
쿨럭, 입에 가져다댄 맥주잔에 대고 대차게 뿜어냈다. 으악 더러웟!!! 하고 부랴 냅킨을 뽑아들고 제 옷에 튄 맥주를 대충 닦아낸 쿠로오가 두툼할 정도로 냅킨을 뽑아들곤 입가를 가린 내 손에 대준다. 컥컥 기침을 하며 냅킨을 받아들곤 대충 닦아내고 고개를 들자 유쾌하지 못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쿠로오와 눈이 마주쳤다.
“아무리 싫어도 뱉을 일이야?”
“아니 그런게 아니고 갑자기 그러니까 웃겨서 그렇지.”
큭큭, 내 자신도 너무 어이가 없어서 허허 웃자 쿠로오도 헛,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작게 웃는다. 아 술맛 다 떨어졌어, 집에나 들어가자. 겉옷을 집어들며 먼저 일어난 쿠로오가 계산서를 들고 먼저 카운터로 간다. 부랴부랴 냅킨으로 튄 맥주를 마저 닦아내곤 옷을 집어들고 나섰다. 벌써 계산을 끝낸 쿠로오가 먼저 가게 밖으로 나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들곤 문다. 겉옷을 허둥지둥 걸쳐 입으며 문 손잡이에 손을 대는데 쿠로오가 손을 들어 흔든다. 안에서 기다려. 희미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킁킁 맥주 냄새가 밴 듯한 손 냄새를 맡으며 살짝 콧잔등을 찌푸렸다. 쿠로오는 밖에서 살짝 코끝이 빨개진 채 천천히 담배를 폈다. 가끔 쿠로오는 담배를 피곤 했는데 비흡연자인 내 앞에서는 웬만하면 피하는 편이었다. 난 별로 상관 없는데 본인이 알아서 주의하는 편이었다. 자취 시작할 때도 집안에서 펴도 된다고 했을 때 쿠로오는 단호하게 ‘다다미에 구멍 날 수도 있으니까’라고 했었다.
“사와무라.”
찰랑, 가게 문을 잡아 당기며 쿠로오가 부르는 목소리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살짝 고개짓을 하는 쿠로오를 보고는 벌떡 일어나 가게 밖으로 나섰다. 도쿄의 겨울은 미야기보다는 견딜만 했지만 겨울 답게 꽤 추웠다.
“좀 걸을까.”
쿠로오의 말에 동의하곤 자켓 주머니에 단단하게 손을 찔러 넣었다. 집과 멀지 않은 술집이라 걷기에 무리는 없었다. 하긴 연말이라 술자리가 잦았으니 택시비는 아끼는게 좋겠지. 남은 돈이 얼마였더라, 대충 계산하면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내일 뭐해?”
“학교 수업은 없고, 아르바이트 하나 있어.”
“그러고 보니 내일 부활도 쉬는 날이구나.”
번화가를 벗어나자 사박사박 발걸음 소리가 제법 크게 들렸다. 곧 한해가 끝나가고 겨울도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봄을 맞이하면 도쿄에 온지 1년이 되었다는게 조금 더 실감이 될까.
“사와무라.”
“응?”
“취했어?”
응? 하고 고개를 들어올리자 히죽히죽 웃으며 쿠로오가 그런다. 너 지금 걸음 비틀거려.
“니가 지금 비틀거리는거 아냐?”
“난 똑바로 걷는데.”
양 볼 가득히 웃음을 꾹꾹 눌러담은 쿠로오가 웃으며 어깨에 팔을 걸친다. 찬 공기가 차단되니 금세 따뜻했다. 조금 씁쓸한 담배 냄새도 풍겨왔다. 그 속에 섞인 쿠로오의 향수 냄새도. 조금 따뜻해지고 조금 몸이 편해지자 자꾸 쿠로오 쪽으로 몸이 기운다. 어이, 사와무라.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흐흥 웃고 말았다.
“놀리지마, 나 안 취했어.”
“그럼 지금 비틀 거리며 걷는 건 뭔데.”
“그건, 그냥 그러고 싶은 기분이라 그런거야.”
뭐래. 낮은 저음으로 웃는 쿠로오의 목소리가 귀에 닿은 가슴팍에서 웅웅 울린다. 딱 기분 좋은 취기에 눈이 점점 노곤노곤하게 감긴다.
“야, 사와무라. 너 왜 자꾸 다리에 힘 풀리냐.”
“아 걷기 귀찮아서 그래.”
“업어주랴?”
“됐거든.”
큭큭 웃으며 쿠로오를 밀어내자 재빠르게 어깨에 팔을 단단하게 고정시켜 몸을 끌어안아 온다. 졸지에 쿠로오의 품에 푹 안긴 모양이 되자 따뜻함이 몰려와 쿠로오의 품에 얼굴을 기댄채 스르륵 눈을 감았다.
“사와무라.”
“응.”
“야 너 진짜 취한거야?”
“아냐. 그냥 잠깐만 이러고 있어봐.”
콩, 콩, 규칙적이지만 조금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기분이 차분해져서 조금 더 편하게 고개를 기댔다. 조금 귓불이 시렸고, 호흡으로 살짝 오르락 내리락 하는 쿠로오의 가슴팍이 기분이 좋았고, 그리고.
그리고.
“아.”
문득 시계를 보니 오전 열시였다. 오늘은 부활동도, 아르바이트도, 수업도 없는 날이었다. 째깍째깍 거실의 시계 초침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쿠로오가 없는 집안이 텅 빈 듯 고요했다. 손에 집어들고 있던 메모를 마저 읽어내려갔다.
[먹을 거 냉장고에 넣어두었으니까 데워 먹으면 돼. 또 냄비 태우지 말고.]
그대로 뒤돌아 냉장고 문을 여니 내가 좋아하는 반찬들이 반찬통에 든 채 정리 되어 있었다. 어제 그러고 나서 따로 요리 할 시간이 없었을 텐데 언제 한거지. 하나 하나 반찬을 꺼내며 천천히 감탄했다. 손에 들고 있던 메모를 내려놓으려는데 뒷면이 살짝 비쳤다. 슬쩍, 뒤집었더니 서툰 글씨로 또박또박 눌러쓴 다른 메세지가 보인다.
[추신. 어제 한 말 농담 아니니까.]
“진짜냐고.....”
귀 끝에 시뻘겋게 열이 오른게 만지지 않고도 느껴졌다. 다음으론 뺨이 화끈거렸다. 아, 사람이 부끄러우면 얼굴이 붉어진다는 만화같은 일이 나한테도 적용 될 줄이야.
‘널 좋아해. 알고 있어 사와무라?’
따뜻한 가슴팍에 파묻혀 천천히 눈이 감길 때 쯤 귓가로 쏟아지는 목소리는 어쩌면 꿈같은 것이라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예전부터, 널 좋아했어. 확인 하듯 한 번 더 들리는 목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이건 꿈일까. 어쩌면 조금 우스운 현실일까. 까무룩 잠에 빠져들며 나는 우스워 조금 웃고 말았다. 내일 같은 건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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