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너를 본 것은 네트의 맞은편. 첫 인상은 눈에 띄지 않았지만 성실한 플레이는 경기를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었다. 적당히 제 몫을 해내는 팀원들, 흐트러지지 않는 연계, 다만 부족한 것은 이렇다 할 에이스의 부재. 고만고만한 실력과 체격의 중학교 경기에서 우리팀은 이겼고, 분한 얼굴이지만 무언가 후련해진 얼굴로 네트 아래로 맞잡은 너의 손은 뜨거워서 수년이 지난 지금도 너의 첫인상 보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그 날의 온기였다.
사와무라 다이치.
이름보다는 어디 학교의 주장이라는 호칭이 익숙했던 너는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반기는 고등학교 체육관에서 다시 만났다. 눈에 띄진 않지만 든든하게 팀을 지탱하고 있던 너의 눈에는 배구를 향한 연심이 흠뻑 묻어있어 배구를 계속 하는 한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그 때의 나는 당연한 듯 생각했다.
*
[10분 후 대문 앞]
뾰로롱, 가벼운 착신음과 함께 핸드폰의 액정 위로 짧은 메세지가 떠올랐지만 핸드폰의 주인은 푹신한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깊은 잠에 빠진지 오래였다. 옅은 아침의 밝은 빛이 방안에 은은히 차올랐지만 방안은 고요했다. 핸드폰의 착신음을 끝으로 방안은 잠시 평화로운 듯 보였다. 아주 잠시.
꾸욱, 초인종을 눌렀지만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이럴 줄은 알았지만 진짜 이럴 줄은 몰랐다. 사와무라는 후, 뱃속에서 끌어오르는 화를 낮은 심호흡으로 다스렸다. 딱 세번 누를 거야. 비장하게 내뱉고는 초인종을 눌렀다. 뾰로롱 새소리가 경쾌하게 나는 초인종 소리는 상쾌한 아침공기와 잘 어울렸다. 두번째. 초인종 소리는 이미 따라부를 수 있을 정도였다. 세번째. 초인종 소리의 중반쯤 될 무렵, 사와무라는 크로스백의 가방끈을 고쳐매었다. 오늘이야 말로 버려야 된다. 진짜 버림 당해봐야 정신 차리겠지.
초인종을 누르기 위해 올라섰던 계단에서 내려왔다. 벽 쪽으로 잘 세워둔 자전거의 손잡이를 고쳐쥐었다. 고정시킨 받침대를 세워 올리곤 안장 위에 앉았다. 그리곤 생각했다. 진짜 미쳤구나 내가. 사와무라는 미간을 구기며 자전거에서 내리곤 다시 벽쪽으로 자전거를 세웠다. 저딴 건 그냥 버려야되는 걸 잘 알고 있는데 진짜 버려버렸다간 앞으로 일주일이고 한달이고 엄청나게 피곤해질게 확실해 짜증이 치밀었다. 익숙하게 올라 선 계단에 쪼그려 앉아 대문 앞 작은 화분을 집어들자 아무 장식도 없는 여분 열쇠가 들어있었다. 대문을 열고 마당으로 자전거를 끌고 들어와 세우기까지 군더더기 없는 능숙한 움직임으로 빠르게 마무리 한 사와무라는 현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실례하겠습니다.”
인사를 들을 사람이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습관적으로 인사를 하곤 신발을 벗었다. 망설일 것 없이 2층으로 올라간 사와무라는 익숙한 방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곤 침대 위에 팬티바람으로 잠들어 있는 남자의 등짝을 강렬하게 내리쳤다.
“으극!!!”
별이 번쩍 튀는 고통에 죽은 듯 널부러져있던 몸이 벌떡 뒤집힌다. 얼얼한 등짝이 차갑게 식은 천조각에 닿자 고통이 잠시 사그러들었지만 시야는 여전히 정신 없이 어지러웠다.
“뭐, 뭐, 뭣.”
“쿠로오.”
뿌연 시야보다 목소리로 상대를 알아챈 쿠로오가 덜 뜬 눈으로 피식 웃는다. 아, 웃는 얼굴을 보니까 또 짜증이 치솟는다. 깨워도 안 깨워도 어차피 짜증날 일이라면 그냥 안 깨우고 갈 걸 그랬나 사와무라는 진지하게 후회한다.
“아침 연습 간다고 깨워달라고 한건 분명 너였지.”
“응응 그랬지.”
“내가 분명히 여섯시에 데리러 온다고 했지.”
“그랬었지?”
“그 실실거리는 얼굴에 스파이크 먹고 싶지 않으면 얼른 일어나는게 좋을걸.”
덜 뜬 눈으로 쿠로오가 손만 빼꼼히 들어 내민다. 나이 먹을만큼 먹은 남고딩의 저런 애교따위 평소같으면 무시했겠지만 이미 시간이 늦을 대로 늦은 상황이었다. 허공에 가만히 대기하고 있는 쭉 뻗은 손을 단단히 잡고는 당겨 일으키려던 참이었다.
“윽?!”
강한 힘으로 끌어당겨진 사와무라가 앞으로 푹 꼬꾸라졌다. 꽤 안전하게 사와무라의 몸을 받아든 쿠로오가 큭큭 웃으며 사와무라의 몸을 꾹 끌어안는다.
아침 댓바람부터 남정네 맨살에 코를 박은 사와무라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버둥거렸지만 다리까지 단단하게 몸을 얽어 고정시킨 쿠로오의 힘을 이겨내기란 역부족이었다. 빌어먹을, 고등학교 입학할 때만해도 곧 따라잡을 만한 신장차이였는데 어째 이 자식은 날이 다르게 쑥쑥 자라는 것 같다. 아침부터 진짜 짜증나게. 단단하게 얽혀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붙들린 몸으로 용을 써봐도 어째 쿠로오는 간단하게 사와무라를 제압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여유만만한 태도가 더 짜증났다. 눈 앞에 있는 맨살은 단단하게 근육이 잡혀있다는게 뺨으로도 느껴졌다. 하, 진짜.
“아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단단하게 얽힌 몸이 풀리자 사와무라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있는 힘을 다한 보람이 있는지 어깨죽지에 진하게 잇자국이 맺히기 시작한다.
킬킬 웃는 사와무라를 흘겨보는 쿠로오의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있다. 조금 미안하지만 아침부터 쌓일대로 쌓인 짜증을 단숨에 풀어낸 기분이라 실실 웃음이 새어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몸을 일으켜 앉자 불만가득한 쿠로오가 침대에 늘어져 입이 댓발 나와있었다. 꽤나 세게 물었는지 붉게 피멍이 올라오는 잇자국에 슬쩍 손을 갖다댔다.
“빨리 안일어나면 이거 눌러버릴거다?”
“아 진짜 너 독한 놈이야.”
“이제 알았어?”
그러니까 빨리 일-, 의기양양한 얼굴에 슥 손이 올라온다. 길죽한 손가락을 둥글게 말고는 엄지를 세운 쿠로오의 손이 스윽 입술 밑을 쓸어낸다. 축축하게 젖어있던 턱이 쿠로오의 손길에 말끔하게 닦인다. 가만히 사와무라를 올려다 보던 쿠로오가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일어난다.
“씻고 올게.”
“오냐.”
훌쩍 커버린 뒷모습이 방문을 열고 나가버린다. 아침부터 지친 탓에 텅빈 쿠로오의 침대에 풀썩 몸을 눕혔다. 푹신한 침대가 기분 좋게 몸에 감겨왔다. 익숙하고 평온한 공기. 마음이 놓였다.
“마음 놓이기 전까지 과정이 험난하지만.”
푸스스 웃음이 나온다. 쿠로오의 부모님은 출장이 잦아 집이 비는 경우가 많았다. 아침연습 가기 힘들다며 넋두리를 늘어놓는 쿠로오를 챙긴 것도 벌써 2년 째였다. 제 방, 체육관, 그 다음으로 익숙한 공간이 쿠로오의 방이었다. 몸을 뒤척이자 자세가 편안했다. 푹신한 베개에 묻은 고개가 곧 푹 떨구어졌다.
*
- 팡!
운동화가 바닥에 미끌리는 소리, 배구공이 마룻바닥에 튀는 소리, 다양한 지시와 기합으로 뒤섞이는 목소리들. 착실하게 뒤를 지키고 자신에게 전해져오는 토스를 받아 스파이크를 결정짓고 점수로 연결하며 팀원들과 연결해가는 것, 꽤나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코트를 살피며 공기를 읽는 것이 능한 사와무라는 전위에 선 쿠로오가 평소보다 조금 느슨한 수비를 하는 것을 금세 눈치챈다. 다양한 조합으로 팀을 나눠 연습 경기를 하며 곧 있을 인터하이 예선에 대한 대비를 하는 중요한 시기였다. 이기고도 표정이 영 밝지 않은 사와무라는 땀을 닦으며 힐끔 쿠로오쪽을 살핀다. 물을 마시며 목을 축이던 쿠로오가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왼쪽 어깨를 슬쩍 주무른다. 윽, 아침의 일이 생각 난 사와무라가 미간을 구긴다.
“오늘 연습은 여기까지! 스트레칭 제대로 하고 도구 정리 하도록 하자!”
쿠로오의 말에 부원들이 우렁찬 대답과 함께 스트레칭 대형을 만들어 선다. 스트레칭을 하고 도구를 정리하면서도 시선은 용구실 앞에 서서 이것저것 지시하는 쿠로오의 어깨로 향했다. 바닥을 닦은 밀대를 모아 용구실쪽으로 가자 쿠로오가 슬쩍 길을 비켜준다.
“신경쓰여?”
“뭐가.”
밀대를 한쪽으로 잘 모아 정리하고는 슬쩍 고개를 돌렸더니 히죽히죽 웃는 얼굴이 사와무라를 향해 있었다.
“계속 쳐다보길래.”
쳐다보지 않으리라 했던 결심이 무색하게 결국 들어오면서까지 보고 말았나보다. 쿠로오의 말을 무시하며 용구실을 나서는데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제대로 물렸나봐, 아까 리시브하는데 어깨가 저리더라고.”
“뭐?”
저도 모르게 놀라 되묻고는 아차 싶었다. 진짜 아파서 하는 푸념이 아닌 걸 잘 알면서 왜 반응해 버렸을까.
“주장의 귀중한 어깨가 이렇게 되었는데 원인제공자께서는 어쩌실텐가?”
“그러게 애초에 일찍 일어났으면 됐잖아.”
“잠투정 좀 부렸다고 이건 너무 하잖아.”
잠투정같은 소리하고 있네. 제 표정이 서늘하게 굳어가는 걸 거울로 보지 않아도 잘 알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쿠로오의 태도가 바뀌지 않을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알겠어, 고기만두 사줄게.”
“그리고?”
“그거면 되지 않아?”
“내 어깨가 고작 고기만두 하나로 끝날 일이야?”
내가 뭘 더 해야되는데, 라는 표정을 읽었는지 쿠로오가 성큼성큼 걸어와 사와무라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경쾌하게 체육관을 나선다. 아, 이녀석 또 키 컸나봐. 전보다 더 간단하게 걸쳐지는 팔에 조금 서글픔을 느꼈다. 체육관 문단속을 하고 부원들과 인사를 나눈 후 쿠로오의 팔에 여전히 어깨가 붙들린 채 향하는 방향은 쿠로오의 집 쪽이었다.
“오늘도 우리 부모님 안오셔.”
“근데?”
“자고 가라고. 나 심심하니까.”
“뭐라는거야.”
“내 간호해줘야지.”
요기요기, 어깨를 가리키며 불쌍한 표정을 짓는 쿠로오는 하나도 안 불쌍해보였지만 원인 제공을 한 마음의 짐을 무시할 수 없어서 사와무라는 결국 한숨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어찌되었건 쿠로오의 뜻대로 되고마는 것이다. 알면서도 그대로 순순히 당해주기 싫으니까 무시하는 거지만. 쿠로오의 집으로 향하고 당연한 듯 쿠로오가 차려주는 저녁을 먹고 설거지와 뒷정리는 함께. 몇번이고 빌려입어 익숙한 파자마로 갈아입고는 조금은 주장답게 오늘 연습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 쿠로오의 말을 들었다.
“아, 나 친구가 현 베스트 4 경기영상 씨디 빌려줬어. 볼래?”
“그럴까?”
꽤 주장다운 얼굴로 이야기하는 쿠오로는 어쩐지 조금 낯설고도 든든했다. 이러니 저러니 대충하는 것 같아도 할 땐 하는 사람인 걸 알기에 쿠로오가 주장이 되는 것에 대해 조금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 자신과 같이 어렸을 때 부터 배구공을 만져오고 중학교 때 부활동을 하고, 시합을 하고, 배구가 좋아 결국 이렇게 고등학교 까지 부활동을 지속해왔다. 지금이 삼학년이고 인터하이 후에는 은퇴할 가능성도 있고 그 다음은 배구의 계속일지 새로운 시작일지 사와무라도 쿠로오도 몰랐지만 그저 지금 이 순간이 즐거웠다. 두 사람의 학교는 배구로 크게 유명하지 않은, 흔히 말하는 약소고였기 때문에 배구로 장래를 정하리라는 의지는 없었지만 적어도 배구로 잘 맞는 좋은 친구를 얻은 것만으로도 사와무라는 든든했다.
“이거 씨디 좀 꽂아줘.”
쿠로오가 건넨 씨디를 받아들고 제 옆에 있는 컴퓨터의 씨디기를 열자 이미 안에 들어있던 씨디가 빼꼼, 고개를 내민다.
“현 베스트 중에 실제로 우리랑 시합할 가능성이 있는 학교가 몇이나 되겠냐만은 그래도 도움은 되겠지.”
“쿠로오.”
뭘 그런걸 묻고 그래. 키들키들 웃는 쿠로오의 얼굴에 질린 표정을 한 사와무라가 씨디를 내려놓으려는 순간, 씨디를 든 손 그대로 쿠로오의 손에 붙들렸다.
“너도 볼래?”
“됐어.”
“왜, 괜찮던데.”
“관심 없어.”
“에이ㅡ 어떻게 관심이 없을 수가 있어.”
“하던 배구 얘기 계속 하시죠 주장님.”
씨디를 세워 쿠로오의 이마 중간을 쿡 찍어 누르자 키들키들 웃던 쿠로오가 사와무라의 손에서 씨디를 가져간다. 아무렇지 않은 척 배구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지만 사와무라의 귀 끝이 살짝 붉었다. 고지식하다고 할 정도로 성실하다니까.
“싫어하지 않지만 말이야.”
“주장이 어디가서 배구 싫다는 소리 하는거 아니야.”
별 싱거운 소리를 한다는 듯 사와무라는 가볍게 고개를 털곤 쿠로오에게 건네 받았었던 씨디를 컴퓨터에 넣었다. 마우스로 영상을 트는 사와무라를 그저 가만히 바라보았다. 3년 동안 바라보았는데 사와무라는 그 때 와 같은 것 같으면서도 조금은 변한 것 같다. 제일 많이 변한 건 자신이겠지. 쿠로오는 그저 가볍게 웃어버리고 만다. 영상이 흘러나오고 강호고들의 시합영상에 사와무라는 금세 빠져든다. 모니터가 이 쪽에 있어서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과 같은 포지션의 선수들에게 집중했다가 강한 에이스의 공격에 순수하게 감탄하며 단순한 듯 다양한 표정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중학교 때의 단 한번의 시합 이후로 쿠로오는 취미로 하던 배구에 작은 의미를 두었다. 다시 코트 위에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 그 이유는 재회하고 나서 곧 깨달았다.
- 만나서 반가워, 난 사와무라 다이치.
- 쿠로오 테츠로. 중학교 때 시합한 적 있었지?
- 어 진짜? 하하, 내가 기억력이 별로 안 좋아서.
처음엔 기억에 남지 않을만한 선수로 평가 당한 것에 대한 불만인 줄 알았는데 그냥 너에게 나는 스쳐 지나간 사람일 뿐이었단 사실에 작게 충격 먹었었지. 그래서 이 마음을 알았다. 너에게 호감을 사고 싶어서 친근하게 굴었더니 너는 나에게 호감을 가져주었고 친구라고 불렀더니 기꺼이 너의 가장 친한 친구자리에 나를 두어주었다. 내가 너에게 이 마음을 말하면 너는 이제 어떻게 답해줄까.
“쿠로오.”
똑바로 마주하는 시선에 문득 정신을 차렸다. 의아한 듯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사와무라에게 당황스러움을 금세 지우고 쿠로오는 싱긋 웃는다.
“왜?”
“왜 멍때리고 있어. 뭐하냐.”
“아니, 니가 너무 재밌게 보길래 신기해서.”
“너 오늘 좀 이상하다?”
“오늘 아침에 미친개한테 물려서 그래.”
어깨를 주무르며 아아야, 앓는 소리를 했더니 뭐얏?! 하고 날카롭게 되물어 온다. 스파이크를 내리 꽂는 손바닥으로 쿠로오의 어깨를 철썩 내리친다. 아, 아 진짜 아프다고!! 앓는 소리를 내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는 쿠로오와 반대로 사와무라의 얼굴은 생기가 돌았다. 일어나는 쿠오로를 따라 일어난 사와무라가 쿠로오에게 덤벼들자 쿠로오가 뒷걸음질을 치며 후다닥 피한다. 아무래도 달려드는 쪽이 더 빨라서 쿠로오의 어깨를 짚은 사와무라의 힘에 쿠로오가 뒷걸음 치다말고 풀썩 침대로 쓰러지고 만다.
“아 진짜 이러다 죽어.”
“어디 그 대단한 어깨 한번 보자.”
아예 작정한 듯 사와무라가 일어나려는 쿠로오를 다시 눌러 눕히고는 티셔츠를 걷어 올린다. 훌렁, 드러난 배에 쿠로오가 움츠러 들지만 작정한 사와무라를 말리기에 부족했다.
“다, 다이치, 쿠로찡 부끄러운데에.”
“시끄러, 얼른 벗어.”
곱게 긴 팔을 교차시켜 가슴께에 모은 쿠로오에게 콧방귀를 팽 뀌며 사와무라가 티셔츠를 마저 걷어올린다. 몸을 움츠려 철통같이 티셔츠를 보호하는 쿠로오의 등짝을 야무지게 철썩철썩 패던 사와무라가 안되겠는지 결국 쿠로오의 배 위로 올라탄다.
“야!”
“아 누가 너 잡아먹는대? 어깨만 보자고 어깨만.”
엉덩이로 꾹 쿠로오를 누르며 팔로 티셔츠 끝자락을 잡아 당겨 냉큼 벗겨내자 쿠로오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와무라는 왼쪽 팔을 끌어 내려 무릎으로 단단히 눌러 고정하곤 쿠로오의 어깨 부근을 양 손으로 단단히 눌러 고정한다. 아 진짜.. 앓는 소리와 함께 오른손으로 단단하게 얼굴을 가리고 있는 쿠로오는 어금니를 단단히 깨문다.
아 왜 하필 어제 밤에 그걸 봐가지고. 교태로운 신음소리와 함께 남자 배우 위에 올라타 있던 AV배우의 형태가 어른하게 눈가에 서렸다가 곧 사와무라의 얼굴로 오버랩 된다. 놀라 눈을 떴더니 진짜 사와무라가 제 위에 올라타 앉아있어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진짜, 세게 깨물긴 했나보다.”
조금 미안한 목소리와 함께 사와무라의 손가락이 쿠로오의 어깨를 문지른다. 그 감각에 놀라 얼굴을 가리던 손으로 사와무라의 손을 잡아챘다. 뜬금 없는 박력에 사와무라가 멀뚱히 쿠로오를 내려다 본다.
“가, 간지러워.”
“아 그래?”
짖궂은 얼굴이 된 사와무라가 냉큼 손을 잡아빼곤 쿠로오의 옆구리에 손을 갖다댄다.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간지럼을 태우자 쿠로오가 전력으로 몸을 비틀곤 사와무라에게서 빠져나온다.
“야 너 진짜!!!” 쿠로오에게서 침대로 굴러 떨어진 사와무라가 낄낄 웃으며 승자의 미소를 짓는다. 씩씩 숨을 고르던 쿠로오가 홱 몸을 돌려 방문을 열어젖힌다.
“어디가!”
“땀 흘려서 씻으러 간다!!”
쾅, 방문을 닫고 쿵쾅쿵쾅 1층으로 굴러떨어지듯 내려갔다. 다급하게 욕실문을 열어 젖히고 들어가 후들거리는 다리로 주르륵 바닥에 주저 앉았다. 아 진짜, 망할 사와무라 다이치.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머리를 마구 헝클이던 쿠로오가 쾅, 욕실벽에 머리를 박는다.
“왜 모르냐고.”
나 원래 간지럼 안타는 체질인거 몇번을 얘기했는데. 윽, 질끈 눈을 감는다. 어깨를 더듬던 손가락의 감각이 생생하게 온 몸을 더듬어왔다.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옆구리에 와닿던 손가락의 감각, 배 위에 걸터 앉은 천조각의 감촉, 턱을 쓸자 손가락에 묻어나던 물기, 어깨에 느껴졌던 짜릿한 통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