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티_된_숫자만큼_공_나이_마음_찍힌_숫자만큼_수_나이로_연성하기
쿠로다이로 받았습니다,
18세 쿠로오와 16세 다이치의 이야기. 일본연령을 기준으로 하였습니다.
원작의 설정을 가져왔으나 많이 변형 되었습니다. 참고해주세요!
카라스노는 강호였다. 유명한 감독이 이끄는 미야기 대표로 몇번이고 전국진출의 역사를 쓴 강호. 사와무라는 제가 ‘그’ 카라스노 배구부에 입부하던 날을 잊을 수 없었다. 긴장 되고, 청춘의 땀내가 배어있는 체육관의 그날의 공기.
“이즈미다테중 출신 사와무라 다이치입니다. 왼쪽 공격수 했었습니다! 전국으로 나가기 위해 카라스노에 왔습니다!”
떨렸을까. 떨렸을 것이다. 동경의 그 곳에 선 것만으로도 벌써 다리가 후들거렸다. 제 당찬 목소리에 선배들이 장난스레 환호로 답했다. 사와무라는 허리를 굽혀 잘 부탁드립니다!! 우렁차게 외쳤다.
“그래. 열심히 해보자.”
어깨를 다독이는 손에 감사합니다! 하고 다시 크게 외쳤다. 눈 앞의 주장은 낮게 웃었고 사와무라는 그것만으로도 떨렸다. 제가 감히 쳐다도 볼 수 없는 3학년의 주장이었다.
쿠로오 테츠로와 사와무라 다이치는 봄기운이 만연한 체육관에서 만났다. 따뜻한 햇살로 기분 좋게 달궈진 공기와 땀냄새가 묻어나는 공간, 그곳에 새로 시작하는 사람들의 설레임이 가득 차올라 반짝반짝 빛났다. [카라스노 배구부]라는 자수가 놓인 져지를 받고 제 앞으로 된 유니폼을 받을 때 까지도 사와무라는 제가 카라스노 배구부가 된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비록 선배들의 연습을 돕기 위해 공만 줍다 끝나는 날도 있었지만 그 배구공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자부심이 넘쳤다.
“오 사와무라.”
“아, 안녕하십니까!”
조금 날이 더워질 무렵이었다. 몇번인가 공을 만지고 리시브가 조금 더 익숙해졌을 즈음, 푸른 교정에서 교복을 입은 쿠로오와 우연히 만났다. 3학년 교실과 1학년 교실은 꽤 거리가 있어 부활동 외엔 일부러 찾아가지 않으면 만날 일이 별로 없었다.
“점심은?”
“아, 이거랑 같이 먹으려구요.”
자판기의 우유를 가리키며 조금 민망하게 웃었다. 우유를 마시는게 조금 부끄러워졌다. 훌쩍 키가 큰 선배 앞에서 왠지 키가 크고 싶어 투정부리는 아이 같았다. 3학년인데다 이런 강호팀을 이끄는 주장님. 새내기인 1학년 사와무라에게는 너무나 아득한 선배였다. 먼저 뽑을 수 있도록 한 발짝 물러나 동전을 집어넣는 쿠로오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든든한 어깨, 최강의 브로킹을 하는 길죽한 팔다리, 동경과 선망같은 감정들이 한순간에 들이쳐 사와무라는 왠지 얼굴이 붉어졌다.
“우유?”
“네?”
쿠로오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조금 이상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런것 조차 민망했다. 멋진 저음의 목소리가 우유? 하고 되물어 왔다. 사와무라는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잠시 머뭇거렸다. 쿠로오는 길게 뻗은 손가락으로 버튼을 눌렀다.
“아, 저!”
덜컹, 하고 뭔가가 굴러떨어지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 사와무라가 급하게 외쳤다. 쿠로오는 허리를 숙여 집어든 우유팩을 사와무라에게 툭, 던졌다. 가볍게 포물선을 그리며 받기 쉽게 날아온 우유팩은 사뿐히 품안에 안겼다. 쿠로오는 싱긋 웃는다.
“영양보충 중요하지. 잘 하고 있어 사와무라.”
사와무라는 다급하게 감사합니다! 하고 외치며 허리를 숙였다. 쿠로오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아닐지 몰라도 사와무라에게 있어서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제가 마실 음료를 뽑아든 쿠로오는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를 하고 제 친구들이 서있는 무리로 섞여들어갔다. 쿵, 하고 가슴이 뛰었다. 하얀 셔츠를 접어 걷은 쿠로오의 팔이 눈 앞에 선명했다.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었던 손, 저에게 우유를 건네던 그 손. 더위가 얼굴로 몰린 듯 뜨거웠다.
사와무라는 유니폼에 11번을 달았다. 1학년 중에 가장 빠른 번호였으나 1번과는 무려 10명의 거리가 있었다. 그와 같은 코트를 밟기 위해선 주전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카라스노는 강했고, 코트는 선배들의 무대였다. 잘 안다, 1학년 주제에 주전이 되고 싶다는게 과욕이라는 것을. 다만 코트를 밟을 때 쯤이면 쿠로오가 코트 안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사와무라를 재촉했다. 끊임없이 연습을 했다. 1학년 동기들과 교실에서 배구 서적을 가져와서 틈틈히 이론 이야기도 하고 배구 시합 비디오를 돌려봤다. 체력을 기르기 위해 아침 로드워크도 빠지지 않았다. 어느샌가 사와무라는 공을 받아내는 횟수가 제법 늘었다. 강하게 내리친 쿠로오의 공을 받아 올렸을 때 제법이라는 표정으로 눈을 빛내는 쿠로오의 표정을 사와무라는 잊을 수 없었다. 잘했어 사와무라. 쿠로오는 후배들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칭찬임을 알면서도 사와무라는 어김없이 설레곤 했다. 스트레칭을 하고 손톱을 다듬고 배구공을 만지면서 시간은 쉬지 않고 흘러갔다.
가끔 시간이 맞으면 같이 하교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카노시타 상점을 기점으로 사와무라는 오른쪽으로 꺾었고 쿠로오는 왼쪽으로 꺾었다. 노을 지는 언덕을 함께 걸어 내려올 때 사와무라는 평소에 힘들기만 하던 언덕길이 조금만 더 길었으면 좋겠다는 바보같은 생각을 하기도 했다. 아쉬움에 조금 걸음이 느려질 때면 쿠로오는 앞서 걷다가 잠시 걸음을 멈춰 주곤 했다. 왜 그러냐는 얼굴에 사와무라는 어색하게 웃으며 다리가 조금 피곤해서요. 하고 변명하곤 했다.
“스트레칭 빠지지 않고 잘 해야지.”
“네 죄송합니다.”
“운동하는 몸이니까 관리 잘 해야한다.”
“네.”
사와무라에게 향하는 쿠로오의 말에는 언제나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착하고 배구 좋아하는 성실한 후배. 그런 후배에게 건네는 선배의 다정한 조언에 사와무라는 가끔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저 말고 누구나에게 다정하실거죠. 그런 말은 꿈에도 할 수 없었다. 상점 앞에 도착하자 쿠로오는 잠시만, 하고 후다닥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애들한테 말하면 안된다.”
의아한 얼굴의 사와무라에게 장난스럽게 웃은 쿠로오는 큼지막한 고기만두 두개를 양손에 들고 나왔다. 따뜻하게 손 안에 들어차는 온기를 받아들었다.
“많이 먹어.”
“가, 감사합니다!”
사와무라의 우렁찬 인사에 쿠로오는 제법 뿌듯한 선배의 얼굴이 되었다. 따뜻한 온기를 양손에 움켜쥐고 망설였다. 조심스럽게 종이봉지를 벗겨들고 뜨거운 고기만두를 후- 불어 식히는 쿠로오의 얼굴이 꽤 진지했다. 가만히 그 얼굴을 바라봤다. 뜨거운 음식에 약한지 조십스럽게 구는 모습을 보며 어쩐지 슬그머니 입술이 들썩였다. 그러다 쿠로오가 쳐다보는 바람에 쫓기는 사람처럼 다급하게 한입 베어물었다. 뜨거운 만두에 입술이 금방 빨갛게 부어올랐지만 사와무라는 덥석덥석 베어물었다.
“배 많이 고팠구나.”
“아니, 아닙니다!”
“잘 먹으니까 보기 좋다.”
제 바보같은 행동을 보고 쿠로오는 다정하게 웃어주었다. 사와무라는 어쩐지 부끄러워 제 손에 시선을 고정하고는 입안에 가득 찬 만두를 우물거렸다. 저보다 먹는 속도가 느린 쿠로오가 부스럭대며 만두를 먹는 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그냥, 아무것도 안해도 좋았다. 노을로 물들었던 언덕에는 그 짧은 시간에도 어둠이 짙게 깔렸다. 제 몫의 만두를 다 먹은 쿠로오가 물수건을 꺼내 꼼꼼히 긴 손가락을 닦는다. 자 그럼, 하고 쿠로오는 인사를 하고 왼쪽 골목으로 꺾어들어간다. 사와무라는 인사를 하며 꾸벅 허리를 숙였다. 저지를 입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뒷모습을 본다. 사와무라는 손에 쥔 종이봉지를 만지작거렸다. 제 방 책상 한켠에는 뜯지도 않은 우유팩이 그 어느날 부터 가만히 놓여있었다. 너도 남겨 둘 수 있는 거였으면 좋았을텐데. 그렇게 또 혼자 사소한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다가 손에 쥔 포장지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졌다. 발갛게 부어올라 번들거리는 입술을 소매로 슥슥 문질러 닦았다. 쿠로오는 이미 골목으로 모습을 감춘 뒤였다.
*
인터하이 예선을 위한 골든위크 합숙과 몇번의 연습경기, 바쁜 일정 속에서 2, 3학년들은 우승을 위해 기합이 단단하게 들어가 있었다. 사와무라는 덩달아 긴장하고 기합을 넣고 다양한 선배들과 콤비를 짜고 연습을 했지만 여전히 주전에 이름을 올리는 일은 없었다. 우수한 선배들 틈에서도 쿠로오는 빛났다. 주장으로서도, 선수로서도. 그런 제 주장이 든든하고 자랑스럽고 존경스러웠다. 가까워 질 수 없는 거리감은 여전히 슬펐지만 사와무라는 꾹 눌러 담았다. 배구는 즐거웠다. 강한 선배들에게 배울 것이 많았다. 감독님은 무섭고 훈련은 혹독했지만 사와무라는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절망감에 절어 아무것도 안하고 무력하게 있는 것 보다 고통스러운 훈련을 하고 나면 어쩐지 한걸음 나아간 것 같아 몸은 피곤해도 마음만은 후련했다.
카라스노의 져지를 입고 처음 들어선 센다이시 체육관의 높은 천장과 에어사롱파스의 냄새. 그 곳에서 우뚝 선 저의 주장. 사와무라는 그 코트안을 동경했다. 정확히 그와 함께 서길 갈망했다. 제 우수한 선배들이 자랑스러우면서도 동시에 부러웠다. 감독의 앞에 동그랗게 서서 의지를 다지고 손을 모아 구호를 외치는 그 일련의 과정들에서 사와무라는 고요히 제 자리를 지켰다. 착실하게 몸을 풀고 날아드는 공을 받아올리며 기합을 넣었다. 한명 한명 부원들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쿠로오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기합이 들어간 사와무라의 얼굴을 보며 쿠로오는 가볍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것만으로도 사와무라는 충분했다.
인터하이의 끝에 카라스노는 트로피를 안았다. 대표로 수상을 한 쿠로오가 트로피를 치켜들고 웃자 체육관 전체가 환호했다. 반짝반짝 빛나는 별들의 무리에서 정점에 선 쿠로오는 찬란했다. 사와무라는 눈이 부셔 조금 눈을 찡그렸다. 반동으로 눈가가 살짝 젖었다. 길을 잃은 동경심이 찬란한 빛무리의 주변을 머물다 연기처럼 흩어졌다. 감독님과 코치와 함께 식사를 하고 체육관으로 돌아와 오늘 경기에 대한 분석을 하고 내일은 연습이 없으니 푹 쉬라는 말과 함께 해산했다. 사와무라는 산더미처럼 쌓인 짐을 정리하고 마지막까지 꼼꼼하게 체육관 점검을 하고 문을 걸어 잠궜다. 부원들은 경기 후 몰려오는 피로에 벌써 돌아간지 오래였다. 잠긴 문을 밀어 한번 더 꼼꼼히 확인하고 고개를 돌리는데 눈 앞에 길게 그림자가 졌다.
“선배님.”
“문 다 잠궜어?”
고개를 끄덕이자 쿠로오가 손을 내민다. 그 손바닥 위에 열쇠를 내려놓고 스친 손길에 또 혼자 들뜬 기분이었다. 간질거리는 손가락으로 우물쭈물 가방을 고쳐매는 동안 쿠로오는 열쇠꾸러미를 갈무리해 제 가방 안주머니에 단단히 챙겨 넣는다. 갈까? 당연한 듯 쿠로오는 동행을 권하고 사와무라는 네, 하고 짧은 대답으로 쿵쾅대는 심장소리를 감추었다. 사박사박 걸음을 옮기며 사와무라는 아까부터 입안에 맴돌던 말을 조심스럽게 골라냈다.
“축하해요 선배님.”
“응? 내가 아니고 다 같이 한거야.”
“그래도..”
그래도, 라는 짧은 단어를 뱉고는 조금 머뭇거렸다. 그래도요. 저는 선배님을 동경해요. 그 말을 하면 쿠로오는 웃을지도 모르겠다. 고맙다 사와무라, 하고 대답도 다정히 들려줄 것이었다. 하지만 쿠로오는 알지 못할 것이다. 그 동경 안에 품은 마음이 어떤 것일지. 알아주길 원하면서도 알아버리는 것은 두려웠다.
“선배 졸업하지 마세요.”
“뭐야, 유급이라도 할까?”
“선배랑 같이 배구 하고 싶어요.”
“일학년 주제에 건방지게. 그러니까 얼른 주전으로 올라와라 사와무라.”
깔끔하게 닦인 길을 사박사박 걷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한여름의 밤공기는 미지근하고 습했다. 가끔 풀벌레소리가 들려왔다. 쿠로오는 낮게 웃는다. 사와무라는 행여 날뛰는 심장 소리가 밖으로 튀어나갈까봐 꿀꺽 침만 삼켰다. 언덕을 내려와 내일보자 하고 가볍게 손을 흔드는 쿠로오에게 허리굽혀 인사를 하고 오른쪽으로 꺾으며 사와무라는 꾹 삼키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선배랑 같이 배구 하고 싶어요.
그저 평범한 말일 뿐인데 고백이라도 한 것 마냥 귓밖으로 쿵쾅쿵쾅 심장소리가 튀어나왔다. 사와무라는 달아오른 얼굴로 도망치듯 어두운 골목길을 내달렸다. 알아버리는 것은 역시 두려웠다.
*
학업과 훈련의 연속으로 1학년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저에게 이만큼 빠른 시간은 과연 3학년인 쿠로오에게는 어떤 속도일까 가늠이 되지 않았다. 빠르게 달음박질 치는 쿠로오의 등을 바라보는 것 외에 사와무라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제가 배울만한 것을 기록하며 빌려온 비디오를 늦은 시간까지 보다 가만히 펜을 내려놓았다. 다른 학교와의 연습경기 영상 안에서 쿠로오는 빛났고 높이 날았다. 사와무라는 그 때 그 경기장 안에 서 있었지만 지금과 같은 거리감을 느꼈다. 뜨거운 체육관의 열기에도 마음은 서늘했다. 이제껏 해온 배구는 언제나 즐거웠다. 다만 가끔씩 홀로 서 있는 기분이 들곤 했다. 선명한 주장 마크와 함께 1번을 단 쿠로오의 등을 보며 품었던 동경은 어느 새 변질되어 있었다. 책상 위 한켠에 놓인 우유팩은 가만히 기억을 품고 있었다. 테트라팩 윗 부분에 쓰인 유통기한은 우유치고는 꽤 긴 시간을 기록하고 있었지만 이것도 언젠가는 끝이 올 것이었다. 제 이런 감정에도 유통기한이 있을까. 마시지 못한채 놓인 우유는 그 언젠가의 시간을 떠오르게 했다. 모니터 속 쿠로오의 모습을 보다가 입술을 달싹이다, 가만히 고개를 묻었다. 그의 옆에 선 모습을 상상한다. 자신이 받아 낸 공이 세터에게 깔끔하게 연결되고, 올라간 공을 그가 상대방의 코트에 내리 꽂고 팀원들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그는 제 등을 두드리며 잘했어 사와무라, 하고 칭찬을 할 것이다. 상상 속의 쿠로오는 여느 후배들에게도 다 친절했지만 특별히 저에게는 더욱 더 친절했다. 제가 품고 있는 특별한 감정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우쭐해서 그에게 고백하는 상상을 한다. 상상은 언제나 여기서 멈췄다. 그 뒤를 펼쳐보는 것은 언제나 사와무라에겐 두려움이었다.
변하는 건 없었다. 언제나와 같은 연습, 간혹 시도하는 새로운 작전들. 사와무라는 그 언젠가를 위해 2학년 선배와, 간혹 3학년 선배와 같이 페어가 되어 연습하곤 했다. 가끔은 쿠로오와 페어가 되는 날도 있었다. 적당히 긴장한 몸은 제법 좋은 움직임을 만들어 내곤했다. 칭찬을 받는 날이 많아졌다. 언제나 그렇듯 배구는 재밌었다. 뜨거운 여름을 가로질러 달력의 날짜를 지워가며 봄고 예선이 가까워졌다. 전국 출장을 노리며 잔뜩 기합이 들어간 카라스노 배구부에는 기대감에 찬 긴장이 맴돌았다.
“주장은 뭔가, 처음부터 1번이었던 것 같아요.”
연습으로 얼룩진 얼굴을 스포츠타월로 닦아내던 2학년 선배가 1학년의 말에 하하하 웃으며 동감한다. 그의 말에 사와무라도 동감했다. 누가 봐도 쿠로오는 강했다. 강한자들을 아우르는 리더쉽도 있었다. 어쩐지 서툰 자신 같은 1학년의 시기는 쿠로오에게 처음부터 없었던 것 같았다. 코치와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는 얼굴을 바라봤다. 그 안에는 여유로움도, 능숙함도 들어있었다. 2년이라는 시간은 그렇게 아득했다. 사와무라는 자신이 좋아하는 배구와 쿠로오의 사이에서 가끔은 망설이곤 했다. 조급함으로 제 자신을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지만 쿠로오가 코트에 서 있는 시간에 자신이 없는 건 싫었다. 그 어린 마음이 치고 올라올 때면 제가 어린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한다. 쿠로오는 자신 같은 어린 시절이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비교하는 것도 어리다는 증거일지도 몰랐다. 사와무라는 아직 어리네, 그가 장난처럼 웃는 상상을 하며 가만히 입술을 물었다. 시간은 가만히 흘러 제법 선선한 바람을 불러왔다. 봄고의 시작이었다.
높은 울리는 환호성 소리. 티비에서만 보던 도쿄 오렌지 코트. 그 곳에 서기 위해 오랜 시간 달려왔다. 거대한 열기 앞에 사와무라는 긴장하고 움츠러들었다. 단순히 크기에 압도 당한 것은 아니었다. 말하고 싶지 않은 긴장감과 두려움이 몰려왔다.
“카라스노!!!”
화잇!!! 손을 모아 우렁차게 구호를 외쳤다. 두려운 만큼 더 크게 외쳤다. 알 수 없는 불안감에도 사와무라는 부러 크게 기합을 넣으며 몸을 풀었다. 주전 선수의 목록에 사와무라는 끝내 올라가지 못했다. 대기선수 구역에서 사와무라는 힘껏 소리쳤다. 화이팅! 힘내요! 돈마이돈마이! 목이 메였다. 코트를 가로지르며 날아오르는 쿠로오의 등을 보며 어쩐지 목이 메였다. 시큰거리는 목구멍에는 그 어떤 패배감 같은 것이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 순간 한 순간이 소중했다. 선배들에게 조금 더 무대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조금 더 오랜 시간 같은 공간의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사와무라는 꿈같은 무대에서 높이 뛰어오르는 쿠로오를 지켜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제발
급하게 삼킨 숨에 귀가 멍멍했다. 긴 랠리의 끝에 쾅, 하고 공은 카라스노의 코트 안으로 내리 꽂혔다. 삐이익- 귀를 찢는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시합 종료를 알렸다. 전국 출장 그리고 4강 진출이라는 결과. 카라스노 배구부의 역사를 새롭게 쓴 성적이었다. 환호를 받으며 관중석에 인사를 하고 동그랗게 모여 쿠로오는 활짝 웃었다.
“잘싸웠다 우리 까마귀들!”
해맑은 듯, 개구진 듯, 다부진 얼굴로 웃는 쿠로오의 얼굴에는 후회도 미련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큰 성취감이 가득했다. 그야말로 주장의 얼굴이었다.
“이제 너희 세상이야. 마음껏 날개를 펼쳐야지.”
2학년과 1학년을 하나씩 바라보며 쿠로오는 웃었다. 사와무라는 그 말을 듣게 되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 쿠로오가 더 이상 함께 하지 못하는 배구를 하는 것이 겁이 났다. 든든한 주장이 없는 코트는 어쩐찌 외롭고 넓었다. 그렇게 말하면 쿠로오는 겁쟁이 사와무라, 하고 웃어줄까 그게 아니면 엄한 얼굴로 꾸짖을까. 쿠로오의 말이 끝나고 한명씩 흩어져 몸을 푸는데 덜컥 어깨를 잡혔다.
“이제 사와무라도 코트에 서겠구나.”
기쁜 얼굴을 해야할지 어떤 얼굴을 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복잡한 사와무라의 얼굴을 보며 쿠로오는 다 알것 같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툭툭 어깨를 두드리고 등을 문질러 주었다.
“재능 있는 1학년들이 많았는데 우리 때문에 빛을 보지 못한거 같아서 아쉽네.”
“아닙니다.”
“사와무라는 성실하니까 충분히 잘 할 수 있을거야.”
선배와 함께 할 순 없잖아요. 투정 부리면 웃어줄까. 시합에 진 다음이니까 어쩌면 예민할지도 몰랐다. 눈치 없는 후배는 되고 싶지 않았다. 생각이 쌓여갈 수록 입술은 굳게 닫혔다. 결국 감사합니다 하고 고개를 숙였다. 쿠로오는 가만히 어깨를 다독여준다.
“나도 사와무라랑 같이 코트에 서고 싶었어.”
쿠로오- 응? 코치님이 부르셔! 3학년 선배의 말에 쿠로오가 가만히 다독이던 손을 떼어내고 코치님이 계신 방향으로 걸어간다. 카라스노 유니폼을 입은 쿠로오를 이제 더는 볼 수 없다는 것이 사와무라에게는 팀이 지는 것 보다 큰 두려움이었다. 가방을 어깨에 매고 빠른 걸음으로 화장실로 뛰어들었다. 수도꼭지를 비틀자 찬물이 쏟아졌다. 마구잡이로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 눈치 없는 눈물도 쓸데 없는 미련도 씻겨내려가면 좋으련만. 그러기에 역시 사와무라는 아직 어렸다.
*
졸업식은 함박눈처럼 벛꽃잎이 나리는 날이었다. 온 세상이 봄바람인데 사와무라의 마음은 찬바람이 불었다. 오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던 날은 기어이 오고 말았다. 느릿하게 교복을 껴입고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눈 밑이 꺼슬했다. 손바닥으로 뺨을 몇번 두드리니 발갛게 뺨이 달아올랐다. 그래도 말라버린 듯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전학년들이 다 모인 교정은 소란했다. 강당에서 지루한 교장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졸업노래를 부르고 사와무라는 맥 없이 박수를 쳤다. 우르르 사람들이 강당 밖으로 몰려 나오고 약속 장소인 체육관 앞으로 향했다. 일찍 도착한 선배들과 동기들 사이에서 사와무라는 어색하게 웃었다. 눈 밑이 붉어진 사와무라를 보며 간간히 선배들은 웃곤했다. 봄 냄새가 가득 몰려왔다. 소란한 교정이 아득했다. 포근한 사람이 살랑하고 불면 벚꽃잎이 한아름 쏟아졌다.
“너 왜 이렇게 늦었어!”
선배 하나가 우렁차게 외쳤다. 그 목소리가 향한 곳에서 쿠로오가 뛰어왔다. 미안미안 내가 좀 늦었지. 주장이라고 늦으면 다냐. 우우. 장난기 가득 섞인 남고생들의 야유에 쿠로오는 외려 뻔뻔한 얼굴을 했다.
“원래 주인공이 제일 늦는거야.”
“아이고 네 그러십니까.”
와르르 웃어버린다. 다글다글 모인 부원들이 과장스럽게 웃어댔다. 사와무라는 하하, 작게 입안에서 웃음소리를 굴렸다.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단체 사진 찍자!”
누군가의 말에 신난 남고생들이 와글와글 요란했다. 사와무라는 2학년 선배한테 끌려 대강 앞줄에 끄트머리에 섰다. 쿠로오는 주장답게 제일 앞줄 중간에 쪼그려 앉아 장난스럽게 양손으로 V자를 그렸다. 삼각대와 타이머를 맞추고 와르르 뛰어온 선배가 외친다. 삼! 이! 일! 번쩍, 플래시가 터져 사와무라는 눈을 꾹 눌러 감았다.
“오 잘 나왔는데? 구도 좋다.”
“내가 사진 좀 찍잖아.”
으스대는 말에 와르르 모여들어 사진을 구경한다. 디지털 카메라의 액정 속엔 그들이 아름다운 청춘을 보냈을 체육관을 배경으로 부원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쿠로오는 연신 칭찬을 하며 들뜬 목소리였다. 한명씩 삼학년들이 번갈아 인사를 하며 어쩌면 마지막이 될 인사를 나누었다.
꿈뻑, 눈을 감았다 떴다. 눈 앞에 플래시의 잔상이 계속 남아 따가웠다. 연신 꿈뻑거리다가 지워지지 않는 잔상에 소매 끝으로 눈을 문질렀더니 소매끝이 흠뻑 젖었다. 아, 작게 내뱉은 말에 옆에 있던 선배들이 와아 소리를 지른다.
“사와무라 운다!!”
당황해서 팔을 들어 잽싸게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이미 장난감을 발견한 짓궂은 선배들이 가만 둘리 없었다. 와하하 웃는 목소리가 가까이 오고 카메라를 든 선배가 사와무라 우는 사진 찍자!! 하고 크게 외치는 소리가 어지럽게 섞였다.
“야 이렇게 귀여운 후배 왜 자꾸 괴롭히냐.”
밀려드는 당황스러움에 어쩔 줄 몰라 쩔쩔매는 사와무라의 앞에 어둑하게 그림자가 졌다. 웃음기 만연한 목소리의 쿠로오가 얼굴을 가리고 선 사와무라를 품안에 끌어안는다. 당황해서 엉망으로 삼킨 숨에 쿨럭쿨럭 재채기를 했다.
“선배들 졸업한다고 울다니 귀엽지 않냐. 야 너네도 좀 사와무라 닮아봐라.”
“에이, 하나도 안 섭섭한데요 저희들은.”
“이것들이. 감독님한테 말해서 연습량 늘리시라 한다?”
얼토당토 않은 말에 장난스럽게 에에에~~~ 하고 야유를 보낸다. 웃음소리가 요란하고 또 아득했다. 누군가가 나 슬슬 가봐야해, 하는 말을 선두로 아이들이 인사를 하고 우르르 제 친구들과 가족들에게로 흩어진다. 쿠로오는 사와무라의 어깨에 팔을 걸쳐 몸을 기대곤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해준다. 마지막까지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한 쿠로오가 기댔던 몸을 일으켜 품안에서 사와무라를 떼어낸다.
“다 울었어?”
“...네.”
“아니면 좀 더 울래?”
“아뇨..”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된 얼굴이 달아올랐다. 부끄럽고 민망하고 서러웠다. 젖은 소매로 다급하게 얼굴을 문질러 닦았다. 쿠로오는 앞에 선채 가만히 사와무라를 기다렸다. 괜히 민망해 코를 훌쩍 삼켰다.
“안 가셔두..돼요?”
“우리 후배가 이렇게 서럽게 우는데 어떻게 가.”
주머니를 뒤적여 쿠로오가 손수건을 내민다. 제 것이 있었지만 말 없이 쿠로오가 내미는 것을 받아들었다. 더럽힐 수 없어서 손 안에 꾹 말아쥐기만 했다. 쿠로오는 졸업장이 담긴 통을 어깨에 걸치며 웃는다.
“졸업해서 섭섭해?”
“네.”
대답하는데 다시 목이 뜨거워진다. 사와무라는 꾸욱 입술을 문다. 쿠로오는 가만히 웃고 있을 뿐이였다.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른 얼굴을 들어올리자 쿠로오의 가슴팍이 눈에 닿았다. 정갈한 가쿠란이 항상 멋있다고 생각했다.
“선배.”
“응?”
“단추..라도 주시면 안될까요.”
조금 계집애 같은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후회는 하고 싶지 않았다. 따끔한 목구멍으로 어렵게 말을 끄집어 냈다. 제 앞의 쿠로오는 듣기 좋은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웃는다.
“두번째 단추가 아니어도 되니까..”
뜨끈하게 달아오른 눈으로 차마 쿠로오를 올려다 볼 수 없었다. 다정한 선배는 후배의 말에 어떤 대답을 할까. 지금 이 순간에도 다정할 수 있나요 선배.
“이걸로도 괜찮아?”
손을 들어 제 목에 달린 단추를 망설임 없이 툭 뜯어낸다. 주먹 쥔 손이 눈 앞에 내밀어졌다. 실밥이 살짝 물린 단추가 쿠로오의 손바닥 위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꾸욱 입술을 깨물며 사와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심하면 또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첫번째 단추 받았으니까 1번 다는거야 사와무라. 응원하러 올테니까.”
알겠지? 속삭이듯 묻는 목소리에 사와무라는 끄덕였다. 손을 잡아끌어 손바닥 위에 단추를 올려준 쿠로오가 조심조심 손가락을 접어 단추를 쥐여준다. 울먹이는 얼굴을 끝까지 들지 못하자 쿠로오가 조심스레 품안에 사와무라를 끌어 안는다. 다독이며 등을 두드려주는 그 손길에 끝내 울어버렸다. 멀직이서 들리는 시끌시끌한 환호성과 귓가를 간지럽히는 따뜻한 봄바람과 기분 좋을 정도로 차분한 쿠로오의 심장소리 같은 것들이 아득했다.
졸업 축하해요. 안녕 내 첫사랑.
전하지 못한 말은 가만히 입안으로 삼켰다.
18살 쿠로오, 16살 사와무라
3학년과 1학년일 두 사람이 같은 학교 선후배였다면, 하는 마음에서 시작했습니다.
쿠로오에게 카라스노 유니폼과 가쿠란을 입히고 싶다는 사심 하나로 쿠로오는 카라스노의 주장이 되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보고 싶은 설정들이 몇개가 있어 열심히 넣어봤어요. 전하지 못한 동경과 애정 사이의 서툰 마음도 예쁘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 다이치는 1학년이라 스가보다 더 작던 귀여운 다이치로 설정하였습니다><
동경같은 첫사랑이 끝나고 찾아온 열병 후 성장통을 앓고 키가 큰다는 제 마음속의 설정이 있습니다 ㅋㅋ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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