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이니까 어린이를 만드는 글을 쓰고 싶던 욕망에서 출발한 글이지만 스테미너 부족으로 인해 떡이 안 나오게 된 글
아르바이트 월급을 받았다며 들뜬 목소리의 쿠로오는 양 손에 주렁주렁 맛있는 음식을 사서 들어왔다. 평소에는 침만 흘렸던 고급 초밥과 귀티나보이던 케잌 전문점의 쇼트케잌과 타르트, 아이스크림 등등 디저트에다가 병이 예뻐서 먹어보고 싶다고 지나가듯 말했던 와인까지. 쿠로오가 오기 전까지 집을 정리하고 있던 사와무라는 품에 가득 안겨주는 음식들에 조금 어안이 벙벙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쿠로오는 무언가 뿌듯한 얼굴이었다.
“이거 다 못 먹을거야.”
“괜찮아, 오늘은 사치 부리는 날이야.”
“월급 어차피 얼마 안되잖아.”
“맛있는거 사먹을 정도는 되니까 괜찮아.”
외투를 벗으며 옷이며 잡동사니를 모아두는 작은 방으로 들어간 쿠로오의 콧노래 소리가 느긋하게 흘러나왔다. 손 안에서 바스락, 마른 소리를 내며 구겨지는 종이가방을 가만히 안으며 사와무라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저녁메뉴에 대한 부담을 덜었으니 어깨는 가벼워졌지만 기분은 반대로 조금 무거워졌다. 조그만 방안에 놓여있는 작은 테이블에는 쿠로오가 사온 음식들을 다 올려둘 수 없었다.
쪼르륵, 맑은 소리를 내며 싸구려 유리컵에 와인이 담겼다. 잔도 사올걸 그랬나, 하고 너스레를 떠는 쿠로오에게 눈으로 핀잔을 주었다. 조금 둔탁한 소리와 함께 잔을 부딪히곤 와인을 삼켰다. 꽤 쓴맛이 강한 와인에 사와무라는 눈을 살짝 찡그렸다. 쿠로오는 입 안에서 와인을 조금 굴려보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커 없는건데 나쁘지 않네. 쿠로오는 혀를 내어 입술을 적시곤 잔에 든 와인을 마저 삼켰다. 목울대가 움직이는 걸 조금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낯선 와인이 확 올라오기라도 하는 듯 사와무라는 뜨거운 뺨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단정하게 모은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면 발끝에 쓸리는 다다미에서 쿰쿰한 냄새가 섞인 설은 풀냄새가 났다. 전철에서 내려서도 한참을 걸어야 하는 외곽지의 작고 낡은 아파트는 사와무라와 쿠로오의 나이를 합친 것 보다 더 오래 된 건물이었다. 사와무라는 이 곳에서 한손으로도 꼽을 수 없는 시간을 보냈지만 쿠로오는 비교적 최근 들어 이 곳에서 살게 되었다. 그것은 사와무라가 불안정해지기 시작할 무렵부터였다. 쿠로오의 배려가 고맙기도 했고 미안하기도 했지만 사와무라는 괜찮다고 말하지 않는 자신이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것. 사와무라는 꼼지락거리던 발등 위에 가만히 손바닥을 올려둔다.
“안 먹어?”
“맛있는게 너무 많아서 뭐부터 먹을지 고민하고 있었어.”
“이거 맛있다 야.”
쿠로오는 반드르르 윤기가 흐르는 초밥을 사와무라의 앞에 놓아주었다. 색깔과 무늬만 보고도 이건 도미니 방어니 줄줄 종류를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사와무라에겐 그냥 다 똑같은 초밥 중 하나였다. 다만 고급스러운 초밥이라는 건 잘 알겠다. 사와무라는 어설프게 웃으며 초밥을 집어들어 입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기대와 다르게 부드러운 생선을 씹자마자 확 풍기는 와사비의 향에 악! 하고 어설프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니까 내가 주는 건 조심했어야지, 방심하면 안돼요 사와무라군.”
킬킬킬 배를 잡고 웃는 쿠로오를 보며 사와무라는 어쩔 줄 모르고 손으로 코를 틀어 쥐었다. 와사비의 습격에 얼얼해진 입안에는 침이 한가득 고였다. 삼키지도 못하고 뱉지도 못하고 어설프게 쩔쩔매는 사와무라에게 쿠로오는 숨이 넘어가게 웃으며 옆에 둔 물컵을 건넸다. 물을 벌컥벌컥 삼키고 겨우 한숨 돌린 사와무라가 킬킬킬 웃는 쿠로오에게 눈을 흘겼다.
“재밌냐?”
“응. 재밌어.”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이 잦아들던 쿠로오가 코가 시뻘개진 사와무라의 얼굴을 보곤 다시 한번 웃음을 터트린다. 아직도 얼얼한 입안에 한번 더 물을 들이키는 사와무라를 지긋이 보며 쿠로오는 싸구려 유리컵에 담긴 와인을 느긋하게 삼켰다. 그 시선을 느끼며 사와무라는 느릿하게 숨을 쉬었다. 코끝을 건드리는 쿠로오의 향이 와인냄새와 뒤섞여 기분나쁜 두근거림을 불러일으켰다. 꿀꺽, 물인지 침인지 모를 것을 삼키는 소리가 귓가에 요란했다. 일회용 나무젓가락과 포장용기가 부스럭거리며 부딪히는 소리와 쿠로오의 목울대가 꿀꺽 뭔가를 삼키는 소리들이 두 사람 사이의 좁은 공간을 맴돌았다. 사와무라는 애꿋은 젓가락 끝을 씹다가 결국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왜 안 먹어?”
“아까 낮에 먹은게 아직 소화가 안되서. 이거 다 먹으면 디저트 못 먹을거 같아.”
어설프게 웃으면 쿠로오의 눈매는 조금 더 날카롭게 빛났다. 그렇구나, 다정한 듯한 목소리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사와무라는 목이 조이는 듯 답답함을 느끼며 어설프게 뺨을 쓸었다. 낯선 와인탓인지 뺨은 은근하게 열을 머금고 있었다. 쿠로오가 먹는 모습을 힐끔힐끔 바라보다가 어설프게 주먹을 말아쥐었다. 손바닥의 살갗이 마른 소리를 냈다. 쿠로오는 여전히 날카로운 눈매로 즐거운 듯 차분히 웃으며 제 앞의 만찬을 느긋하게 즐길 뿐이었다.
쿠로오가 사와무라의 좁고 낡은 집에 들어오게 된 것은 그러니까 고작 두어달 된 이야기였다. 쿠로오와는 그저 같은 수업을 듣는 과동기에 불과한 사이였다. 같이 듣게 된 수업에서 우연히 팀과제를 같이 하게 되지 않았다면 활동 영역도 다르고 같이 어울리는 무리도 다른 두 사람은 종강하고 졸업할 때 까지 인사 한번 하지 않을 사이였을지도 몰랐다. 같은 조가 되어서도 조원들의 틈바구니에서 두 사람이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눌 기회는 많지 않았고 그래봤자 과제에 관한 이야기가 전부일 뿐이었다. 별 다른 일 없이 하루하루는 바쁘게 흘러갔고 과제와 야간 아르바이트의 반복에 사와무라가 조금 지칠 때 쯤 벌어진 일이었다. 평소보다 조금 더 쉽게 지치는 몸이 올라간 기온 탓인가 싶을 때 쯤 별안간 사와무라는 쓰러졌다. 그것도 우연히 두 사람만이 자료조사를 위해 구립도서관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놀라 이름을 부르던 쿠로오는 사와무라의 열오른 손을 잡아쥐자 훅 끼치는 뜨거운 냄새에 사와무라에게 무슨 일이 닥친 건지 빠르게 판단해냈다.
“사와무라, 정신 차려. 여기서 너네 집 멀어?”
“아니, 가까, 가까워.”
헉헉 뜨거운 숨을 몰아쉬며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사와무라를 들쳐업고 알려주는 대로 사와무라의 집으로 간 쿠로오는 좁고 낡은 공간에 처음으로 발을 딛었다. 앓는 소리를 내며 달달 떨리는 몸을 이불에 눕혀주고 열이 올라 마른 입술을 가만히 엄지로 문질렀다.
“약은?”
“먹었, 먹었는데..”
달달 떨리는 몸이 자꾸 제 가슴께를 쥐어 뜯었다.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며 참는 사와무라는 곧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조그만 탁자 위에 놓인 약봉지를 가만히 보던 쿠로오는 약봉지 귀퉁이에 얇게 찍힌 유효기간을 읽고는 신경질적으로 혀를 찼다.
“사와무라. 이거 아는 사람은?”
“없, 없어, 아무도..”
벌벌 떨며 고개를 젓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손가락 끝이 벌겋게 몰리도록 제 가슴께를 뜯으며 몸을 만 사와무라가 겨우 입술을 달싹이며 목소리를 내었다.
“데려, 다 줘서, 고맙, 고마워. 이제 괜찮, 으니까.”
“괜찮기는.”
착 가라 앉은 목소리에 사와무라는 울먹이는 눈을 꾹 눌러 감았다. 오한이 들어 등줄기가 오싹하고 열이 올라 머리가 멍했다. 덜덜 떨리는 사와무라의 옆에 앉은 쿠로오가 단숨에 티셔츠를 벗어던졌다. 저도 모르게 사와무라는 눈꺼풀을 밀어올려 쿠로오를 바라보았다. 근육으로 잘 짜여진 밸런스 좋은 상체, 저절로 꿀꺽 침을 삼켰다. 은근하게 배여있는 매혹적인 페로몬. 쿠로오는 가만히 손을 내밀어 꽉 모은 사와무라의 다리 사이를 헤집었다.
“하윽...! 쿠로! 읏!!”
“약은 소용이 없고, 너 혼자 어떻게 하려고? 이렇게 줄줄 흘리고 있는거 동네방네 자랑할 셈이야?”
쿠로오가 헤집은 바지 안은 이미 질척하게 쿠로오의 손을 적시고 있었다. 쿠로오가 한마디씩 뱉을 때 마다 사와무라는 오싹하게 몸을 스치는 그 어떤 감각에 몸을 떨었다. 울고 싶은 기분과 목이 타는 갈증이 사와무라의 눈동자를 흔들었다. 쿠로오의 손길이 사와무라의 옷을 움켜쥐고 끌어내렸다. 진득하게 젖은 아래에 쿠로오는 입술을 끌어올렸고 사와무라는 저절로 다리를 벌렸다. 그렇게 정신 없이 쿠로오와 몸을 섞게 되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임신은 하지 않았지만 사와무라에게 예고없이 닥친 히트사이클은 이 후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게 되었다. 한번 헝클어진 히트사이클은 그 이후로도 안정되지 않아 결국 학교와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게 되었고 좁고 낡은 집안에 틀어박힐 수 밖에 없었다. 안정을 위해 애쓰던 생활은 단 한순간에 그렇게 무너지게 되었다. 좁은 방 안에서 무기력하게 앉아 있을 때면 종종 쿠로오가 찾아왔다. 동정심인지 어설픈 책임감인지 모르겠지만 사와무라는 그런 쿠로오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괴로울 때면 사와무라쪽에서 먼저 쿠로오를 부를 때도 있었고 그럴 때면 쿠로오는 아무말 없이 와서 열오른 사와무라를 안아주었다. 어찌해 줄 것도 아니고 어쩌해달라고 말할 수 없으면서도 쿠로오는 사와무라에게 다가왔고 사와무라는 쿠로오를 찾았다. 정신을 차렸더니 쿠로오는 좁고 낡은 공간에서 먹고 자고 섹스하고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 쿠로오에게 사와무라는 언제 돌아가느냐고 물어볼 수 없었다.
알파로 태어난 이상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사는 것이 가능했다. 잘 알지 못했지만 쿠로오는 꽤 좋은 집에서 생활하지 않았을까하고 사와무라는 종종 생각해보다가 울적해지곤 했다. 그런 쿠로오가 해본적도 없었을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까지 왜 이런 곳에서 생활하고 있는지 답을 생각하다가 먹이처럼 쿠로오가 내미는 온기에 입을 다물 뿐이었다.
“아, 다 먹었으면 내가 치울게.”
생각이 길어진 사이에 깨끗하게 음식을 비운 쿠로오가 하나씩 주섬주섬 일회용기를 포개고 있었다. 움찔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쿠로오는 고개를 저었다.
“됐어 이거 버리기만 하면 되는 걸. 오늘은 설거지 할 것도 없겠다.”
포장해 온 비닐봉지에 그대로 쓰레기들을 집어넣고 봉지를 꽉 조아 묶은 쿠로오가 현관입구에 봉지들을 내려두었다. 일반쓰레기와 일회용 용기들이 나란히 담긴채 놓였다. 좁은 공간은 몇발자국 걷지 않아도 금세 닿았다. 가만히 무릎을 모으고 앉은 채 쿠로오가 움직이는 걸 조심스레 눈으로 쫓았다. 쿠로오는 느긋한 듯 분주한 발걸음으로 화장실에서 뒤늦게 피로를 씻어냈다. 작은 테이블 위는 깨끗이 정돈되어 깔끔했다.
오늘 같이 별일이 없는 날에는 가벼운 이야기를 조금 나누곤 곧장 잠들곤 했다. 쿠로오는 쿰쿰하고 눅진한 냄새가 나는 좁은 방에서도 잘 잠들었다. 낡은 이불 위에 누운 쿠로오는 몇번이고 함께 누워도 낯설었다. 벽을 보고 누운 쿠로오의 옆에 사와무라는 천장을 보고 누웠다. 어색한 침묵이 감돌다가 곧 차분하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렸다. 도대체 이건 무슨 관계란 말인가. 사와무라는 모르겠다는 듯 눈을 감았다. 몇번이고 몸을 섞어도 쿠로오는 딱히 사와무라와 뭘 어찌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히트사이클이 없는 날에는 정말 밥만 먹고 돌아간 적도 많았다. 어설픈 동정심은 반대로 상처가 된다는 걸 쿠로오는 알고 있을까. 알고 있을리가 없다. 가해자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을테니. 사와무라는 가만히 쿠로오의 등을 껴안았다. 처음 안아보는 쿠로오의 등에 코를 박고 차분히 숨을 들이켰다. 달큰한 향이 흐르는 등과 어깨죽지, 목덜미가 유연한 선으로 연결되었다. 쿠로오의 뒷덜미에 가만히 입술을 묻었다. 남자다운 듯 하면서도 깔끔한 목선은 언제나 곁눈질로 훑어보기 바빴다. 츕,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가 벌어진 입술이 목덜미를 작게 베어물었다. 이를 세워 깨물고 싶은 충동이 사와무라의 가슴을 두드렸다. 그래봤자 아무것도 달라질 것은 없는데. 어찌 할 수 없는 걸 잘 알면서도 멈출 순 없는 욕심이었다. 말랑한 입술로 베어문 목덜미는 젖은 자국 이외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젖은 자국을 가만히 손가락으로 문질러 지우며 사와무라는 쓰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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