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다이 전력 60분
쿠로오 테츠로 X 사와무라 다이치
배구화를 살 목적이었던가. 간만에 번화가 쇼핑센터 스포츠용품점에 함께 나왔던 사와무라와 스가와라는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유명 체인 패밀리 레스토랑에 앉아 메뉴판을 가리키며 이것저것 주문했다. 체육하는 남자애들답게 토핑이 가득 올라간 함바그와 사이드메뉴 몇개를 주문한 두 사람은 점원이 물러나고 난 뒤 이것저것 오늘의 쇼핑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배구화, 서포터, 스포츠타월 등등 무슨 브랜드가 좋다느니 이번에 산건 어떻다느니 조금 수다를 떨다말고 사와무라는 가만히 뭔가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어쩐지 먼저 쇼핑을 오자고 제안한다 했더니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사와무라는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적어도 스가와라에게는 다 보였다. 같이 지낸 세월이 몇년인데 주장의 포커페이스는 스가와라에게는 훤이 속이 들여다 보이는 것이었다. 직원이 가져다 준 음료를 빨대로 뒤적거리던 사와무라가 크흠,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다.
“스가는 졸업하고 나면 어떡할거야?”
“나? 글쎄, 지금 성적으로는 쪼오금 힘들진 모르겠지만 목표로 하는 대학이 있으니까. 합격한다면 좋겠지.”
“그렇지.”
대학인가. 조그맣게 입 안에서 가볍게 단어를 곱씹은 사와무라가 빨대로 음료를 쪽 빨아당겼다. 앞니를 세워 까득까득 빨대 끝을 튕기다가 힐끔 스가와라를 쳐다본다. 그러니까, 다 보인다니까 다이치.
“할 말 있어?”
“...응.”
말해보라는 듯 스가와라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조금 가까워지는 스가와라의 몸에 사와무라가 입술을 한일자로 굳게 다물며 결심한 표정을 짓는다.
“쿠로오가..”
“응.”
“......”
쿠로오라면 네코마의 주장. 두 사람은 여름합숙을 계기로 사귀게 되었다. 그 연애의 시작을 한 여름밤의 장난같다고 스가와라는 생각했다. 뻣뻣해서 배구 외에는 전혀 관심 없는 것 같던 사와무라와 그 쿠로오와의 연애라니. 처음엔 조금 걱정했으나 다행히 두 사람은 잘 만나고 있는 것 같았고 공과 사를 구분하는 사와무라는 연애감정을 배구에까지 끌고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전보다 배구에 좀 더 날개가 달린 것 같다고 하면 조금 오바일까? 그런가 하면 또 혼자 핸드폰을 보며 미소짓는 주기가 는 것이, 연애에 이상전선도 없어 보였다. 그래서 사와무라가 한참을 머뭇거리다 던진 쿠로오가, 라는 말에 스가와라는 의아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막상 뱉어놓고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사와무라였다. 어흠, 크흠, 어설프게 목을 가다듬는 사와무라에게 스가와라는 툭, 가볍게 물었다.
“왜? 요즘 사이 별로야?”
“아니, 그런건 아니야.”
“그러게, 다이치 요즘 얼굴 좋아보여서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어.”
스가와라의 말에 사와무라가 머쓱하게 입술을 삐죽인다. 부끄러움을 참는 표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긋해진 귓볼에서는 다 티가 났다. 스가와라는 재촉하지 않고 얌전히, 느긋하게 뒷말을 기다렸다.
“쿠로가 말이야.”
“응.”
“얼마전에 연락이 왔는데..”
“그런데?”
“졸업하면..”
또 입술을 물고 꼬물락거린다. 보나마나 뻔하지 뭐. 졸업하면 도쿄에서 같이 대학 다닐래? 아니면 같이 자취할래? 뻔히 보이는 대답에도 스가와라는 인내심 좋게 기다려주었다. 뻣뻣한 사와무라에게는 좀 쑥스러운 말일지도 모른다.
“왜, 같이 대학 가쟤?”
“결혼하쟤.”
콜록ㅡ스가와라는 빨대로 음료를 빨아 당기다 말고 기침을 내뱉었다. 괜찮아? 사와무라는 다급하게 테이블 위에 놓인 냅킨을 뽑아 스가와라에게 건넸다.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고 바튼 기침을 하던 스가와라가 느릿하게 사와무라가 내미는 냅킨을 받아들었다. 내가 지금 뭘 들은거지? 스가와라는 제 귓가를 맴도는 사와무라의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
“뭐라, 뭐라고?”
“쿠로오가 결혼, 을 하자는거야.”
웃기지 않냐. 사와무라가 크흐흐 웃으며 덧붙였다. 스가와라는 아랫 입술에 맺혀 뚝뚝 떨어지는 음료를 냅킨으로 훔쳤다. 웃긴건 지금 니 얼굴이거든. 말도 못하게 웃긴 얼굴로 웃는 사와무라의 얼굴을 할 수만 있다면 거울을 들어 보여주고 싶었다.
“더 기다릴 수가 없다나 뭐라나. 손에 물 한방울 안 묻히고 행복하게 살게 해줄테니 결혼을 하자는거야.”
아주 이것들이 쌍으로 웃기고 있네. 어이가 없어서 스가와라는 한마디 하려다가 아주 엉망이 된 사와무라의 얼굴을 보고 이마를 짚었다. 동화속 꿈나라 어딘가를 헤메는 듯한 얼빠진 얼굴의 사와무라에게 쓴소리를 하고 싶었지만 스가와라는 꾸역꾸역 치솟아 오르는 말을 집어 삼켰다.
“진심이야?”
“모르지. 장난인지, 진심인지.”
사와무라는 어쩐지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 얼굴은 스가와라 마저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어쩐지 장난인거 같은데, 근데 이번은 좀 믿어주고 싶은게, 쿠로오가 이만한, 이따만한 빨간 장미꽃 다발을 내밀면서 그러지 않겠어. 결혼하자고. 처음엔 무슨 장난인가 싶었는데, 품속에서 떡하니 반지케이스까지 꺼내는거야.”
웃기지 않냐? 푸하하 웃어버리는 사와무라의 반응에 스가와라는 웃을 수도 없었다. 어디서부터 한마디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싶어 이쯤되니 자포자기 하는 심정이 되어버렸다.
“졸업하면 성인이니 못할 것도 없으니까,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대는 거야.”
“다이치ㅡ”
사와무라의 말을 중간에 끊은 스가와라가 가만히 바라보았다.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줄곧 이야기를 이어가던 사와무라는 어쩐지 목덜미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주 웃기지도 않아서. 스가와라는 피식 웃어버렸다.
“자랑하는거야?”
“음, 굳이 그런건 아닌데.”
티 났어? 장난스러운 말에 스가와라가 일부러 인상을 찌푸리는 시늉을 한다. 스가와라는 낡아빠진 쇼파에 풀썩 등을 묻었다. 타이밍 좋게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ㅡ하고 점원이 음식을 내어왔다. 지글지글 철판에 함바그 익는 소리와 코를 자극하는 냄새가 가득 찼다.
“핸드폰 대기화면에 있던 장미 꽃다발이 그거냐?”
“엇, 그건 언제 또 봤어?”
“어울리지도 않는 새빨간 꽃다발을 해놨는데 눈에 바로 들어오지 그럼.”
포크와 나이프로 먹음직스럽게 함바그를 썰며 키득키득 웃는다. 남자끼리 결혼이라니, 웃기지도 않는 얘긴데 사와무라가 어쩐지 신난 목소리로 그러고 있으니 두 사람의 연애놀음이 그럴싸해보이는 것이었다.
“아사히한테는 너 프로포즈 받은 얘기 했어?”
“아니, 그 애송이수염한테 말해봤자 걱정부터 할게 뻔하잖아.”
“그렇지.”
키들키들,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잠깐, 프로포즈?”
“야 그럼 결혼하자고 했지 장미 다발도 줬지 반지까지 준비했다며, 프로포즈 아니냐?”
“그렇게 되는거야?”
“그럼.”
아 그건 좀 곤란한데. 사와무라가 머쓱한 표정으로 뒷덜미를 긁적였다. 결혼하자는 되고 프로포즈는 안되는 거냐고, 웃기지도 않는 사와무라의 반응에 스가와라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까, 다 보인다니까 다이치. 너 지금 부끄러워 하고 있잖아. 웃기지도 않아서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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