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카와 토오루 X 사와무라 다이치
다소 짧은 감이 있으나 짧게 짧게 업로드 됩니다~
진득한 여름이 물러나고 공기에 문득 가을 냄새가 묻어왔다. 여전히 하루에도 몇번씩 오락가락 내렸다 그치는 비라든지, 종종 오키나와에 태풍이 온다는 기상정보 따위의, 아직은 여름의 흔적이 조금 남아 있는 계절. 2학기가 시작되어 교복도 가벼운 하복에서 단정한 춘추복으로 바뀌었다. 더위에 짧게 잘랐던 머리카락이 조금 길어 아, 다시 자르러 가야하나하는 고민을 조금. 아니, 이제 서늘해질거니까 조금만 더 견뎌볼까 하는 마음도 조금. 그냥 그런 계절이었다. 여름 방학의 들뜸이 가시고 중간고사의 긴장이 시작 되기 전의 미묘하게 여유로운 시간. 새로 꺼내 입은 교복의 소매 끝을 단정하게 다듬으며 어제 본 티비에서 본 가쉽거리 따위와 함께 이동 수업을 위해 걷고 있는데 복도 끝이 조금 소란스러웠다. 하이텐션의 목소리들이 잔뜩 엉켜 있는 것만 들어도 그 출처가 누군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으아, 오이카와다.”
미묘하게 아니꼬운 목소리로 내뱉어진 이름의 주인은 조금 차가워진 날씨 탓인지 단정한 아이보리색 니트를 입고는 여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하하, 가벼운 웃음과 밝은 색의 살짝 뒤집어진 머리카락, 그리고 단정하게 쓴 안경과 한 손에 든 교과서와 출석부. 점점 가까워지는 거리에 문득 시선이 마주하자 꾸벅 인사를 했다. 싱긋 웃는 시선이 잠시 머물다가 오이카와 선생님, 하고 부르는 학생들의 목소리에 거두어진다. 훤칠한 키에 잘 생긴 얼굴만으로도 인기 많을 법 한데, 센스 있는 말솜씨까지 갖췄으니 인기가 없을 수 없었다. 물론 너무 인기가 많아서 아니꼽게 여기는 애들도 몇 있고.
“아.”
웃음기 섞인 가벼운 목소리가 등 뒤에서 경쾌하게 돌아선다. 사와무라 군. 가벼운 목소리가 톡, 어깨를 건드린다.
“이따 점심시간에 잠시 학생회실에 들렀다 갈래? 잠깐 이야기 할게 있는데.”
얇고 매끄러운 입술이 싱긋 미소짓는다. 나는 머쓱하게 실내화를 신은 발바닥을 복도에 비비다가 예, 하고 겨우 들릴 정도로만 툭 대답을 내뱉었다. 이따 보자, 금세 사라지는 목소리를 따라 작게 시선을 옮겼다가, 친구들이 옮기는 발걸음에 뒤섞여 복도를 걸었다. 커다란 세계지도가 걸려있는 교실에서 조금 따분한 세계사 수업을 들으며 손에 쥔 샤프를 의미 없이 굴렸다. 올해 4월에 새로 부임한 오이카와 토오루 선생님은 조용한 학교에 제법 큰 이슈거리였다. 공부에 지친 입시반 학생들은 젊은 선생님의 등장만으로도 환호했다. 나라고 크게 다를 것은 없어서 와 잘생겼다, 꽤나 인기 많았겠네, 뭐 그런 생각을 하거나 수업 중 하는 가벼운 농담에 곧잘 웃고 뭐 그랬다. 학생들이랑 꽤 가깝다는 이유로 학생회 부 지도담당을 맡게 되어 이야기 할 시간이 꽤 늘었다던지, 뭐 그런 부가적인 요소들도 있지만. 손에서 샤프를 굴리다가 서너번쯤 툭, 떨어뜨렸을 때 수업이 끝나는 종소리가 울렸다. 진작 반쯤 책을 덮고 있던 애들이 와르르 책상에서 일어났다. 친구들에게 먼저가라는 인사를 하곤 책과 필통을 챙겨 일어섰다. 도시락을 먹기 위해 교실로 향하는 애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내가 향하는 곳은 학생회실. 가볍게 노크를 하자 미리 와 있었던 듯 들어오세요ㅡ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긴장한 주먹을 살짝 쥐었다가, 느슨하게 풀며 문을 열어젖혔다.
“안녕하세요.”
“아, 사와무라군. 왔어?”
생글생글 보기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오이카와 선생님은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나를 맞이했다. 이번에 춘추복으로 교복이 바뀌면서 복장 관련해서 이것저것 좀 이야기 할게 있어서 말이야. 가볍게 흥얼거리며 나를 테이블로 부른 선생님은 좀 전까지 앉아 있던 자리에 나를 앉히고는 잔뜩 놓여있는 프린트물을 하나하나 짚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이건 게시판에 붙일 것, 이건 학생회 아이들에게 전달할 것, 옆에 선 채로 살짝 상체를 숙여 한 손은 의자 등받이를, 한 손은 테이블을 짚고 선 선생님에게서 제법 어른스러운 향기가 났다. 향수일까, 아니면 스킨일까, 혹은 다른 냄새일까.
“다이치.”
문득 불린 이름에 놀라 움찔, 고개를 들자 제법 가까워진 얼굴이 빙긋이 미소짓고 있었다. 머쓱하게 시선을 피하자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뺨을 가볍게 쓸어온다. 살갗이 스친 자리마다 열꽃이 피어난다. 어쩔 줄 몰라 테이블 위에 올려둔 손가락 끝만 꼼지락 거리다가, 결국 이번에도 가까워진 얼굴을 피하지 못했다. 촉, 가볍게 닿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열이 확 오른다.
나는 이 사람과 연애를 하고 있다.
어찌하다가 사귀게 되었는지 선명하게 기억 나진 않는다. 다만, 어쩌다 보니 이러고 있었다. 학교 선생님과의 연애라니, 그것도 남자 선생님과의 연애라니, 세상이 뒤집힐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처럼 똑바로 굴러갔다. 해도 제대로 동쪽에서 떴고 서쪽으로 졌으며 여전히 그는 선생님이었고 나는 여전히 학생이었다. 당연하게도. 인기가 많아 얼마든지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그게 조금 부러웠었지만, 어째서인지 그런 선생님이 선택한 것은 나였다. 귀엽게 생겨먹은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 18살 남고생인 나를. 가볍게 닿은 입술이 쪽, 빨아당긴다. 뺨을 매만지는 손길이 간지러워 움찔, 몸을 뒤로 빼면 의자 등받이를 짚고 있는 팔에 뒤통수가 닿았다. 움찔, 어깨를 움츠리면 닿은 입술이 빙긋 미소 짓는다. 이러는게 처음도 아닌데 부끄럽고 민망하고 나 혼자 허둥지둥 하고 있다. 좀 더 깊숙하게 기울어지는 얼굴이 좀 더 파고들자 뺨 윗부분에 차가운 안경테가 닿는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비틀어 얼른 입술을 떼어냈다.
“학교에서 이러지 마세요.”
“으응, 선생님은 왠지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걸.”
“안돼요.”
힘주어 말해봤자 이미 얼굴은 얼룩덜룩 붉은 열꽃이 엉망으로 피어있을 것이 뻔했다. 선생님은 그런 나를 보며 웃고는 뺨을 쓸어준다. 남자답게 크고 긴 손가락이 꼼꼼히 얼굴을 매만진다. 그리곤 턱선을, 목덜미를 가만히 만진다.
“춘추복 입은 다이치를 보니까 참을 수 없어져서 말이야.”
사각사각 손가락 끝에 스치는 셔츠 소리에 귀가 간질거린다. 그러고 보니 긴소매의 교복 셔츠를 입고 이 사람과 연애를 한 적이 있었던가, 아마 더운 계절에 이 연애를 시작했던 것 같기도 하고. 목덜미 부근의 카라를 매만지던 손가락이 셔츠 단추를 만지작 거린다.
“진짜 그만하세요.”
“그래, 그만해야겠다.”
하하 웃으며 떨어진 손가락이 가슴께에 미지근한 열기를 남겨두었다.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들을 차근차근 정리하는 선생님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나 혼자 허둥대는 꼴인 것 같았다. 또래 친구들에게 꽤 어른스럽다는 평가도 듣고 나 자신도 스스로가 책임감 있는 성격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학생 회장도 맡게 되었고 꽤 잘 해내는, 어른을 목전에 둔 18살 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진짜 어른인 선생님 앞에서는 그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 처럼 느껴진다.
“그거 이따 층마다 게시판에 붙이고, 이번 주 주말에 시간 좀 낼까?”
“네?”
“좀 있으면 중간고사니까, 그 전에 얼른 데이트 해둬야지.”
중간고사, 라는 말에 한 번, 데이트, 라는 말에 한 번 더 놀랐다. 너무 놀라서 말을 잊어버렸다. 멍청해진 내 얼굴을 웃으며 바라본 선생님이 책상 위 프린트물을 하나로 모아 탁탁, 가볍게 쳐서 정리하더니 내 손을 끌어 쥐여준다. 손이 닿은 곳에 열기가 오른다.
“아직 단풍은 이르겠지만 교외로 바람 쐬러 가자. 괜찮지?”
“아, 네..”
“부모님한텐 잘 말씀드리구. 외박 허락 받고 와?”
“그게 지금 교사로서 할 말이라고 생각하세요?”
“지금 난 교사가 아니고 니 애인으로서 말하는거니까 괜찮아.”
당연하게도 한마디도 안 진 선생님은 내 어깰 잡고 몸을 돌려 문쪽을 향하게 한다. 양 손에 프린트물을 들고 있는 나를 친절하게 에스코트해 문까지 데려다 준 선생님이 문 손잡이를 잡으며 나머지 손으로 내 엉덩이를 가볍게 톡톡, 두들긴다.
“선생님, 이거 성희롱...!”
“애인으로서 하는거니까 괜찮다니까.”
짓궂게 웃는 저 얼굴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 안녕히 계세요! 고함치듯 인사하고는 학생회실을 뛰쳐나왔다. 쿵쾅거리며 뛰는 심장은 비단 달리고 있어서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주말, 데이트, 외박, 애인. 머릿속에서 선생님이 내뱉은 단어들이 엉망진창으로 쏟아져서 데굴데굴 굴러다닌다. 어쩜 좋아. 눈 앞이 어지러워 달리던 발을 멈추고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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