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카와 토오루 X 사와무라 다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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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바뀌면서 옷장 정리를 했다. 물론 옷장 정리를 한 것은 내가 아닌 엄마의 손길이었으므로 내가 했다 라고 할 순 없지만. 작년엔 분명히 이것도 입고 다니고 저것도 입고 다녔을 텐데 어쩐지 입을 옷이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내일 입고 나갈 옷이 없었다. 이건 어쩐지 너무 촌스러워 보이고 저건 너무 어린애 같아 보이고, 이건 너무 운동복 같고.. 하나하나 이유를 붙이며 제쳐놓다 보니 정말로 입을 옷이 하나도 없어서 엄마가 기껏 정리해둔 옷장을 다 헤집어 놓고서야 손을 멈출 수 있었다. 진짜 작년엔 뭘 입었을까. 한숨을 쉬며 옷을 던져 놓은 침대 위로 몸을 던져 묻었다. 사실 옷이라곤 전혀 신경쓰지 않는 편이라 입을게 없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그렇다고 교복을 입고 만날 순 없잖아. 모처럼의 주말 데이트이니 이왕이면 잘 차려입고 싶었는데 옷을 사러 갈 시간도 없으니 괜히 속상했다. 선생님은 멋있기만 한데 이럴 때 마다 나는 어린애인 걸 어쩔 수 없이 느껴버린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옷 좀 사다 놓고 패션 잡지도 좀 볼 걸 그랬지.
“모르겠다..”
푹신한 침대에 얼굴을 묻자 기분 좋은 이불의 촉감이 몸을 감쌌다. 슬슬 추워지는 계절을 맞이하여 어느 새 바뀌어있는 도톰한 이불이 사각거리며 몸에 달라붙는 기분이 꽤 좋았다. 조금 남아있는 여름의 기운도 밤이면 가시고 찬공기에 뒤섞여 찌르르 풀벌레 소리가 아득하게 들린다. 내일은 꽤 이른 시간부터 선생님을 만나기로 했으니 얼른 방 정리를 해야하는데 이불에 안긴 몸은 말랑하게 녹아들어 일어 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교외로 바람 쐬러 가자고 했으니 어딘가 멀리 갈지도 모르겠다. 마음 같아서는 전철을 타고 종점까지 구경을 가고 싶었지만 아마 무리겠지. 휴일에 선생님과 제자 단 둘이서 그렇게 전철을 타고 가는 걸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당장 무슨일이 벌어질까, 상상을 하려고 마음 먹는 것 조차 머리가 아팠다. 그래도 선생님과 손을 잡고 전철을 타는 상상을 하는 건 꽤 즐거운 일이라 가만히 전철의 진동과 잔잔한 소음과, 손에 잡히는 온기를 상상하며 나도 모르게 스르륵 잠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눈을 뜨면 벌써 이른 아침이었다. 당연하게도 옷은 엉망으로 침대 위에 널린 채로, 그 옷을 피해 쪼그린 자세로 누워 그대로 아침을 맞이하고 만 것이다. 벌떡 일어나 후다닥 거울을 보니 한쪽 뺨이 엉망으로 눌려 있었다. 이게 뭐야. 후다닥 얼굴을 주물러봤지만 부은 얼굴이 한 없이 못나게만 보여 괜시리 속이 상했다. 결국 옷도 못 골랐고 얼굴은 엉망이고 몸은 어설프게 결려 뻐근했다. 최악이네. 방문 너머로 달칵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주방에서 아침 준비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핸드폰을 켜 선생님에게 잘 잤냐는 문자를 남기고는 얼른 일어나 옷 정리를 하였다. 옷을 못 고른 것도 문제지만 이렇게 엉망인 방 꼴을 엄마에게 들켰다간 혼이 날게 뻔했기 때문이다.
오늘 입을 옷을 두어개 골라놓고 거의 정리를 마쳤을 무렵 핸드폰이 울렸다. 오늘은 꽤 답신이 늦은 편이라 생각하며 핸드폰을 열었을 때 액정에 뜬 답신은 미안해, 로 시작하는 문자였다. 그러니까 오늘은 몸이 안 좋으니까 쉬었으면 한다는. 놀라 바로 통화 버튼을 누르자 꽤 오랜 시간 신호음이 연결 되다가 전화가 연결 됐다.
- 응.
“괜찮으세요? 많이 안 좋으세요?”
-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어제 이불 안 덮고 잠들었더니 약간 감기 기운이 있네.
평소랑 비슷한 듯 하면서 조금 잠긴 목소리에 덜컥 심장이 내려 앉았다. 괜찮다고 연신 안심 시키는 말을 들으면서도 걱정이 되어 무엇 부터 이야기 해야할지 붙은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 좀 있으면 시험인데, 감기 옮길까봐 걱정돼서 그래.
“심한 거 아니에요?”
- 응, 심한 건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낮게 웃는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 조금 안심 했다. 지금 드는 생각이 조금 고집스러운 걸지도 모르겠지만 말하면 선생님은 무어라고 할까. 어리다고 꾸지람을 들을까, 혹은 그냥 웃으실까.
- .....다이치?
“네?”
- 아니, 아무 말 없길래 끊은 줄 알았어.
“...선생님 있잖아요.”
- 응.
“오늘 저, 선생님 집에 가서 병간호 해드리면 안되나요.”
잠시 수화기 너머가 조용했다. 역시 안 되는 말이었나. 이제 혼나려나, 끄응 미간을 좁히며 어깨를 늘어 트렸는데 수화기 너머에서 낮게 웃는 소리가 가만히 넘어왔다.
- 감기 옮을까봐 만나지 말쟸더니.
“그래도 오랜만에 주말 데이트잖아요. 감기 많이 안 심하시면 갈래요.”
- 음, 안 심하긴 한데.
“.....저 외박 허락도 받았단 말이에요.”
들리지도 않을테지만 슬쩍 방문 너머의 눈치를 한 번 살피고 목소리를 죽여 소근 거렸더니 선생님이 으하하하 웃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터져나왔다. 으, 이건 괜히 말했나 싶어 풀썩 침대 위로 몸을 묻으며 수화기를 고쳐쥐었다. 한참을 웃던 선생님이 조금 안정되는 듯 잘게 기침을 하며 하아, 한숨을 내쉰다.
“가지 말까요?”
- 언제 오지 말래?
단숨에 대답한 선생님이 받아적으라며 집 주소를 불러준다. 허둥지둥 책상 위에 있는 메모지에 급하게 옮겨적고 선생님이 두 세번 거듭 불러주는 주소를 틀린 곳 없나 몇번이고 확인 한 후에야 전화를 끊었다. 따끈하게 열기가 올라오기 시작한 핸드폰을 접으며 이불에 얼굴을 파묻었다. 내가 진짜 잘 한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선생님이 싫어하지 않는 것 같으니 그걸로 됐다 싶었다. 민망함이 스멀스멀 올라와 온몸이 간질거렸다.
“다이치!! 밥먹으러 내려와라!”
“네에!!”
문 너머로 들리는 엄마의 부름에 힘차게 대답을 하고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얼른 준비하고 고르다만 옷도 마저 고르고 우선 정신을 좀 차리고 움직여야 할 것 같아서 양 손으로 뺨을 찰싹찰싹 쳤다. 어쩐지 멍하게 들뜬 느낌이 들어 오히려 내가 감기가 오는게 아닌가 하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에서 삐로롱- 가벼운 알람음이 들려왔다. 의아한 얼굴로 핸드폰을 달칵, 열었다가 얼빠진 기분이 되고 말았다.
“엄마아!!! 나 밥 안먹어요!!!”
[택시비 줄테니까 지금 당장 택시 타고 날아올 것. 빨리 보고 싶어.]
*
몇번이고 읽어서 이제 외워버릴 것 같은 주소를 머릿속으로 다시 한 번 더 곱씹으면서 창 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학교와 엄청나게 멀지는 않은, 하지만 내가 거의 가본 적 없는 동네로 택시는 느긋하게 달렸다. 내가 조급한 탓인지 기사님이 지나칠 정도로 안전하게 운전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꽤 느긋한 속도로 달리던 택시는 한 고급 맨션의 지하 주차장으로 조심스레 미끄러져 들어갔다. 불안하게 창문에 붙어 힐끔힐끔 눈을 굴리고 있다가 낯 익은 얼굴에 나도 모르게 활짝 웃어버렸다.
“기사님, 저기에요 저기.”
혹시 지나칠까봐 몇번이고 얘기하자 기사님이 네- 하고 대답해 주며 천천히 속도를 늦춰준다. 정확하게 선생님의 앞에 도착한 택시 문이 달칵 열리자 나는 참지 못하고 뛰쳐 나왔다.
“천천히, 다칠라.”
푹신한 소재의 긴 가디건을 걸친 선생님은 조금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웃으며 나를 반겼다. 어제도 만났는데 어째서 이렇게 반가울 일인지 모르겠다. 선생님은 창문을 가볍게 노크해 내려간 창문으로 기사님께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내가 타고온 만큼의 택시비를 지불한다. 언듯 보인 지폐의 액수가 상당해 어쩐지 죄송한 기분이 들었다. 택시가 가볍게 미끄러져 맨션의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하곤 선생님이 내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맨션 안으로 들어간다.
“택시비 많이 나왔어요?”
“괜찮아. 내가 타고 오라고 한거니까 넌 걱정하지마.”
“그래도..”
“덕분에 빨리 왔잖아.”
지하층의 엘리베이터를 누른 선생님이 부드럽게 웃는다. 학교 밖에서 만나는 선생님이 오랜만이라 마음이 간질거린다. 결국 한참 고민해 겨우 고른 하얀색 맨투맨티 끝을 가만히 매만졌다. 오랜만에 입어 어색한 옷에 몸이 배배 꼬일 것만 같다. 빈 엘리베이터가 도착해 올라타면 선생님은 12층을 누른다. 12층.. 12층.. 몇번이고 곱씹으면서 머리에 새긴다. 단 둘이 있는 공간이라 어쩐지 조금 긴장이 풀려 선생님의 가디건을 쥐고 조심스레 여며주었다.
“마중 안 나오셔도 되는데..”
“누가 너 잡아갈까봐 걱정되서 나왔지.”
“누가 잡아가요.”
“모르지 나 같은 도둑놈이 또 있을지?”
선생님 도둑놈 아닌데. 조그맣게 중얼거리면 피식 웃음으로 대답해준다. 땡, 하고 경쾌한 소리가 들리며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륵 열린다. 딱 보기에도 좋아보이는 맨션의 복도를 걸어 중간쯤에서 멈춰서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고층이라서 그런건지, 긴장해서 그런건지 어쩐지 산소가 조금 부족한 느낌이라 크게 숨을 들이 쉬었다. 실례하겠습니다아- 하고 선생님의 집안으로 들어섰다. 아, 선생님 냄새다. 익숙한 냄새가 코 끝으로 달려들자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너 온대서 급하게 치웠는데 좀 더러워도 이해해?”
“안 더러운데요? 완전 깨끗해요!”
가벼운 외출화를 툭 벗으며 집 안으로 들어선 선생님은 익숙하게 슬리퍼로 갈아신고 커피포트에 물을 올린다. 운동화를 벗으며 내 것으로 준비 된 실내용 슬리퍼를 슬쩍 신고는 집안으로 들어섰다. 깔끔한 집안은 온통 하얀색 가구라 단정해 보였다. 마치 잡지나 드라마에서나 나올법 한 방 안을 둘러보며 나도 모르게 우와- 하고 감탄사를 뱉었다. 이런 것 조차 선생님은 멋진 어른 같은데 나는 고작해야 오늘 입을 옷을 고민하는게 전부였다.
“그러고 보니 빈손으로 왔는데.”
“괜찮아, 몸 안 좋을거 같아서 어제 퇴근하면서 잔뜩 장 봐왔으니까 사왔어도 넣을데도 없을 걸?”
찬장에서 머그컵과 이것저것을 꺼낸 선생님은 능숙하게 차를 우린다. 그런 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번쩍 정신이 들어 바로 선생님의 곁으로 달려갔다. 선생님의 손을 탁, 단호하게 잡으니 선생님이 의아하게 바라본다.
“안돼요. 오늘은 제가 병간호 해드리러 온거니까 선생님은 어서 쉬세요.”
“알았어 차만 끓이고.”
“제가 할래요.”
고집스럽게 말하자 선생님이 웃으며 그래그래, 하고는 손에 쥐었던 것들을 놓고 한걸음 옆으로 물러선다. 차 정도야 손님이 왔을 때 몇번 끓여봤으니 못할 것도 없지, 하고 막상 잡았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차인지도 모르겠다. 대충 뜨거운 물 넣고 우리면 되겠지 싶어서 괜히 이것저것 만져보는데 선생님이 뒤에서 내 어깨를 끌어 안는다.
“좋다.”
“네?”
“그냥, 너 있으니까 좋다구.”
선생님의 말에 괜히 귓불이 붉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쩜 이런 낯부끄러운 말을 쉽게 하는지, 이래서 어른인건가 싶었다. 나는 좋다는 말 하나 하기도 어쩐지 겁이 나고 두렵고 부끄러운데 그런 내 몫만큼 언제나 선생님이 대신 말해주는 느낌이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몸이 딱 무거워서, 아, 오늘 안되겠구나 싶었거든. 근데 짜증이 딱 나잖아. 얼마나 기다린건데, 너한테 안된다고 말하기 너무 싫은데 그래도 너한테 옮기면 안되겠다 싶어서 눈 딱 감고 그렇게 메세지 보낸건데. 그런데 니가 온다고 그러니까 도저히 그 땐 거절이 안되더라고.”
“..그랬어요?”
“응, 그리고 니가 이렇게 온거 보니까 거절 안하길 잘 했다 싶기도 하고.”
살짝 기대어 목덜미에 닿은 선생님의 이마가 평소와는 조금 다른 체온을 담고 있어 걱정이 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선생님의 고백이 나쁘지 않아 나는 향긋하게 피어오르는 차의 향기를 맡으며 잠시 그렇게 서 있었다. 어린 마음으로 투정 부리길 잘했다 싶었다. 평소와 다르게 세팅되지 않은 자연스러운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뒷덜미에 닿고 비누 냄새 같은 부드러운 냄새가 맴돌았다. 방안에 차오르기 시작한 햇살이 따사로운 그런 주말의 오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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