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오 테츠로 X 사와무라 다이치
설탕님의 달성표 보상으로 리퀘 받은 동양 AU 쿠로다이 단편입니다.
서툴고 부족한 글이지만 즐겁게 읽어주시면 행복해집니다ㅠ0ㅠ
묵직한 소리가 쿵하고 울렸다. 길고 길었던 전쟁의 승리를 축하하는 연회가 시작됨을 알리는 북소리가 땅 속에서 끓어오른 듯 무겁고 웅장했다. 굳게 닫혔던 궁궐 문이 열리고 식량이며 옷감을 나누기 위해 곳간의 문이 활짝 열렸다. 궁궐의 앞뜰에는 백성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저마다 품에 한아름씩 하사품을 안고서는 그들의 황제가 계신 곳으로 고개를 조아리며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오랜 전쟁에 지쳤을 군인들에게 충분한 포상과 휴가 또한 주어졌다. 왕실 소유의 마굿간에는 전쟁의 묵은 때를 벗고 반들하게 윤기가 흐르도록 손질 된 말들이 한가득 풀을 먹으며 한가로이 휴식하고 있었다. 시동들은 들뜬 걸음으로 저마다 연회에 필요한 물건들을 옮기느라 분주했고 곳곳에서 향긋하고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풍겼다.
여름이 끝나는 무렵부터 시작해 혹독하게 추운 겨울을 지나며 치른 지긋지긋할 정도로 길었던 전쟁이었다. 남의 것을 쟁취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한 방어적인 전쟁이었기에 쉽게 결판나지 않았던 탓도 있었다. 혹독하고 길었던 전쟁이었지만 피해는 적었다. 그들의 지혜로운 황제는 평화로운 일상에서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소중한 것을 지키는 것에 강한 군대였다. 새순이 솟을 무렵 거짓말처럼 적국은 백기를 들었다. 따사로운 봄과 함께 날아들어온 달콤한 승전보였다.
“폐하, 연회에 드실 시간이옵니다.”
시끌벅적한 바깥의 분위기와 달리 서재의 공기는 따뜻하고 고요했다. 전장에 나가있는 동안 산처럼 쌓인 공문을 읽고 있던 사와무라는 힐끔, 목소리가 들리는 장지문을 바라보았다. 기척은 하나. 오늘 하루 정도는 궁의 모든 이들의 휴식을 명했지만 재상은 그럴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안으로 들라.”
방금 다 읽은 공문을 돌돌 말아 옆에 둔 사와무라는 새 것을 집어 들며 명했다. 소리 없이 열렸다 닫힌 문으로 기척 없이 다가온 스가와라가 고개를 조아리며 조용히 허리를 굽힌다.
“오늘 하루 쯤은 쉬어도 된다 하였거늘.”
“폐하께서 쉬지 않으시는데 제가 어찌 쉬겠사옵니까.”
“지금 네 놈이 내 명을 거역하느냐?”
속에 담긴 단어와 다르게 웃음기를 잔뜩 머금은 사와무라의 말에 스가와라는 느긋하게 미소지으며 조금 더 머리를 조아린다.
“명을 거역한 죄 하찮은 목숨으로 치르겠사옵니다.”
“아서라, 여전히 네 농은 재미도 없구나.”
말과 다르게 낮게 너털웃음을 터트린 사와무라는 새로 펼친 공문으로 금세 시선을 옮겼다. 오랜 시간 동안 손질 된 종이의 묵은 냄새가 섞인 따스한 봄공기와 멀리서 들리는 흥겨운 가락이 마음을 흐뭇하게 했다. 공문의 내용들을 빠르게 훑는 사와무라의 행동에 스가와라는 머리를 조아린 자세 그대로 사와무라의 옆을 지키고 서 있는다. 승리를 축하하는 연회에 그들의 황제가 빠진다니 저잣거리 코흘리개 꼬맹이도 비웃을 일이거늘 정작 황제 본인는 개의치 않는 듯 서류나 뒤적이고 있는 것이었다. 이래가지고야 어디 황제의 위신이 서겠냐 싶어 전전긍긍한 스가와라의 속내 따윈 개의치 않는 듯 구는 행동이었다. 허례허식을 타파하고 축하할 일이 있으면 기꺼이 궁의 창고를 열어 젖히는 황제의 행동을 달가워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아니꼽게 여기는 자들 또한 있었다. 황제 된 자가 그런자들의 눈치마저 볼 필요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모난 행동을 해서 정을 맞을 필요는 없잖은가.
“연회에 드실 시간이옵니다 폐하.”
“연회는 쉬겠다고 미리 말하지 않았느냐.”
“참석해 마땅한 자리라고 미리 아뢰었지 않았사옵니까.”
“궁 전체에 휴식을 명했으니 그 안에는 나도 포함되어있지 않느냐.”
“황제를 연회자리에 뫼시지 못했으니 황태후 폐하께서 저에게 책임을 물으시지 않으시겠사옵니까. 가뜩이나 무능한 재상이라 마뜩찮아 하시는데 더 이상 눈 밖에 나면 정말로 제 하찮은 목숨이 간당거릴 것이옵니다.”
“스가와라.”
“뭐, 그리 된다 한들 궁에 들어온 순간 부터 하찮은 목숨을 폐하를 위해 바치기로 마음 먹었사오니 억울할 것도 없사옵니다만.”
드물게 이름까지 불렀거늘 스가와라의 말은 그야말로 청산유수였다. 궁안을 활개치고 다니던 조막만하던 시절부터 모셨던 제 황제였다. 약한 부분 정도는 제 손바닥을 보듯 훤했다. 예상대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못마땅한 얼굴이 기어이 손에 쥔 공문으로 쿡 쳐박혔다.
“얼마 안 남았으니 조금만 더 기다리거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연회복은 준비하지 말거라. 거추장스럽다.”
“승전을 축하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특상품을 고르고 또 골라 바친 백성들의 정성이 담긴 연회복이옵니다. 나랏님을 위한 백성들의 마음을 어찌 그리 몰라주십니까.”
“스가와라..”
어디 하나 제 마음대로 되는 구석이 없는 재상은 황제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느긋한 미소를 지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애초에 네 뜻대로 하려고 한게 아니더냐. 알아서 하거라.”
“어찌 감히 제가 폐하께 멋대로 굴겠사옵니까. 그런 발칙한 생각을 하다니 당장 목이 날아가도 할말이 없사옵니다.”
“몇 번을 들어도 재미 없는 농이로구나.”
졌다는 듯 사와무라는 보던 공문을 책상 위에 내려두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성큼성큼 걸어 서재를 나서는 사와무라의 뒤를 사뿐하게 스가와라가 뒤따랐다. 멀리서 황제의 걸음을 반기듯 경쾌한 음악이 울려퍼졌다.
*
시야를 어지럽히는 색색의 옷을 입은 무희들이 화려하게 연회장을 수놓고 있었다. 흥을 돋우는 음악과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무겁지 않은 주제의 대화들이 가득했다. 연회장에 사와무라가 들어서자 음악과 대화가 멎으며 자리한 모든 이들이 황제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황제의 자리를 향해 걷는 사와무라는 쓸데 없이 무거운 연회복 때문에 언짢은 기분을 억지로 감추며 미소지었다. 어차피 이 연회장에서 빳빳이 고개를 들어 황제의 얼굴을 볼 대범한 자는 없겠지만 어렸을 때 부터 몸에 밴 황실의 예법이라는 것은 쉽게 버릴 수 없었다.
“기나긴 전쟁에 백성들과 병사들, 그리고 대신들까지 모두 고생이 많았소. 오늘은 승리를 축하하기 위한 자리이니 시름은 덜고 다들 즐겁게 즐겼으면 하오.”
사와무라의 힘있는 목소리에 사람들은 머리를 조아리며 자애로운 황제의 은혜에 감사했다. 사와무라의 가벼운 손짓으로 다시 흥겨운 음악이 울려퍼졌고 사람들의 즐거운 대화가 이어졌다. 사와무라는 자리에 앉으며 흐트러진 제 예복자락을 가볍게 정돈했다. 연회자리를 좋아하지 않아 핑계거리를 대며 빠지기 일쑤였는데 어쩔 수 없이 붙들려 있으려니 벌써 죽을 맛이었다. 자애롭게 미소짓는 얼굴에 숨겨진 불편한 기색을 읽은 스가와라가 재빨리 사와무라의 옆으로 다가가 허리를 숙인다.
“폐하, 많이 불편하시옵니까.”
“불편한 자리에 불러놓고 불편하느냐 묻는게냐.”
“여기 모인 사람들이 폐하의 은혜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응당 참석해야 할 자리이옵니다.”
“알고 있다.”
작게 속삭인 사와무라가 꾸며낸 미소가 아닌 진심으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미소짓는다.
“네가 왜 그렇게까지 날 이 자리에 앉혀두고 싶어하는 지도 잘 알고 있으니 더 이상 묻지 말거라. 적당히 얼굴 비추다 들어가볼테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사와무라를 향하는 뒤엉킨 시선들이 마냥 선망을 담은 것만은 아니었다. 황제를 향한 은애의 시선의 뒤에 날카로운 칼붙이를 숨기고 있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황제는 그 자들의 위에서도 자애롭게 군림해야했다. 사와무라는 그들의 뜻대로 사사로운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는 어리석은 사내는 아니었다. 사와무라의 방어적인 전술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대신들이 꽤 있는 것을 잘 알았기에 이번 전쟁에서 더더욱 패할 수 없었다. 지키기 위한 전쟁에서 그치지 않고 영토를 더 확장하길 원하는 목소리들은 언제나 사와무라를 괴롭혔다. 까마득한 선대에서는 전쟁을 즐겨하고 영토를 드넓혔더라는 이야기는 역사서에서 읽은 적이 있었지만 그건 사와무라가 원하는 나라가 아니었다. 욕심을 위해 불필요한 피를 손에 묻히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에 적국의 포로들도 전쟁이 끝난 후엔 자신의 나라로 되돌려보냈다. 그 문제에서도 대신들의 반발이 심했지만 사와무라는 관련된 상소문을 단호하게 돌려보냈다.
한가득 차려진 상에는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많았지만 사와무라는 입에 대지 않은 채 그저 작은 술잔만을 집어 들었다. 쌀이 유명한 지역에서 정성껏 빚어 진상한 술이 입술 새로 흘러 들었다. 향긋한 술내음과 보드러운 봄바람은 안주거리도 필요 없을만큼 훌륭했다. 경쾌하게 울리던 연회의 음악이 잦아들었다. 팔랑이던 형형색색의 무희들은 빙그르 움직임을 정리하며 가벼운 걸음으로 물러났다. 깨끗하게 빈 연회장의 중심에 붉은 옷을 입은 사내가 올라섰다. 큰 신장에 비해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손가락 사이에 끼운 정교하게 세공된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사와무라는 힐끗 옆에 선 스가와라를 바라보았다.
“포로를 풀어주신 자애로운 황제의 은혜에 감사하며 이번 연회를 축하하고자 조공으로 보내온 무용수이옵니다.”
“그런가.”
“제일가는 궁중 무용수로 춤솜씨가 아주 빼어나다고 하옵니다.”
가무에는 영 흥미가 없는 걸 잘 알면서도 스가와라가 굳이 올린 무용수라면 보지 않아도 실력이 상당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조금은 궁금해져 사와무라는 불편하던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 나라에서는 보기 드물 정도로 신장이 큰 사내는 윤기나는 검은 머리칼에 반쯤 가려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무엇으로 염색했을지 감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색을 내뿜고 있는 붉은 옷 위에 검은 실로 놓은 수는 화려함에 대한 고집이 엄청나 보였다. 과연, 칼을 든 장수들이 궁문을 열어젖히고 들이닥칠 때 까지도 술과 여자를 낀채였다던 망국의 복식다웠다. 그런 옷을 입고 선 사내의 모습은 과연 타국의 것임을 잘 알 수 있을 정도로 이질적이었다. 저 신장이라면 무용수라기 보단 장수가 더 어울리지 않은가. 사와무라는 사내의 몸을 가늠하며 전장을 누비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본적 없는 예법으로 인사를 올린 사내는 기묘한 자세를 잡으며 섰다. 음악을 준비하는 순간의 고요함이 연회장 안을 맴돌았다. 낯선 존재에 대한 호기심이 깃든 긴장감이 팽팽하게 공기를 당겼다. 그런 분위기를 비웃기라도 하듯 음악이 시작되자 남자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빙그르 자리에서 맴돌았다. 화려한 옷자락이 나긋하게 허공에 물결을 그리고 손 끝에서 부터 부드러운 움직임이 흘러내렸다.
고작 낯선 나라의 무용에 대한 호기심이라는 것으로 설명하면 지금 이 기분이 납득이 될 것인가. 남자가 움직이는 자리마다 허공에 붉은 잔상이 남았다. 마치 연회장 한 가운데 풍성한 모란이 피어나는 듯한 큰 궤적이었지만 그 중심에 선 무용수는 단 한 사람 뿐. 하지만 절대로 부족함 없이, 오히려 이런 화려함을 본적이나 있냐는 듯, 보란 듯이 온 몸으로 아름다움을 피워내고 있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발끝부터 손끝까지 허투루하는 움직임이 없었다. 기묘한 가락이 절정을 향해가고 사내의 몸짓도 점점 빠르게 달려나갔다. 느긋하게 시선을 당기는 초반과는 전혀 다른 움직임이었다.
이것은 대단하다. 가무에 흥미라고는 전혀 없는 사와무라지만 그야말로 순수하게 감탄하고 있었다. 마치 이 연회장에 사내와 자신, 단 둘 밖에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압도적인 몰입감. 풀썩, 사내가 주저 앉고 조금 늦게 옷자락이 하늘하늘 내려앉았다. 눈 앞에 붉은 잔상이 어른거린다. 팽팽한 긴장감으로 숨을 쉴 수 없는 공기가 맴돌았으나 이윽고 조용히 손바닥이 맞부딪히는 소리로 정적이 부숴졌다. 사와무라의 박수를 시작으로 연회장에는 박수 갈채가 터져나왔다. 사내가 사와무라를 향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고개를 들어올리자 나긋한 봄바람이 가볍게 사내의 얼굴을 가리는 머리카락을 흐트렸다.
찰나에 시선이 마주한다. 붉은 노을이 일렁이는 이방인의 눈동자. 저절로 입 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마음에 드시었는지요.”
나긋한 스가와라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사내와 단 둘만이 존재하는 듯 했던 연회장에는 어느 새 다른 무희들이 흥겨운 가락에 맞추어 화려한 춤을 추고 있었다. 사와무라는 어설프게 입술을 끌어올려 웃음지었다.
“그래, 대단하더구나.”
“마음에 드시었다니 다행이옵니다.”
“저 자에게 큰 포상을 내려 돌아가는 길이 섭섭지 않게 하라.”
“조공으로 바쳐진 이상 저 자는 이 나라의 것입니다. 돌아가는 길이라 함은 저자가 머물 처소를 말씀하는 것이옵니까.”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점짓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는 사와무라의 얼굴을 본 스가와라가 이번만은 물러설 수 없다는 듯 단호한 목소리를 내었다.
“포로로 잡혔던 병사들까지 그렇게 다 보내주시고 조공으로 바쳐진 사내까지 되돌려 보내려 하시다니요. 황제 알기를 우습게 알고 손가락질하는 소리가 벌써 귀에 선합니다.”
단호한 스가와라의 얼굴과 말투에 사와무라는 살짝 눈썹을 찡그리며 턱을 괴었다. 이렇게까지 나오는 스가와라에게 무어라 더 할 수 있을 것인가. 턱을 괸 손바닥에 쥐여지는 뺨이 슬쩍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그래서 내가 우습게 보이는 소리를 듣고 있을 재상인가.”
“불지옥까지 쫓아가 그 자의 혀를 뽑아버리겠지요.”
하하하, 스가와라의 말에 사와무라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차분하게 표정을 정돈하고 선 스가와라가 조용히 사와무라만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목소리로 속삭였다.
“포로를 풀어주는 것은 폐하의 뜻을 따르겠지만 조공으로 들어온 것 까지는 아니되실겁니다.”
“어차피 재상의 뜻대로 하려고 한게 아니오. 알아서 하시게.”
사와무라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거운 연회복이 몸을 꽉 눌렀지만 개의치 않는 듯 가볍게 털고 일어섰다. 더 이상은 말릴 생각이 없는 듯 스가와라는 허리를 숙여 사와무라의 뒤를 따랐다. 사와무라의 뒤로 연회장에 모인 자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예를 갖춘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하지만 호쾌한 걸음으로 연회복자락을 가볍게 휘날리며 사와무라가 연회장에서 모습을 감추자 멈췄던 음악이 다시 시작된다.
*
가벼운 인기척에 고개를 들자 호롱불을 든 스가와라가 조용히 서재의 등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쌓인 공문을 읽느라 잠시 정신을 빼놓은 사이에 삽시간에 어두워진 주위를 확인한 사와무라가 그제야 자세를 조금 풀어냈다. 스가와라는 거추장스러운 연회복을 벗어던지고는 그대로 서재에 틀어박힌 사와무라를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불에 그을리는 기름냄새가 가만히 코끝을 간질였다. 아직도 한참 쌓인 서류더미를 힐끔 살핀 스가와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폐하, 조금 쉬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괜찮네, 그 동안 오래 자리를 비우지 않았는가.”
“건강을 해칠까 염려되옵니다.”
“재상은 그렇게 걱정이 많아 어찌 살아가는고?”
“제가 하는 일이 폐하를 걱정하는 것이니 소임을 다할 뿐이옵니다.”
조용히 답하는 스가와라에 사와무라는 빙긋이 미소지었다. 저녁도 걸렀으니 이 정도면 스가와라로서는 아주 많이 참아준 것이었다. 딱딱하게 굳은 어깨와 목덜미를 주무르며 사와무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서 내가 없는 사이에 재상이 아주 심심했겠구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 동안 심심했을 재상을 위해 내 오늘은 재상이랑 말동무 해주리다.”
사와무라의 말에 번지는 미소를 감추며 스가와라는 허리를 굽혔다. 몰두한 사와무라를 책상에서 일으키는 것만으로도 목표하는 바는 이룬 셈이었다. 궁녀에게 일러 간단한 다과를 준비하게 한 스가와라는 서재 한켠에 놓인 탁상으로 걸음을 향했다. 질 좋은 목재로 만들어 오랜 시간 정성들여 관리한 탁상은 나라의 크고작은 일부터 은밀한 사담까지 오가는 곳이었다. 선대에는 어떤 자들이 앉았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곳에 사와무라와 함께 앉는 것이 허락된 자는 오롯이 재상인 스가와라 뿐이었다. 준비된 다과가 놓이고 궁녀들이 물러나자 향긋한 차향을 맡으며 잠시 아무런 말 없이 가만히 앉아있었다. 이러한 날도 있는가 하면 자리에 앉기 전부터 쌓인 이야기를 마구 터트려대는 사와무라에게 스가와라가 참지 못하고 힐끔 눈치를 주는 날도 있었다. 한참을 가만히 앉아있는 사와무라를 보며 스가와라는 들고 있던 찻잔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역시 피곤하신 것이지요.”
“아니오. 단지 생각할 것이 조금.”
“예, 이것저것 많으시겠지요.”
가벼운 웃음 소리를 들으며 사와무라는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빼곡하던 글자들을 한참 읽어내려 피곤한 눈가가 시큰거렸다. 피로하지 않을리 없으나 다만 눈 앞에 닥친 것에 몰두하고 싶은 마음에 조금 무리를 했다. 미색의 종이 위에 한가득 쓰여진 검은 글자들이 눈 앞에 어른거렸다. 물에 번지는 먹물처럼 일그러지는 형상이었다가, 빙글빙글 맴돌았다가, 붉게 번져갔다.
“무용에 흥미가 없는 걸 알면서도 용케 무용수를 올렸소, 재상.”
“황제의 은혜에 감사해 가진 것 중 가장 귀한 것을 보냈다기에 폐하께 보인 것이옵니다. 불편하셨사옵니까.”
“불편했다면 재상이 여기에 나와 함께 앉아있었겠소?”
“가당치도 않사옵니다.”
시간이 지나 묽어진 붉은 모란꽃이 눈 앞에 일렁였다. 타국의 것이라 마음이 동하는 게 분명하다 몇번이고 되뇌었거늘 잔상은 여전한 채였다.
“포상은 내렸는가.”
“명을 따르었사옵니다.”
“서운치 않다던가.”
“황제를 욕보이겠사옵니까.”
그런가. 안도의 얼굴을 하면서도 개운치 않은 표정이었다. 말 없이 놓인 찻잔을 만지작거리는 사와무라의 얼굴을 보던 스가와라가 모른척 말을 꺼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아닐세.”
“제가 폐하를 한두해 모시겠습니까.”
저 말은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도 묻는 말이렸다. 사와무라는 씁쓸하게 웃으며 손에 쥔 찻잔을 말 없이 굴렸다.
“한나라의 황제라는 자가 이리도 알기 쉬운 얼굴을 해서야 어디 쓰겠는가.”
“그 황제가 두고 있는 재상이라는 자가 그리도 대단한 것이겠지요.”
저런 말을 황제의 앞에서도 눈하나 깜짝 안하고 하는 것이 스가와라의 대단한 점이라면 대단한 점이었다. 설핏 웃으며 사와무라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까 재상이 준비해 준 무대가 정말 좋았네. 본 적 없는 진귀한 광경이라 그만 넋을 놓고 보았지 뭔가.
“다만.”
“예.”
“계속 마음에 걸려서 말일세.”
“어떤 것이 그러신지요.”
어떤 것이냐고 말하면 턱, 하고 목구멍에 무언가 걸린 느낌이었다.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답답해 목구멍 안이 간질거렸다. 갑작스러운 사와무라의 침묵에도 스가와라는 재촉하지 않은 채 가만히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하ㅡ 결코 가볍지 않은 한숨이 터져나왔다. 스가와라는 찻잔을 내려놓는다.
“그 자를 부를까요.”
“지금?”
“조금이라도 이야기를 나누어보시면 어지러운 마음이 조금 정리가 되지 않으실까 합니다.
눈앞에 일렁이던 묽은 빛의 모란이 선연한 붉은 색으로 물들었다. 눈이 아릿할 정도로 진한, 붉디 붉은 잔상이 어지럽게 움직여 가슴이 뛰었다. 입 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차분하게 고개를 숙인 스가와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스가와라는 언제나 그러하듯 조용한 걸음으로 서재를 나섰다. 가볍게 마찰하는 문소리 이후로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 숨소리가 귓가에 크게 들렸다.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
“눈을 가리거라.”
뜨겁게 데운 잔이 차갑게 식었을 무렵, 장지문 너머로 천조각이 마찰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냥으로 사내보다도 더 큰 들짐승을 잡은 적도 있는 사와무라였건만 이유모를 긴장감이 드는 것이었다. 눈을 가린 채 스가와라를 따라 서재 안으로 들어온 사내는 스가와라의 행동을 따라 허리 굽혀 예를 표했다. 마치 눈을 가리지 않은 것처럼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재상은 그만 나가보셔도 좋소.”
“예, 폐하.”
조용히 뒷걸음질로 문까지 다가간 스가와라가 깊게 허리를 숙이며 조용히 문을 닫았다. 평소에는 소리도 없이 닫히는 문이었는데 오늘따라 소리가 둔탁했다.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가까이 오거라.”
조금 낮게 잠긴 사와무라의 목소리에 사내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눈이 보이는 듯 자연스럽게 걷던 사내가 어느즈음에서 우뚝 자리에 멈춘다. 천천히 허리를 굽히는 사내의 움직임에 사와무라는 고개를 저었다.
“조금 더 가까이 오너라.”
허리를 굽히다 만 자세로 사내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삐뚫어짐 없이 정갈한 걸음걸이었다. 바닥을 딛는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사뿐한 걸음이었으나 내딛음에 거침이 없었다. 조금 더 걸음을 옮긴 사내는 또 다시 자리에 멈춰 선다. 사내의 발끝을 부끄러울 새도 없이 쳐다보던 사와무라는 슬쩍 고개를 들었다.
까닭없이 애가 달았다. 갈증이 이는 목으로 다시 말했다. 조금 더 가까이 오너라. 사내는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조금만 더. 어차피 얼굴이 보이지도 않을터였다. 사와무라가 앉은 자리에서 고작 다섯걸음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사내는 다시 발걸음을 멈췄다. 아무말도 하지 않으면 숨소리마저 닿을 것만 같아 사와무라는 잠시 호흡을 쉬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더냐.”
“천한 것에 이름은 없사옵고 궁에서는 고양이로 불리었습니다.”
“사람이 태어나 어찌 이름이 없단 말이냐.”
“다섯 먹을 무렵 부모가 가난에 못 이겨 저를 궁에 팔아먹은 후로 이름 없이 불리는대로 살아왔습니다.”
사내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정작 사와무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부모란 자들이 어찌 그러한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가난은 나랏님도 어찌하실 수 없다 하질 않습니까. 덕분에 궁의 일을 배우면서 굶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그럼 네 부모는..”
“저를 판 돈으로 노름을 하다 큰 빚을 져 맞아 죽었는지 그 뒤론 소식도 알 수 없다 합니다.”
허, 기가 막혀 허탈한 소리가 저절로 흘렀다. 외려 공손하게 손을 모으고 선 사내는 남의 일인양 덤덤한 태도였다.
“무용은 언제부터 배웠느냐.”
“열살 때 부터입니다.”
“어쩌다 무용을 배웠느냐.”
“궁의 일을 하려니 모진 매질을 견딜 수 없어 지푸라기 잡듯 무용장님께 빌어 배웠습니다.”
사와무라의 말이 멎었다. 본적 없는 화려함으로 시선을 잡아끌던 사내의 이야기는 생각한 것과는 아주 다른 이야기들이었다. 내뱉는 숨이 조금 떨리는 것을 느낀 듯 사내는 조용히 머리를 조아리며 자세를 낮춘다.
“너는 내가 원망스럽진 않느냐.”
“무엇이 말입니까.”
“네 나라를 망하게 한 내가 원망스럽진 않느냐. 나라에서 손꼽는 무용수였다 들었다. 지위도 재산도 부족하진 않았을텐데 지금은 이렇게 나라를 망하게 한 곳에 바쳐진 신세지 않느냐.”
제 자신을 나무라듯 쏟아지는 목소리에는 어쩐지 씁쓸함이 묻어있었다. 전쟁은 괴로웠다.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남을 공격해야했다. 자신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 누군가는 자신의 나라를 잃어야 하는 것이었다. 사내는 사와무라의 말에 미동 없이 선 채 가만히 입을 열었다.
“원망스럽지 않사옵니다.”
“거짓을 고하지 않아도 된다.”
“주색을 탐하기 좋아하며 달콤한 아첨에 마음이 들썩이고 역병이 돌아도 궁에는 풍악이 끊이질 않고 가뭄에 홍수로 백성들이 배를 곯아 죽어가도 수랏상에는 산해진미가 끊이질 않는 그런 나라라면 차라리 망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간신들의 입놀림에 눈이 멀어 낡아빠진 군대로 영토를 넓힐 욕심이나 부렸으니 망하기를 자처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예를 갖추는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 든 말은 칼날과도 같았다. 가리어 온전히 보이지도 않는 사내의 얼굴에 스치는 분노는 고요하고도 날카로웠다. 사내의 말에 아무런 답도 할 수 없어 사와무라는 한숨으로 대신했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엉켜 흐린 느낌이었다. 자세를 낮춘 사내는 아무런 말도 없이 가만히 사와무라를 기다렸다.
“그것이 전쟁을 정당화를 시킬 순 없지 않느냐.”
“망국의 황제께서 가무를 즐긴 덕택에 천한 것이 무용이라는 것을 배워 지금 폐하의 용안을 마주하고 있으니 망국에도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말하는 것이 맹랑하구나.”
“이 곳에 드는 순간부터 어차피 제 것이 아닌 목숨이라 생각했사옵니다.”
가려져 알 수 없었으나 사내는 빙긋 미소짓고 있었다. 천천히 탁상에서 일어나 발걸음은 사내를 향했다. 사와무라는 조용히 손을 내밀어 사내의 눈을 가린 천을 살짝 끌러내렸다. 비단천이 쉽게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가까이에서 마주한 사내의 눈동자는 좁고 길었으나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짙은 검은 색이었다. 느긋한 사내의 얼굴을 보며 외려 제 쪽이 더 긴장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눈을 피하지 않는구나.”
“천것의 눈을 보려 직접 끌르신것이 아니신지요.”
“맞다.”
가볍게 미소지으며 사와무라는 사내의 얼굴께에 두었던 손을 거뒀다. 아마도 사내는 황제의 얼굴을 봤다는 것만으로도 서재를 나서면 쥐도 새도 모르게 처형당할지도 몰랐다. 심사가 뒤틀린 사와무라의 한마디에도 목숨이 오갈 상황에 사내의 언사는 거리낌이 없었다. 누군가는 그것에 노할지 모르겠지만 사와무라는 그런 사내가 퍽 마음에 들었다. 키가 제법 큰 사내였지만 예를 갖추어 낮춘 자세 덕분에 어렵지 않게 시선을 마주할 수 있었다. 말 없이 사내의 좁고 긴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스가와라의 단호함에 못 이긴척, 사내를 돌려보내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던가.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지 않고서야 한 나라의 황제라는 자가 이렇게 쉽게 마음이 들뜰 수가 있는 것인가. 가만히 손가락을 들어 사내의 눈밑을 가만히 쓸어보았다. 맹랑하게 대답하던 사내는 사와무라의 손길에 가만히 눈을 내려감았다. 사와무라는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거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을 감아 준 덕분에 이런 얼굴을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
사와무라는 사내를 쿠로오黒尾라고 불렀다.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그 어느 날이었다. 양손에 꼽을 수도 없는 시간 동안 이름 없이 살아왔던 사내는 개의치 않는단 얼굴을 했던 주제에 뛸듯이 기뻐했다. 이마가 바닥에 닿을 듯 하염 없이 고개를 조아리던 사내가 추었던 그 날의 춤은 잊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아니, 쿠로오가 추었던 춤은 단 하나도 잊을 수 없이 켜켜이 사와무라의 마음속에 쌓여만 갔다. 대신들과의 언쟁에 머리가 아픈 날이거나 피곤한 날엔 어김 없이 사와무라는 쿠로오를 불렀고 쿠로오는 언제든 사와무라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꽃이 피고 몇 날인가 지났지만 서늘함을 아직 품고 있는 밤공기에 유난스럽게 껴입혀진 옷이 답답했다. 답답하여 산책이나 하겠다는 말에 오히려 더 답답해지다니 이 것도 못할 짓이라 생각하며 사와무라는 잘 세공된 가죽신을 신었다. 마지막까지 매서운 눈으로 의관을 점검한 스가와라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분주하게 손을 더하던 궁녀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섰다.
“이렇게까지 해야겠소?”
“아직 밤에는 날이 차갑습니다 전하.”
“그럼 날이 추우니 산책에는 아무도 따르지 말게.”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전하.”
“추운 날씨에 감기라도 들면 어찌하는가. 재상도 따뜻한 차라도 마시며 쉬게.”
빙긋 웃으며 건네는 사와무라의 말에 스가와라의 얼굴이 순간 단호한 빛이 들었으나 그 보다 사와무라가 낮게 건네는 말이 더 빨랐다.
“사람들을 다 물리고 쿠로오를 불러주게.”
“전하..”
“혼자 있고 싶은데 워낙 재상이 걱정투성이라 쿠로오라도 데려 가야겠소.”
낮게 웃는 사와무라의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스가와라는 손을 들어 궁녀를 불러 무어라 일렀다. 종종걸음으로 물러나는 궁녀의 뒷모습을 힐끗 보며 사와무라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조금 덜 채워진 둥근 달이 휘영청 뜬 밝은 밤이었다. 조금은 차가우면서도 옅게 섞인 복사꽃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아주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 궁녀와 함께 온 쿠로오에게 가볍게 눈 인사를 한 사와무라가 부드럽게 웃으며 스가와라를 바라보았다.
“다녀오겠소. 재상도 들어가 쉬시오.”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전하.”
따르겠다 말하기도 전에 한번 더 이르는 사와무라의 말에 어쩔 수 없이 물러난 스가와라가 허리를 굽혔다. 말 없이 걸음을 옮기는 사와무라의 뒤를 따르는 쿠로오의 걸음이 조용했다. 겨울과 봄이 섞여 일렁이는 밤공기는 가만히 두 사람을 인적이 드문 뒤뜰로 이끌었다. 당연한 듯 황제의 뒤를 따르는 쿠로오의 발걸음이 사뭇 아쉬워 걸음을 멈추면 처음부터 그 곳에 있었다는 듯 가만히 멈추어 사와무라의 뒤에 선 채였다. 어쩔 수 없어 조금 보폭을 좁혀 걸어보면 어찌 사와무라의 속내를 알았는지 제법 넓은 보폭으로 사와무라에게 가까워진다. 이러니 내가 어찌 싫어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사와무라는 입꼬리를 실룩이고 만다.
“오늘은 달이 제법 밝구나.”
“내일이 보름이라 그런것이지요.”
“덕분에 등을 들어도 되지 않으니 얼마나 좋으냐.”
사와무라의 밝은 목소리에 쿠로오는 은근한 미소를 띄며 고개를 숙였다. 태양같은 황제가 달빛을 받아 들뜬 모습이 묘하게 느껴졌다. 봄을 맞아 파릇하게 물들기 시작한 뒷뜰을 느릿하게 걸었다.
“마련해준 처소는 지낼만 하느냐.”
“분에 넘치는 곳이라 감히 제가 머물러도 좋을 지 모르겠사옵니다.”
“제일가는 무용수에게 내 그만한 것도 못 내릴까.”
사와무라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감사의 마음을 담아 가만히 고개를 숙이는 쿠로오의 얼굴은 달빛을 그득하게 받아 훤히 보였다.
“부족한 것은 없느냐.”
“없사옵니다.”
“그럼 원하는 것은 없느냐.”
“머물 곳도, 이름도 받았으니 제가 감히 무얼 더 바라겠사옵니까.”
조근하게 내뱉는 말을 들으며 사와무라는 가만히 다가갔다. 이 나라에서는 나지 않는 이국의 향이 쿠로오에게서 풍겼다.
“쿠로오야.”
“예.”
“고개를 들거라.”
천천히, 내려깐 눈꺼풀을 들어올린다. 가만히 들어올린 얼굴을 마주하려면 조금 고개를 들어야했다. 감히 황제보다 높은 시선을 할 순 없다 몇번이고 만류했지만 사와무라는 그럴 때 마다 어명을 어기느냐며 으레 짓궂은 농을 던지곤 했다.
“어쩐지 너와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는구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나는 이렇게 마음이 편한데, 너는 타국에서 어쩌면 마음고생을 하고 있진 않을지 나는 항상 걱정이 된단다. 그러니까 원하는 것이 있다면 얼마든지, 언제든지 말을 해보려무나.”
사와무라의 말에 쿠로오가 느긋하게 눈꺼풀을 눌러감았다가 지긋이 들어올렸다. 거짓없이 마주하는 눈동자는 검으면서도 맑았다.
“제가 이 나라를 원한다 하면 어찌하려 하십니까.”
“네가 그럴 자였다면 이렇게 곁에 두지 않았겠지.”
이상할 정도로 올곧은 신뢰였다. 한낱 무용수에게 드는 이 마음을 황제인 사와무라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쿠로오는 가볍게 웃었다. 입술 사이로 작게 바람 새는 소리가 들렸다.
“춤을 춰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쿠로오의 말에 사와무라의 얼굴이 형용할 수 없는 형태로 일그러졌다. 부끄러움과 웃음을 꾹 눌러담는 형태에 저절로 쿠로오의 입술 끝에 미소가 번졌다. 모두의 위에 군림하는 황제의 이런 얼굴을 볼 수 있는 것도, 그런 얼굴을 하게 만드는 질문을 하는 것도 어쩌면 자신 뿐일지도 모른다는 당돌한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
“천한 것이 황송하옵게도 황제께 칭찬 받은 춤솜씨를 조금 알려드리면 어떨까 싶사옵니다.”
“지금?”
“예.”
대답과 함께 허리춤에 차고 있던 부채를 꺼내 든 쿠로오가 가로로 들어 무릎을 꿇고는 사와무라에게 내밀었다. 당황스러운 제안에 어찌할 줄을 몰라 얼떨결에 쿠로오가 내미는 부채를 받아 든 사와무라가 어찌할 줄 모르는 얼굴로 쿠로오를 내려보았다. 까만 머리통이 가만히 사와무라의 발끝을 주시하고 있었다. 빈 손으로 제 품 안쪽에서 작은 부채를 꺼내 든 쿠로오가 조심스럽게 일어나 사와무라에게서 한발짝 물러섰다.
“어렵지 않으실 것입니다 전하.”
“그러한가.”
“황제께 칭찬받은 대단한 실력이지 않습니까.”
“한마디도 지지 않는 말솜씨도 칭찬해줘야겠구나.”
피식 웃으며 사와무라가 쿠로오가 하는 대로 부채를 펼쳐 들었다. 아무도 오지 않는 뒷뜰에 부채를 든 두 남자가 마주보고 서서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쿠로오가 하는 모양을 따라 펼친 부채로 눈 아래를 가린 사와무라가 쿠로오가 하는 대로 천천히 팔을 움직였다. 어렵지 않은 동작이었기에 쑥스러움을 감춘 채 조금씩 몸을 움직였다. 꽤 움직였으나 서늘한 공기에 기분이 좋았다. 평소에 무예를 즐겨하는 덕분에 어렵지 않게 동작을 따라하는 사와무라는 점점 즐거운 얼굴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차르르, 맑은 소리를 내며 부채를 접는 것 까지 따라한 사와무라의 얼굴이 온전히 드러났다. 쿠로오는 손을 들어 박수를 치며 미소를 지었다.
“훌륭하십니다.”
“듣기 좋은 소리를 곧잘 하는구나.”
“없는 소리를 할리 있겠사옵니까.”
쿠로오는 접은 부채를 고쳐쥐며 말을 이어 나갔다.
“간단한 동작이오나 잘만 활용하면 훌륭한 호신술이 될 수도 있으니 익혀두시는 것도 좋으실 것입니다.”
“호오, 어떤 것이냐.”
“전하가 쥐고 계신 부채가 칼이라 생각하시고 저를 한번 찔러 보시겠사옵니까.”
쿠로오의 말에 흥미가 생긴 사와무라가 무용을 하듯 팔을 나긋하게 벌리고 선 쿠로오를 향해 부채를 고쳐쥐었다. 부채 치고는 제법 긴 덕분에 부족하기는 해도 제법 칼을 쥔 기분을 낼 수 있었다. 칼이라 마음을 고쳐먹자 웃는 낯이던 사와무라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뚫어져라 목표한 것을 바라보며 꼿꼿하게 허리를 세운다. 과연 그것으로도 기세가 대단해 쿠로오의 얼굴이 덩달아 진중해진다. 상대의 움직임을 주시하는 맹렬한 눈동자, 일렁이는 밤공기의 틈을 타 가볍게 발걸음을 옮긴 사와무라가 쿠로오에게 가볍게 접근해 단숨에 베어낼 듯 팔을 휘둘렀다. 빠른 공격이었으나 그보다 더 유연하고 날렵하게 움직여 공격을 피한 쿠로오가 단숨에 사와무라의 팔 아래로 파고들었다. 좋은 움직임이다. 역시 장수에 어울리는 인재가 아닌가. 사와무라의 찰나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쿠로오는 유연하게 팔을 휘둘렀다. 마치 춤을 추는 듯 유연하고 나긋하게 움직인 손에 쥔 부채의 끝이 사와무라의 손등을 짧게 내리쳤다. 단단하게 쥐었던 부채가 툭, 바닥으로 떨어진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얼떨떨한 사와무라는 온 몸이 굳은 듯 움직일 수 없었다. 미적지근한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와 옷자락을 장난스럽게 건드리고 달아난다. 멈추었던 호흡을 들이쉬자 가까이에서 쿠로오의 향이 풍겼다. 낯선 나라의 향. 하지만 단숨에 쿠로오가 떠오르는, 이젠 익숙해진 향. 뻐근하게 굳은 몸을 겨우 움직여 고개를 들자 한뼘도 되지 않는 거리에 쿠로오의 얼굴이 마주했다. 여전히 짙은, 좁고 긴 눈동자가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 사이로 보였다. 낮추었던 자세를 곧추세우려 움직이자 허리에 무언가 툭 다가와 닿는다. 단단하고 길다란 것의 감촉. 손에 쥔 부채로 사와무라의 허리를 지탱한 쿠로오가 천천히 제 몸쪽으로 팔을 당겼다.
홀린 듯이 쿠로오에게 이끌려 그 품에 안기듯 끌려갔다. 비집을 틈 없이 가까우면서도 닿지 않은 미묘한 거리. 사와무라는 내뱉던 숨을 참았다. 양 손에 부채의 양끝을 쥔 쿠로오가 제 품안에 들어온 사와무라를 가만히 내려본다. 감히 황제의 옥체에 닿을 순 없다는 듯 그렇게 가만히.
“원하는 것이 있다면 얼마든지, 언제든지 말하라 하셨지요.”
두텁게 껴입은 옷안으로 열이 올랐다. 방금 전 까지 움직이고 있었으니 당연한 열기였지만 그것과는 또 다른 열기라는 것을 사와무라는 잘 알 수 있었다. 달을 등지고 서 쿠로오의 얼굴이 조금 어두웠다. 나는 지금 네가 무슨 얼굴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사와무라는 가만히, 쿠로오를 올려다보았다. 훤하게 달빛을 받아 훤하게 드러난 사와무라의 얼굴을, 품안의 그 얼굴을 그저 하염없이 바라보던 쿠로오는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천천히 입술이 내려 앉았다. 긴장한 듯 조금 건조한 입술이 거칠하게 사와무라에게 닿았다. 살며시 닿았을 뿐인 입술은 금세 물러났다.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원한다 할지언정 말해선 안되겠지요.”
허리를 받치고 있던 부채를 쥔 손이 느슨하게 풀려나갔다. 사와무라에게서 한 걸음 물러난 쿠로오가 부채를 갈무리하여 제 품 안으로 밀어넣었다. 허리를 숙여 사와무라의 발치에 떨어진 긴 부채를 집어 든 쿠로오가 정갈한 손놀림으로 정리를 하여 제 허리춤에 다시 꽂아둔다. 덜 찬 보름의 달빛이 그득히 쏟아졌다. 사와무라는 얼른 고개를 돌려 들킬새라 엉망이 된 제 얼굴을 감추었다. 그래봤자 붉어진 목덜미와 귓불이 훤히 드러나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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