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다이 | B6 138p | R-19 | 14,000원
2017년 11월 25일 쿠로다이 온리전 발매 | 판매 중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반짝 떠졌다. 평일에 이렇게 일어나는 건 일 년에 몇 없는 날이었다. 그야말로 반짝, 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눈을 떴지만 머리 반쪽이 깬 느낌과는 다르게 몸은 아직 아침을 받아들이지 못한 듯 물 먹은 솜 마냥 늘어져 있었다. 찌뿌둥하고 어질어질한 느낌에 침대 위에 늘어진 채 머리맡에 놓아 둔 핸드폰을 들어 인터넷 뉴스 따위를 훑는다. 새로 갱신된 뉴스들의 헤드라인을 훑어보다가 흐트러진 이불을 끌어당겨 덮었다.
뺨에 닿는 공기가 살짝 차갑다. 히터 점검해야겠네. 주말쯤에 청소 좀 해야겠다. 아 다 귀찮아. 출근하기 싫다. 일찍 일어나니 이런 생각만 가득하다. 포근한 이불의 감촉을 뿌리치지 못하고 누워 있는데 기어이 알람이 울린다. 아, 이제는 정말 일어나야 할 시간이다.
알람이 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을 열었다. 날이 덜 밝은 걸 보니 확실히 겨울에 가까워져 가는 모양이었다. 테이블에 올려둔 물병을 집어 들고 미지근한 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슬슬 씻어야 하는데. 마음은 있는데 몸이 영 안 따라준다. 병뚜껑을 단단히 돌려 닫는데 띵동, 가벼운 알람이 울린다.
[좋은 아침.]
매일 같은 시간에 맞춰 둔 알람이 울리고 나면 어김없이 핸드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상대방에게서 오지 않으면 제가 먼저 보내는 날도 있었다. 특별할 것 없는 아침 인사지만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이걸 받아야 하루가 시작되는 기분이었다.
[일어났어?]
[오, 오늘은 웬일로 이렇게 일찍?]
[몰라 그냥 눈이 떠졌어. 나 씻을게.]
답장은 확인하지 않고 핸드폰을 내려두었다. 으드드, 뻣뻣하게 굳은 몸을 늘려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며 수건을 집어 들고 샤워실로 향했다.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을 뜬 걸 빼면 오늘도 이렇다 할 특별함 없이 하루가 시작 된다.
[전철 완전 만원이야. 피곤하다.]
[난 앉았지롱. 힘들겠다. 얼마나 남았어?]
[다섯 정거장.]
[조금만 버텨. 손잡이 잡았어?]
아니, 지금 두 다리로 지탱하고 서 있어. 이런 말을 하면 걱정할 테니 대충 응, 하고 대답한다. 전철이 멈추고 또 다시 우르르 사람들이 올라탄다. 도착하려면 아직 한참 남았다. 옆에 있는 아저씨가 손에 들고 있는 신문을 어깨너머로 힐끔 살핀다. 아침에 핸드폰으로도 읽었던 신문기사의 헤드라인이 눈에 들어온다. 밖은 춥지만 열차 안은 사람들의 체온으로 따끈했다. 피곤해. 눈을 끔뻑 감았다가 뜬다.
[출근했어?]
[시간 좀 남아서 커피 사가려고]
[난 좀 전에 도착했어. 오늘도 파이팅!]
[그래.]
짧은 답신 후 핸드폰을 코트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조금 손끝이 시릴 때 쯤 타이밍 좋게 따뜻한 커피가 나왔다. 향긋한 커피 냄새를 맡으니 조금 정신이 깨는 기분이다.
월말이 가까워져 오면서 회사는 조금씩 바빠지고 짧게나마 가지던 여유시간이 줄었다. 업무 시간이 되자마자 바쁘게 울리는 전화를 몇 통 받고 나니 출근길에 사온 커피는 어느 새 차갑게 식어 있었다. 아직 난방을 틀기엔 이른 계절이라 카디건을 가볍게 걸치고 빼곡하게 데이터가 넘어온 모니터에 집중했다.
지잉- 매너모드로 돌려둔 핸드폰이 가볍게 울린다. 식은 커피를 마시며 핸드폰을 집어 들자 정갈하게 차려진 음식 사진이 화면에 떠 있었다. 밥 생각은 따로 없었는데 사진을 보니 갑자기 뱃속이 꼬르륵 울리는 기분이다.
[점심 먹으러 왔다!]
[맛있겠네.]
[밥 먹었어?]
[조금 있다가 나가려구.]
[뭐 먹어?]
[고민 중.]
[맛있는 거 먹어야지.]
[시간 없어서 대충 먹을 듯. 든든하게 챙겨먹을게.]
[퇴근하고 저녁 먹을래?]
[야근 안하면.]
답신을 하고 바닥에 조금 남은 커피를 마저 털어 넣고 나자 모니터에 메일 전송완료 메시지가 뜬다. 텅 빈 컵을 휴지통에 던져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계를 들여다보니 점심시간이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
출근하자마자 바빴는데 오후라고 해서 한가할 리 없었다. 크지 않은 자잘한 일들이 쉴 틈 없이 밀려와 조금 정신이 없는 그런 하루였다. 차라리 조금 정신없을 정도로 바쁜 게 시간은 빨리 지나갔다. 퇴근 시간을 조금 남기고 나서야 겨우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으드드, 기지개를 켜며 책상 한 쪽에 쌓여있는 서류를 몇 개 뒤적였다. 조금 남았긴 하지만 내일 마무리해도 되겠지. 아직 옆 팀에서 안 넘어온 자료도 있고 하니. 아직 정리하고 있는 후배들에겐 미안하지만 퇴근 인사를 하며 옷을 들고 사무실을 나섰다. 사람들이 아직 몰리기 전의 엘리베이터를 운 좋게 한 번에 잡아탈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 한 쪽 구석에 조그맣게 달린 거울을 보며 슥슥, 손가락으로 머리를 정리했다. 음, 이 정도면 나쁘지 않네.
빨리 나왔다고 해도 퇴근 시간의 길거리는 어느 새 사람들로 가득했다. 통화를 하며 걷는 사람들, 식당으로 술을 한잔 걸치러 가는 사람들. 그렇게 사람들이 많은데 이상하게 쿠로오는 한 눈에 띄었다. 익숙한 얼굴이라서 일까. 하긴 훤칠한 키 덕분에 남들보다 머리가 더 빼꼼 나와있긴 했다. 아니다, 저 특이한 헤어스타일 때문인가. 에이, 알게 뭐야. 모르겠다. 사람들을 헤치며 가까이 다가가자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쿠로오가 어떻게 알았는지 타이밍 좋게 고개를 든다.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든다.
“퇴근 축하.”
“얼른 먹으러 가자, 배고파.”
“라면?”
“응.”
당연하게 들려오는 물음에 당연하게 대답한다. 누가 뭐라 먼저 말하지 않아도 발걸음을 옮기는 방향은 같았다. 가까워진 어깨가 사람들에게 밀려 살짝 닿는다.
쿠로오와 이런 사이가 된 것은 언제부터라고 규정 짓기 힘들었다. 그나마 기준을 세워 가장 최근에, 라고 한다면 한 달 전 이야기다. 그리고 가장 처음, 이라고 말한다면 벌써 4년도 넘은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다시 설명하자면 이별했다가 다시 만나게 된 사이이다. 헤어진 연인과 다시 만나서 잘 될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될까? 이별한 연인과 재회하여 결혼까지 갈 확률은 고작 4%미만이라던데. 하긴, 자신과 쿠로오는 결혼씩이나 할 관계는 아니니까 굳이 확률로 따지자면 0%에 가까운 사이일 것이다.
헤어질 때는 뭔가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텐데 이만큼이나 시간이 지나니 이상할 정도로 떠오르지 않았다. 다시 만나게 된 계기도 생각나지 않았다. 별 다른 계기도, 이유도 없이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일상을 수시로 공유하고 퇴근 후에 심심하면 불러서 이렇게 저녁이나 같이 먹고 이야기나 좀 하는 그런 관계다. 이걸 사귄다고 정의 할 수 있을까? 연인처럼 연락하고 데이트라고 명명해도 나쁘지 않을 만남을 유지 하는데 사와무라는 어쩐지 이 관계에 사귄다, 라는 말을 갖다 붙이기엔 영 머쓱했다.
주문한 라면이 두 사람 앞에 놓였다. 퇴근 후의 샐러리맨들이 복작거리는 라면가게는 점원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수시로 들려왔다. 밥파인 쿠로오는 공기밥을 곁들인다. 사와무라는 차슈 추가. 일주일에 두어 번은 먹는 것 같은 메뉴였다. 길가엔 사람들이 북적인다. 할로윈이니 뭐니 하는 이벤트 광고지가 사방에 널려있다. 얼마 전 까지 여름 피크닉이니 어쩌니 하는 도시락 가게 앞에는 호박모양 풍선이 서 있었다.
“그러고 보니 곧 니가 좋아하는 감독 영화 개봉할 때 되지 않았냐?”
“응, 선예매권 미리 사뒀어.”
“그래?”
“…보러 갈래? 두 장인데.”
“그래도 돼?”
“안될 거 뭐 있어.”
쿠로오는 잠시 뭔가 생각하는 얼굴이었다가 곧 입을 다문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밥덩이가 와앙하고 들어간다. 너랑 같이 보려고 산 건데 안 될게 뭐 있어. 고민하던 말은 결국 밥알과 함께 삼킨다.
“특전 때문에 두 장 샀구나?”
“그러취. 소장용으로 하나 더 있어야지.”
어차피 이런 대답이나 할 사와무라였기 때문에 사실대로 말해봤자 득보다 실이 더 많을 것이다. 저 동그란 머리통 안에 너랑 같이 보기 위해서 내가 예매권을 두 장이나 샀다는 선택지는 들어있지 않은 모양이다. 하긴, 둘이 다시 이런 관계가 되기 전에 산 예매권이었다. 오히려 사와무라랑 같이 보기 위해서 산 제 자신이 더 이상하다면 이상했다. 아무렴 어때, 같이 보게 된 게 중요한 거지.
밥도 먹고 영화도 보고 그 누구보다 가까운 일상을 공유하면서도 더 이상은 없다. 그게 참 이상하지. 이렇다 할 스킨십도, 애정을 확인하는 행위도 없어서 가끔은 우리가 사귀고 있는 건지 궁금하기도 했다. 사귄다고 명명하기 어려운 관계라면 우리는 왜 이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까. 쿠로오는 그 답을 알고 있지만 사와무라가 먼저 말을 꺼내기 전에는 속에 꾹 담아둔다.
젓가락 끝으로 밥알을 동그랗게 뭉친다. 수저에 걸리는 대로 밥덩이를 입에 밀어 넣는 사와무라와는 다른 식사법이었다. 쿠로오는 맛깔나게 식사를 했다. 행동이 경망스럽지 않으면서도 보고 있는 상대가 군침 돌 정도로 맛있게 먹는다. 젓가락을 쥐는 손가락이나 그릇을 내려놓는 손길이 정갈하다. 얼굴은 양아치처럼 생긴 주제에. 이런 말은 입안에 꼭 넣어둔다.
피곤해서 술 한 잔을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둠이 내린 길은 혼자가 아니었다. 쿠로오는 별거 없는 일상을 쉬지 않고 이야기하는 희한한 능력을 가졌다. 들어보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인데 들을 때만큼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렇다고 말이 많은 것도 아니다. 사와무라는 쿠로오가 화술이 좋은 남자라고 생각했다. 기온이 내려간 초가을의 밤공기에 쿠로오의 목소리가 기분 좋게 섞인다.
“들어가서 쉬어.”
“온 김에 차라도 한 잔 마시고 갈래?”
“음.”
고민하는 얼굴. 쿠로오는 싱긋 웃는다.
“너 피곤해 보이니까 그냥 갈게.”
“괜찮은데.”
“들어가서 일찍 자.”
도착하면 전화할게. 손을 전화기 모양으로 만들어 귓가에서 살랑살랑 흔든 쿠로오가 다정한 얼굴로 사와무라를 바라본다. 너 들어가는 거 보고 갈게. 쿠로오의 말에 사와무라는 머뭇거리다가 결국 맨션 입구로 들어선다. 다정한 시선이 사와무라의 뒤를 따른다. 힐끔, 바라보면 시선이 마주친다. 차가워진 밤공기가 무색할 정도의 따뜻한 시선, 사와무라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번호키를 눌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신발을 벗고 베란다로 나가자 멀어지고 있는 쿠로오의 뒷모습이 보였다. 멀리서 보아도 단숨에 알 수 있다. 아마 사람들이 아주 많은 곳이나, 어딘지 모를 외국에 뚝 떨어져도 뒷모습만 봐도 쿠로오인 줄 알 수 있을 것이다. 쿠로오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 까지, 찬 공기에 몸이 조금 서늘하게 식을 때까지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피곤한 줄 어떻게 알았지.”
거절당하면 서운할 줄 알았는데 서운한 마음보다 고마운 마음이 더 컸다. 들렀다 가라는 말은 빈말은 아니었으나 사실 따뜻한 물에 피곤한 몸을 담그고 싶은 마음이 더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혹시 얼굴에 티가 났나. 차갑게 식은 손으로 애꿎은 뺨을 문질렀다. 뻣뻣하게 식은 몸을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풀어내고 욕실로 향한다.
*
첫 연애가 어땠는지 되새겨 보면 한참 전으로 돌아가야 했다. 길진 않지만 짧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아무렴 어때, 벌써 다 지난 옛날 이야기였다. 그보다는 어쩌다가 다시 만나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하는 게 더 생산적이겠다.
“그러게, 어쩌다가 다시 만났는데?”
“글쎄? 기억 안나.”
손에 든 캔 커피를 살랑살랑 원을 그리며 흔든다. 목구멍이 찌릿할 정도로 차가운 커피만 마시다가 오랜만에 따뜻한 커피를 마시니 몸이 노곤하게 녹는 기분이었다.
“애초에… 다시 만나는 건 맞나?”
“지금 그 말 걔가 들었으면 울겠다.”
키들키들 웃음기가 잔뜩 섞인 목소리로 말한 스가와라가 다 비운 캔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스가와라는 사와무라와 쿠로오의 관계를 처음부터 지금까지 꼬박 지켜봐온 유일한 지인이었다. 기쁨의 역사도, 구질구질한 역사도 다 봐온 지인이었으니 쿠로오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상대이기도 했다. 따사로운 햇살을 맞으며 노곤한 눈꺼풀을 차분히 감았다 떴다.
“연락도 꾸준히 하고, 퇴근하면 데이트도 하고. 왜 그런 생각을 해?”
“그냥.”
그러게, 데이트도 하고 수시로 연락도 하고. 뭐가 문제일까, 연인이라는 형태는 갖춰진 것 같은데…….
“……섹스가 없어서 그런가.”
컥, 옆에서 들리는 기침소리에 놀라 돌아보니 스가와라의 와이셔츠 앞이 커피로 잔뜩 얼룩져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보이냐?”
쿨럭쿨럭 잔기침을 밭으며 커피로 젖은 손을 탈탈 터는 스가와라에게 얼른 주머니 속의 손수건을 꺼내서 건넨다. 대충 털어내다가 이미 글러먹은 상태인 걸 깨달았는지 반쯤 포기한 얼굴이다.
“야 너.”
“응?”
“왜 내가 그런 거 까지, 아니지. 일단 밖에서 그런 얘기는 함부로 하지 마.”
여기 회사 근천데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와다다 내뱉으려던 말을 일단 삼킨 스가와라가 목소리를 낮춰 빠르게 말을 덧붙인다. 그 말에 그제야 주변을 휘휘 살피는 사와무라의 얼굴에 스가와라는 어쩐지 두통이 오는 기분이었다.
“뭐부터 말해야 하지……. 너네, 그, 안 해?”
“…다시 만나고 나선 아직.”
다이치는 딱히 섹스에 목매는 타입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내가 왜 이런 거까지 알아야 되냐고. 니네 성생활을 내가 알아서 뭐에 쓰겠냐고. 스가와라의 속이 시커멓게 곪아가든 말든 사와무라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어쩌다 다시 만나게 됐는지 기억났어.”
“어이구 그러셨어요?”
들어나 보자. 이미 스가와라는 체념한 얼굴이었다. 뭐 그리 대단한 이야기를 할 거라고 사와무라는 흠흠, 목을 가다듬는다.
그러니까 한 달 전쯤의 얘기다. 회사 일은 거지같았고 갱신 한지 얼마 되지 않은 정기권을 잃어버린 그런 재수 없는 날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전철 표를 끊으려 발매기 앞에서 지갑을 펼치자마자 윽,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하아, 재수도 없네. 하필 그날따라 잔돈이라곤 하나도 없는, 만엔짜리만 들어있는 그런 아주 이상한 날이었다. 저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려 쪼그려 앉았다. 야근을 마친 늦은 시간엔 지하철 역 안에 사람도 별로 없었다. 짜증스럽게 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기며 지폐 교환기를 찾으려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 핸드폰이 삐리릭 울린다.
회사에서 찾는 거면 내일 당장 사표를 내겠다고 해야지. 너절해진 이성으로 주머니 속 핸드폰을 집어 들어 액정에 뜬 번호를 본 순간, 사와무라는 날뛰던 머릿속이 차분해 지는 것을 느꼈다. 주소록에서 이미 지워버린 번호지만 수십, 수백 번도 넘게 봐 이미 머릿속에 콕 박힌 번호였다.
몇 번일지 모를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했다. 하지만 사와무라는 이 전화를 받는 순간 그 구질구질한 인연이 다시 이어질 것이라는 걸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 날 야근만 하지 않았어도. 아니, 부장에게 깨지지만 않았어도, 정기권을 잃어버리지만 않았어도. 머릿속으로 왁왁 변명거리를 내뱉어보았지만 이미 사와무라의 손은 통화버튼을 누른 뒤였다. 통화 내용은 그렇게 특별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은 무슨 얘기를 했었는지 거의 떠오르지 않았다. 아마도 만나자고 했었던가. 그 말에 그래, 지금 기분이 구질구질하니 술이라도 마시자고 했던 것 같다. 내일 출근이야 어떻게든 되라지. 막차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늦은 시간, 마침 근처라는 쿠로오의 연락을 받고 역 밖으로 나섰다. 몇 번이고 두 사람이 함께 했던 술집으로 가 자리를 잡고 메뉴판을 펼치지도 않고 익숙하게 주문을 했다. 시끌시끌한 사람들 덕분인지, 아니면 홧김이라는 게 무서운 건지 오랜만에 만난 쿠로오가 낯설지 않았다. 하긴, 낯설게 뭐 있을까. 벌써 몇 년이나 만나온 사이였다.
잘 지냈냐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이런저런 일상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엔 빙빙, 돌려 말했지만 술기운이 올라오자 사와무라의 푸념이 대부분인 대화였다. 다시 만나면 이번엔 어색할 줄 알았는데, 아직 어렴풋하게 정신이 남아 있을 때까진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 뒤로는 엉망진창으로 취했다. 오랜만에 만난 구남친 앞에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마시다니 정말 최악이었다. 다시 연락 한 쿠로오의 의도를 모르진 않았으나 이런 모습을 보였다간 도망가 버릴게 뻔했다.
물론 그것은 사와무라만의 생각이었던지 어렴풋이 정신을 차리자 러브호텔에서 쿠로오와 입을 맞추고 있었다. 빙빙 둘러 최근의 안부를 묻고 가벼운 말과 다정한 말로 감추어 봐도 그 속내는 두 사람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입을 맞추는 순간 명확하게 깨달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된 거다, 라고 사와무라는 생각했다. 몇 번이나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한 사이에 다시 사귀자라는 말을 하기엔 어쩐지 낯 간지러웠다. 그렇다고 입맞춤으로 만남을 확인하게 되다니,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정말 아니올시다였다.
“그렇다고 아닌 걸로 하지도 않는 걸 보면, 너도 마음 있는 거 아냐?”
“그러게.”
“뭐야, 결국 염장질이냐.”
“아냐, 그런 거랑은 조금 다른데.”
몇 번 입술을 달싹 거리다가 그만 두었다. 하긴, 제 마음을 저도 이해 못하는데 스가와라가 납득 할 수 있도록 설명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점심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 들어가기 싫다. 나두. 의미 없는 말을 나누며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긴다.
[영화 내일 보러 갈까?]
타이밍 좋게 핸드폰에 도착한 메시지를 들여다보았다. 아, 그러고 보니 내일 개봉이었던가. 출근길에 봤던 영화 홍보 포스터의 개봉 날짜를 떠올렸다. 내일, 내일이라.
“내일 야근 잡히면 진짜 부장 없애 버릴 거야.”
“여차하면 게거품 물고 뒤로 넘어가 버려. 내가 데려다 줄게.”
“너도 그러면서 야근 째려고?”
“역시 다이치 눈치는 빠르다니까.”
[알겠어. 몇 시 영화?]
스가와라와 잡담을 나누면서도 손가락은 부지런하게 답신을 보낸다. 하늘이 부쩍 높아진 걸 보니 정말 가을은 가을인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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