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다이 | A5 90p | R-19 | 쿠로다이 일러스트 떡메모지 | 9,000원
2016년 6월 4일 쿠로다이 교류회 발매 | 판매 종료
너와 나, 그리고
쩡─하고 공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지하철이 스쳐 지나갈 때 마다 매번 놀라던 소리에도 어느 새 익숙해졌다. 덜컹덜컹 흔들리는 조그만 전철 안에서 사람들은 제각각 책을 보거나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게임을 하거나 했다. 사와무라는 조금 낡은 엠피쓰리의 이어폰을 귀에 꽂고 조그만 버튼을 꾹꾹 눌러 몇 번이고 들어 죄다 외워버린 노래를 틀었다. 귀가하는 사람들의 냄새가 잔뜩 섞인 공간에서 사와무라는 건조한 눈꺼풀을 몇 번 깜빡였다. 교복을 입고 재잘거리는 학생들과 정장을 입고 지친 기색으로 귀가하는 사람들 틈에 섞여 번화가에 내렸다. 복잡한 골목을 익숙하게 걸어 제법 안쪽에 위치한 체인 편의점 안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왔어요?”
친절히 맞아주는 아르바이트생에게 인사를 한 사와무라가 곧 스태프룸으로 들어갔다. 유니폼을 갈아입고 단정하게 명찰까지 단 사와무라가 스태프룸에서 나왔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는 도쿄에 왔을 때부터 했던 일이니 모든 움직임에 군더더기는 없었다. 물건을 든 손님을 보고 카운터로 들어간 사와무라가 어서 오세요─익숙해진 인사말을 내뱉으며 손님이 내미는 상품의 바코드를 부지런히 찍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계약직으로 근무하는 사무실에 출근하고 퇴근하면 편의점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러 온다. 가끔 조건이 맞으면 야간이나 주말 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있었다. 돈이 되고 정신없이 시간을 버릴 수 있는 일이라면 아무거나 괜찮았다. 사와무라는 그렇게 맨몸으로 뛰어든 도쿄에서 살아남았다. 아는 사람이라곤 단 한 명도 없는 곳이었지만 그래서 더 좋았다. 저 마다의 사정으로 바쁜 도시가 사와무라는 퍽 마음에 들었다. 피곤해서 까슬해진 눈꺼풀을 꿈뻑이다가 찰랑거리며 울리는 종소리에 사와무라는 어서 오세요─하고 기계적으로 인사를 내뱉었다.
여러 사람들이 모이는 도시는 적당하게만 굴면 사람들은 사와무라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튀지 않게, 모나지 않게, 그렇게 버텼더니 정말 공기처럼 투명한 존재감으로 섞여들었다. 10조(帖) 가량의 작은 맨션, 끼니를 적당히 때울 수 있는 공간, 일하는 곳 몇 군데를 연락처로 등록해 둔 폴더형 구식 핸드폰. 그거면 생활하기에 충분했다. 다만 사와무라도 사람이었기에 마음이 허할 땐 조금 사치를 부려 책을 고르거나 영화를 보거나 했다. 사람들과 마음을 섞던 기특한 시기는 이미 지났다고 생각한다. 사와무라는 늦은 시간 일이 끝난 편의점을 나섰다. 서두르면 막차를 탈 수 있는 시간이었다.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사와무라는 조금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매일 타고 다니던 자전거 수리를 맡겨 며칠 간 전철 신세였다. 이번 달은 조금 아껴야겠다고 생각하며 자판기에서 표를 뽑았다. 막차에는 술 취한 회사원 몇 명과 드문드문 늦은 귀가를 하는 사람들이 조용히 자리했다. 주머니 속에 넣어둔 낡은 엠피쓰리를 꺼낸 사와무라는 달칵달칵 익숙하게 버튼을 누르곤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꺼슬한 눈꺼풀을 몇 번 꿈뻑인 사와무라는 안정적인 전철의 진동에 가만히 몸을 기댔다.
겨울의 끄트머리에도 추위는 기세를 꺾지 않았다. 개찰구에 표를 집어넣으며 훅 역사 안으로 끼쳐오는 바람에 사와무라는 어깨를 떨었다. 봄이 오긴 하는 걸까. 사와무라는 찬바람에 눈을 얇게 뜨며 자잘하고 높은 계단을 하나하나 꾹꾹 밟아 올라갔다. 겨울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아도 이 도시에도 봄은 올 것이다. 몇 년이고 겪어봤으면서도 어쩐지 사와무라는 봄이 오는 것에 조금 회의감이 드는 것이다. 자정을 넘겨 조용한 골목에는 잠든 사람들이 많은지 가로등만 조용히 사와무라를 비춰주고 있었다. 작게 내뱉은 숨이 하얗게 공중에서 맺혔다가 흩어졌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서야 사와무라는 제 작고 낡은 맨션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색 바랜 부직포로 어설프게 벽이 마감 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복도식으로 자잘하게 나열 된 문들을 스쳐 지나가다가 우뚝 발걸음을 멈췄다. 형광등마저 들지 않는 복도의 끝에 누군가가 조용히 웅크리고 있었다. 옆집인가, 하고 잠시 생각했다가 눈을 몇 번 깜빡여 피곤한 시야를 고쳐냈다. 분명 자신의 집 앞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이 시간에 누구지. 사와무라는 이 도시에서 그 누군가라는 존재를 만들지 않았다. 고작해야 일터의 동료들과 일적인 연락을 하긴 하지만 제 집 앞으로 부를 정도의 대단한 관계는 없었다. 술에 취해 잘못 찾아온 걸까. 위험한 사람이면 어쩌지, 경찰을 불러야 하나. 아니, 이 추운 날씨에 언제부터 저러고 있었던 거지. 괜찮은 걸까, 혹시 의식이라도 잃은 거면. 그렇게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사박이는 작은 발걸음 소리에 집 앞에 웅크리고 있던 사람이 무릎 사이에 묻고 있던 고개를 조심스럽게 들었다. 아직 앳된 끼가 조금 묻어 있는 젊은 남자였다. 키는 조금 클까, 웅크리고 있어서 잘 모르겠다. 집이라도 나온 듯 큰 가방을 옆에 두고 남자는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어설픈 어둠속에서도 똑바로 시선을 맞춰 오는 남자의 눈빛에 사와무라는 흠칫 놀랐다. 나쁜 사람인가, 라는 파악을 하기 전에 남자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더니 활짝 웃는다.
“다이치 형!”
뜬금없이 불린 이름에 사와무라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사와무라는 이 도시에서 줄곧 사와무라였다. 어디에 있든 사와무라상, 사와무라군 등으로 불렸다. 아무도 자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었다. 몇 년 만에 불린 이름이 낯설어 순간 제가 아닌데요, 라고 대답 할 뻔 했다. 남자는 웅크리고 있던 다리를 펴 일어서려 했지만 차가운 겨울 밤공기에 얼어붙은 다리는 한번 몸을 휘청하게 만들었다. 반쯤 엉성하게 접힌 몸은 언뜻 봐도 키가 제법 커보였다. 위협을 가한다면 해볼 만할까? 엉성하게 마르고 긴 남자의 몸을 보며 사와무라는 긴장해 침을 꿀꺽 삼켰다. 비틀거리며 저에게 다가오는 남자를 피해 사와무라는 반쯤 뒷걸음질을 쳤다. 낡은 복도의 형광등이 비정상적으로 떨렸다. 남자가 어설픈 빛이 드는 부근까지 걸어와서야 겨우 그의 얼굴이 보였다.
“잘 지냈어?”
사와무라는 제 앞의 남자를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조금 올려다보아야 겨우 눈이 맞았다. 고양이 같이 날렵한 눈매가 사와무라를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낯익으면서도 낯선 눈이었다. 사와무라는 주춤 어깨를 움츠렸다.
“…누구세요.”
사와무라의 말에 눈앞의 남자는 웃음을 터트렸다. 가벼운 웃음소리가 사와무라의 귀를 간지럽혔다.
“나야, 쿠로오.”
쿠로오, 쿠로오.. 사와무라는 입 안에서 이름을 굴려보았다. 낯선 듯 익숙한 이름을 몇 번이나 굴리고 나서야 번뜩 머릿속을 스치는 얼굴이 있었다.
“테…츠?”
“응.”
쿠로오 테츠로. 풀네임과 마지막으로 본 얼굴이 머릿속에 둥실 떠올랐다. 묻어두었던 기억들이 하나씩 고개를 들었다. 세상에. 사와무라는 입을 쩍 벌렸다. 그런 사와무라의 반응을 예상이라도 했던 것처럼 쿠로오는 씩 웃었다. 그야말로 세상에 였다.
“에엑, 그 땅꼬마 테츠??”
“땅꼬마까진 아니었거든.”
조금 발끈하며 돌아오는 대답에도 사와무라는 세상에, 라는 표정을 버릴 수 없었다. 그 테츠로? 코찔찔이 테츠로? 사와무라의 놀랐던 표정이 실실 우습게 풀렸다. 테츠, 하고 곱씹듯 내뱉은 이름에 삽시간에 흠뻑 행복에 젖은 표정이었다가 금세 또 탁 굳어버린다. 놀란 것처럼.
“어떻게…”
하고 내뱉곤 사와무라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른 채 벙긋하게 입술을 벌린 채 행동하는 것을 멈췄다. 무엇부터 말해야 할까. 복잡하게 쏟아지는 의문들이 삽시간에 차올라 숨이 턱 막혀왔다.
“우선.”
쿠로오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작게 내뱉는 사와무라의 소리에 쿠로오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 너무 추운데. 밖에서 진짜 오래 기다렸거든.”
살짝 파리한 입술 끝을 눈으로 재빨리 훑은 사와무라는 아무 말 없이 쿠로오를 스쳐지나 제 주머니 속으로 손을 찔러 넣었다. 손끝에 걸리는 열쇠를 잠시 매만졌다. 이대로 괜찮을까, 하고 물어보면 아니,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괜찮지 않았다. 조금 머뭇대다가 힐끔 뒤로 시선을 던지자 집어든 가방을 손바닥으로 팡팡 털곤 씩 웃는 쿠로오의 얼굴이 보였다. 사와무라는 열쇠를 꺼내어 맨션의 문을 열었다. 몇 켤레 없는 신발이 조금 정갈하게 놓인 좁은 현관, 10조(帖) 남짓한 좁은 사와무라의 공간에 낯선 체향이 성큼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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