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다이 | B6 120p | R-19 | 11,000원
2017년 1월 8일 대운동회 2회 발매 | 판매 종료
* 모브와의 강제적 관계를 암시하는 묘사가 포함 될 수 있습니다.
* 피스틸버스 AU 세계관에 대한 기본 설명을 알고 보셔야 이해하기 쉽습니다.
사와무라는 지금도 생각한다. 왜 하필 자신과 그 ‘쿠로오 테츠로’가 룸메이트로 배정된 건지. 어쩌면 운명의 장난 같은 거, 라고 생각하다가 고작 룸메이트 정도로 운명 운운하는 게 우스워 관두었다. 기숙사에 들어와 처음 만난 쿠로오는 말투가 정갈했고 몸가짐이 가벼운 듯 우아했으며 제법 사람들을 대하는 매너도 좋았다. 훤칠하게 뻗은 신장 덕분인지 모델처럼 무슨 옷을 입어도 어울렸다. 아직 2차 성징 전이라 슬쩍 까치발을 들어야 백칠십 언저리인 사와무라는 그런 쿠로오가 제법 부러웠다. 누구에게나 인기 좋은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 그런 주제에 세상 저 혼자 사는 것 마냥 성격이라도 더러웠다면 그제야 좀 아 신은 공평하구나,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쿠로오는 아직 어린애처럼 자라다만 조막만한 키에 사투리 섞인, 마냥 세상 서툰 티 나는 자신을 금세 몇 년 동안이고 알고 지낸 친구처럼 살갑게 대해주었다.
그런 대단한 쿠로오와 마주하고 있으면 가끔은 제 앳된 몸이 부끄럽기도 했다. 언 듯 듣기로 신장이 백팔십이 훌쩍 넘는다고 했으니 저와는 거의 이십 센티 가까이 차이 나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상대방은 신경조차 쓰지 않을 저 혼자만의 민망함과 부끄러움. 처음 만나 가벼운 통성명을 하고 금세 사람 좋은 웃음으로 대하는 쿠로오를 보고 룸메이트에 대한 느낌이 좋다며 신났던 바로 그 날, 사와무라는 훌렁 옷을 벗어던진 쿠로오의 등을 보고 놀라 입을 다물었다. 얼룩덜룩 화사한 꽃으로 수놓인 등은 사와무라가 처음 보는 미지의 것이었다. 전설처럼 말로만 듣던, 등을 수놓은 꽃무리들. 그것도 다양한 꽃이 뒤섞인 등을 보며 사와무라는 그 화려함에 눈앞이 살짝 어지러운 것을 느꼈다. 그러니까 왜 하필 성년을 맞이할 때 까지 각성통조차 겪지 못한 케일릭인 자신과 왜 그 ‘쿠로오 테츠로’가 룸메이트로 배정된 것이냐 이 말이었다.
사와무라 다이치는 동년배의 아이들과 비교하면 조금 달랐다. 어디가 그렇냐고 한다면 열아홉 성인이 되고 나서도 말끔한 등짝이 그랬다. 처음엔 미야기 촌구석에서 몇 없는 아이들과 자라왔기 때문에 제 경우가 그다지 특이하다는 자각이 없었다. 부모님도 그저 조금 늦된 것 뿐 아닐까, 가볍게 이야기 할 뿐. 그래서 별 대수롭지 않게 살아왔다. 자신이 조금 다른가? 하고 느낀 건 도쿄로 대학 진학을 하고 난 뒤였다. 도쿄 역에 처음으로 도착한 날, 인파 속에 파묻힌 사와무라는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간혹 패션으로 등이 파인 옷을 입은 사람들이 화려한 등을 자랑하듯 거리를 활보 할 때 마다 사와무라는 히익, 놀란 숨을 들이켰다. 뿐만 아니라 남자 기숙사에서도 쿠로오 말고도 제법 등이 화려한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혹은 화려함 까지는 아니더라도 등줄기를 타고 올라 날개 뼈까지 활짝 가지를 펼친 등이 보통이었다. 적어도 지금까지 사와무라는 저 말고 이 기숙사 내에서 말끔한 등짝을 가진 사람을 그 아무도 본 적이 없었다. 멋모르고 철딱서니 없이 벗은 상체로도 거리낌 없이 친구들과 놀던 자신의 행동들이 여기서는 얼마나 애송이 같은 것인지 자각한 순간부터 사와무라는 기숙사에서 절대 맨몸으로 다니는 일이 없었다.
조심한다고 해도 제 룸메이트에게만은 예외일 수 없었다. 물론 사와무라가 일부러 쿠로오에게 보란 듯이 제 맨 등을 내보인 것은 아니었다. 다만 조심성 없는 사와무라가 훌렁훌렁 옷을 갈아입다 말고 잠시 무방비하게 제 핸드폰에 쏟아진 친구들의 시덥잖은 라인 대화에 집중한 탓에 쿠로오가 방으로 들어오는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을 뿐이었다. 왁, 왁!!! 계집애 같은 반응인 주제에 전혀 귀엽지 않은 목소리로 소리를 빽 지른 사와무라가 허겁지겁 벗어던진 옷을 집어 들어 제 몸을 어설프게 가렸지만 쿠로오는 그런 사와무라를 보고 그저 미소 지을 뿐이었다.
“미안, 노크하고 들어왔어야 하는데.”
아니, 이쪽이 잘못 한 건데 왜 니가 사과를 해. 어리둥절한 사와무라의 얼굴에도 쿠로오는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침대 근처에 내려두고는 화장실로 가 문을 달칵 닫았다. 성인이 되어 대학을 다니는 지금까지도 케일릭이라는 사실을 꼬투리 잡아 혹여 놀리거나 조롱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알기라도 하는 듯. 사와무라는 서둘러 홈웨어로 갈아입으며 생각했다. 아, 저 녀석은 정말로 좋은 녀석이구나. 정말, 신은 불공평 하시지. 푸흐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가볍게 웃었다. 그렇게 아예 다른 세상에서 사는 사람 같던 쿠로오와는 의외로 맞는 부분이 많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쿠로오가 사와무라에게 조금 더 맞춰준 것이었으나 과정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사와무라는 제 룸메이트가 퍽 마음에 들었다.
*
열 명이 있다면 그 중에 세 명은 스테먼이다. 세 명에 들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피스틸로 살아간다. 사와무라는 아직 발현하지 않은 케일릭이었다. 스테먼이 될지 피스틸이 될지 모르는 모호한 존재. 하지만 드물게는 발현하지 않고 그대로 케일릭인 채로 살아가는 경우도 있다고 했으니 어쩌면 자신은 그런 경우일지도 모른다고 문득 생각하곤 한다.
사와무라는 태어나 제 아버지 외에는 스테먼의 존재를 본 적이 드물었다. 제 주변의 지인들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대부분이 피스틸로 발현되었다. 워낙 사람이 적은 동네인지라 그런 것이라고 어른들끼리 수군대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으나 스테먼이니 피스틸이니 하는 것들은, 사와무라로서는 아직까지 먼 이야기인 것만 같았다. 사와무라는 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제 친구들이 각성통을 앓는 것을 종종 경험하곤 했다. 뜨겁고 습윤한 공기가 가득 찬 공간에서 타는 듯 괴로워하던 친구들은 각성통이 끝나면 다른 사람처럼 변해있었다. 키가 쑥 커버린 친구들도 있었고 목소리가 굵어진 친구도, 얼굴이 어른처럼 변한 친구도 있었다. 누군가가 각성통을 경험하고 나면 친구들끼리 삼삼오오 모여서 가지가 뻗은 등을 보면서 애송이들처럼 놀라워하곤 했다. 그 다음 차례는 누구일지 기대감에 찬 얼굴로 이야기하는 아이들 속에서 사와무라도 함께였으나 성인이 되어 미야기를 떠날 때 까지 사와무라는 여전히 케일릭인 채였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스테먼으로 발현한다면 제가 품을 꽃은 어떤 것인지 궁금해 했고 피스틸로 발현한다면 제 등에 새길 첫 꽃은 어떤 꽃일지 궁금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쩌면 제 자신에게 해당사항이 없는 먼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제 룸메이트의 화려한 등을 마주할 때 마다 사와무라는 문득 제가 다른 세상에 떨어져 있는 것만 같은 아득함을 느꼈다. 쿠로오는 주변에 사람을 몰고 다니는 편이었고 제가 봐도 충분히 인기 많은 타입인 것 같았으니 경험이 많다고 해도 그다지 놀랍지 않을 것 같았다. 장미, 국화, 동백, 그리고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는 다양한 꽃들이 얼룩덜룩 피어있는 쿠로오의 등을 사와무라는 이따금 몰래 훔쳐본다. 실례라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씩 수를 세어본다. 같은 꽃이 여러 개 있는 경우는 드물다. 그만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왔을까. 하긴 쿠로오 정도라면 스테먼들에게 인기가 많을 것 같았다. 여러 명의 사람과 만나는 쿠로오를 가끔은 상상해본다. 옆에 누굴 두어도 그림처럼 잘 어울렸다. 어딜 가도 인기가 많고 다정한 네가 왜 오랜 연애를 하지 않았을까. 호기심에 못 이겨 옷을 갈아입는 쿠로오의 등을 훔쳐보다가 사와무라는 자는 척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이 호기심도 왠지 제 몫이 아닌 것만 같았다.
사와무라의 고민과는 상관없이 마땅히 시간은 흐른다. 학교생활이 반복되고 처음보다 설렘은 조금 줄어들지만 그럭저럭 재미있는 시간도 계속 되었다. 쿠로오와의 사이도 예상했던 것처럼 나쁘지 않다. 쿠로오는 좋은 녀석이다. 봄기운이 만연한 캠퍼스는 이따금 이른 여름을 예고하며 기온이 제법 올랐으나 아침이나 밤엔 서늘했다. 저녁을 먹고 과제를 하러 책상에 앉아 있는데 으, 하고 쿠로오의 목소리가 사와무라의 귀를 잡아끈다.
“벌써 모기가 있네.”
“벌써?”
“올해는 평소보다 좀 빠른 거 같긴 하네. 모기향 사러 가야겠다.”
아직은 힘없이 비실거리는 모기를 손바닥을 부딪쳐 잡은 쿠로오가 책상 위의 휴지를 툭툭 뽑아서 손바닥을 닦는다. 근처 휴지통으로 돌돌 만 휴지를 툭 던져 넣은 쿠로오가 좀 전까지 보던 전공책에 다시 얼굴을 쿡 박는다.
“아마 그거 내 책장 위에, 어디 있을 거 같은데.”
“모기향?”
“응,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서 기숙사 들어올 때 갖고 왔는데, 아무래도 아직은 안 쓸 거 같아서 아마…저 위인가?”
몸을 일으켜 기웃거리며 책장 위를 훑어보았지만 사와무라의 시야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사와무라의 행동을 눈치 챈 쿠로오가 웃으며 묻는다. 내가 꺼내줄까? 그 웃음 섞인 목소리에 괜히 발끈했다.
“내가 할 수 있어.”
“찾아줄게.”
“괜찮아, 넌 그냥 앉아나 있어.”
괜한 고집이었을 지도 모르나 사와무라는 어쩐지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까짓 키가 작으면 뭐 어때서. 애초에 저 위에 올려놓은 것도 나니까 꺼내는 것도 할 수 있다고. 사와무라는 의자를 잡아끌어 딛고 올라섰다. 어, 야 너 위험…하고 따라오는 쿠로오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아슬아슬하게 위를 향해 팔을 뻗었다. 이것저것 쓰지 않는 물건들을 올려 둔 책장 위의 공간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분명 이쯤에 내가 두었는데. 더듬거리며 팔을 휘적거리다 말고 조금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까치발을 들었다. 모서리 쪽에 체중이 실린 의자가 그 바람에 휘청이며 넘어간 것은 순식간이었다. 헉, 하고 놀란 숨이 입 밖으로 튀어나갈 새도 없었다. 아슬아슬하게 뻗은 팔로 책장의 어딘가를 잡았지만 넘어지는 몸을 지탱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시야가 휘청 뒤집어지고 눈을 질끈 감는 순간 무언가에 툭, 둔탁한 소리를 내며 부딪치는 감각이 들었다. 다만 딱딱하다 거나 빠른 속도로 바닥에 처박히는 그런 감각과는 조금 달랐다. 쿨럭, 작게 기침을 삼키는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아, 눈을 뜨니 눈앞에 보이는 것은 제 얼굴이 콕 박혀있는 쿠로오의 가슴팍. 놀란 숨을 흐드드, 괴상한 소리를 내며 뱉어내자 뜨끈하게 쏟아지는 공기에 간지러운지 가슴팍이 움찔 한다.
놀란 심장이 귓가에서 펄떡펄떡 뛰어댄다. 일어나야 하는데 놀란 팔다리에 도통 힘이 들어가질 않는다. 머리가 다치지 않게 재빨리 감싸 안았던 쿠로오의 손바닥이 스르륵 떨어져 나간다. 아이고, 앓는 소리와 함께 안심한 몸이 바닥으로 축 늘어진다. 눈을 끔뻑이면 가슴팍이 닿은 귓가에서 심장 소리가 요란했다. 조금 다른 속도로 팔딱팔딱 뛰는 심장소리와 쾅쾅 울리는 제 심장소리가 오케스트라처럼 엉켜 사와무라는 긴장으로 굳었던 몸이 스르륵 풀리는 것을 느꼈다.
“아, 저.”
“놀랐잖아, 어디 안 다쳤어?”
“아마도… 너는?”
“아마도 괜찮을 거 같은데.”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사와무라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닿은 가슴팍에서 들리는 심장소리가 사와무라의 귀를 가만히 두드렸다. 조금 빠르다 싶은 박동이 오히려 듣기 좋아 사와무라는 모른 척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조금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머리 위로 가만히 내려앉는 숨결과 쿠로오의 심장박동, 그리고 그 사이에서 함께 요동치는 자신의 심장소리.
“저긴 뭐 안 올려두는 게 좋겠다. 너무 위험하네.”
뭐 하러 저기 올려두었냐는 둥, 그러게 왜 고집을 부렸냐는 둥, 그런 핀잔을 조금쯤은 주어도 될 텐데 쿠로오는 달콤한 목소리로 가볍게 웃는다. 사와무라는 미안하다는 말 대신 쿠로오의 가슴팍에 조금 더 귀를 묻는다.
쿵…… 쿵……
사와무라의 심장이 조금 더 빨리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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