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다이 | 사양 미정
2019년 1월 13일 대운동회 4회 발매 예정
그 언젠가 읽었던 문학책에서의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날씨였다. 와이퍼가 사나운 기세로 앞유리를 긁어내렸으나 소용없었다.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 다소 느린 속도로 한적한 시골길을 달렸다. 이런 시간에 다른 차들이나 사람은 없겠지만 가끔 예상치 못하게 도로로 달려드는 동물들이 있거나 갑작스럽게 길이 험해지기도 해 시골길 운전은 꽤 신경 쓸게 많았다. 게다가 이런 비라니, 가로등도 없는 길을 전조등 불빛 하나에 의지해서 슬금슬금 기었다. 정말이지, 뭐라도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날씨다.
뭐라도, 라는 생각과 동시에 전조등 불빛 안으로 하얀 덩어리가 불쑥 나타났다. 뛰어들었다, 라는 표현이 아니라 그야말로 나타났다는 것 말고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머리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몸이 본능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덜컹, 느린 속력으로 달리던 자동차는 단숨에 멈췄다. 작은 반동에 몸이 앞으로 살짝 기울었다.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를 뒤따라 기이익 하고 와이퍼가 유리를 긁어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핸들을 꾹 쥔 손바닥이 척척하게 젖는다.
그건가. 설마,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영화나 책에서나 나올만한 단어가 머릿속을 휙 스치고 지나가자 꿀꺽, 절로 목울대가 울렁인다. 미친 듯이 쏟아지는 비에 시야가 흐릿해 갑자기 나타난 이것이 사람인지 짐승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혹은 정말 그런 것일 수도…….
등줄기가 오싹한 쪽으로 생각이 확장되는 순간 희끄무레한 덩어리가 천천히 뒤를 돌아본다. 그와 동시에 저도 모르게 시선이 바닥으로 휙 내려갔다. 빗줄기로 경계가 흐릿해진 전조등 불빛을 받으며 서 있는 형체는 다행이도 사람이었다. 휴,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새어나왔다. 하지만 곧 미간을 좁혀 흐릿한 시야를 또렷이 했다. 쏟아지는 빗속에 서 있는 사람은 우산도 쓰지 않은 채였다. 마치 물에 빠졌다 갓 건져 올린 것처럼 쫄딱 젖은 채 느릿하게 돌아보던 인영은 다시 고개를 돌리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차가 지나가는 것을 배려하려는 듯 옆으로 조금 걸음을 옮겨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보이지도 않을 감사인사를 위해 고개를 슬그머니 꾸벅이고는 핸들을 고쳐 쥐었다. 액셀을 밟아야 하는데 이상하게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어서 출발해야 늦지 않게 집에 도착 할 텐데.
아니, 사실 서두른다고 해도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느릿하게 움직인 차가 얼마 가지 않아 멈춘다. 조수석 창문을 내리자마자 세차게 들이치는 빗줄기에 좌석의 절반이 젖어들었다.
“저기…….”
젖은 몸이 천천히 돌아본다. 푹 젖어 가라앉은 눈동자는 머리색과 비슷한 조금 밝은 갈색이었다.
“……어디까지 가세요? 가는 방향이 같으면 태워드렸으면 하는데.”
가라앉은 눈동자가 바라본다. 요란한 빗소리가 마음을 부추겨서인지 얼마 되지 않는 그 짧은 침묵에도 초조했다. 싫은 건지, 좋은 건지 알 수 없는 눈동자를 보며 조금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비가 너무 많이 오잖아요.”
“…….”
“그렇게 계속 서 있으시면 감기 걸려요.”
“…….”
“………이번 감기, 독하다던데…….”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로 허허 웃으며 말을 이어나가다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점점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와르르 쏟아지는 빗소리가 시끄러워 조금 귀가 아플 정도가 될 때쯤에서야 겨우 대답이 돌아왔다.
“……어요.”
“네?”
“시트가, 젖어요.”
작게 들려온 대답은 내가 생각한 범위 안에 들지 않는 의외의 것이었다. 이해하기 위해 머리가 핑핑 돌았다. 어, 그러니까.
“벌써 젖었어요. 시트가, 그러니까. 벌써 젖었어요. 이만큼이나.”
“…….”
“그러니까, 타셔도 돼요.”
정말 괜찮아요.
덧붙인 말에도 그저 가만히 선채였다. 엄청난 폭우 속에서.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필사적으로 설득시키고 있었다.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이런 말도 안 되는 빗속에서, 누군지도 모르는 낯선 사람을 내 차에 태워서 어떻게 될지도 모르면서 왜 이렇게 나는 필사적일까. 누구라도 이 폭우 속에 사람이 우산도 없이 걷고 있다면 나와 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생각했다. 뭔가 그런 어설픈 정의감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느낌이 나를 이렇게 초조하게 만들었다고. 와아아, 함성과도 같은 빗소리가 한참 동안 주위를 맴돌았다. 기다림이 헛되지 않았다는 듯, 잠시 후 남자는 문고리를 조심스럽게 쥐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가까이에서 들은 남자의 목소리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근사했다.
*
어디로 가냐는 물음에 남자는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답을 재촉하기라도 하는 듯 기이익, 와이퍼가 앞유리를 긁는다.
“그냥, 가까운 정류장으로 가주세요.”
“지금 시간엔 버스도 안 다닐 텐데요.”
“그럼 아무데나 좋으니 기차역이라도.”
남자의 모호한 대답에 고개를 갸웃 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그저 액셀을 밟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나의 집요한 물음에 우선 대답은 했지만 남자는 어쩐지 어디를 가고자 하는 목적이라곤 전혀 없는 것 같았다.
“댁이 어디신데요?”
“…….”
“저는 A시 쪽으로 가거든요.”
“……그럼 가시는 길에 번화가가 나올 때 까지만 좀 부탁 드려도 될까요?”
“그러시겠어요?”
자포자기 심정으로 더 이상의 대화를, 아니 대화를 이어나가려는 시도를 그만 둘까 싶을 때쯤에서야 남자는 말을 꺼냈다. 사실 별 다른 진전 없는 대답이었지만 대답이 나온 것만으로도 스스로도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곤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거센 빗소리와 간간히 들리는 자동차 엔진소리만이 소리의 전부였다. 그 침묵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먼저 말을 꺼내고 말았다. 이 근처에 출장 올 일이 있어서요. 평소에는 이쪽으로 올 일이 잘 없거든요. 타이밍도 안 좋게 내비게이션이 고장 나는 바람에 한참 헤맸지 뭐예요. 아, 이 내비 회사껀데. 그나저나 비 진짜 많이 온다 그쵸? 아까 예보 들어보니까 새벽 내내 올 거 같더라구요. 도착하기 전엔 좀 그치려나.
“그나저나 이런 외진 곳엔 어쩐 일로 계셨던 거…….”
횡설수설하던 말끝이 천천히 흐려졌다. 아까부터 아무런 말도 없던 남자는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하긴, 그 비를 다 맞고 있었으니 피곤하기도 했을 것이다. 조심스레 히터를 틀어 공기를 데웠다. 흩어질 것 같이 아주 옅은 숨소리를 내며 잠든 남자는 내가 건네 준 손수건을 손에 꼭 쥔 채였다. 거 참 잘 생겼네. 거두던 시선을 다시 돌려 힐끔, 바라보았다. 흠뻑 젖은 옷이 달라붙어 하얗다 못해 창백한 피부가 비쳐보였다. 조금 마르긴 했지만 운동이라도 했던 건지 몸의 라인이 제법 근사했다. 덜컹, 비포장도로의 요철에 화드득 앞을 바라봤다.
어쩌다가 낯선 사람을 덥석 태우게 된 건지, 조금 전의 나는 나 자신조차도 이해할 수 없었다. 불쌍한 사람을 잘 내버려 두지 못하는 성격이라고 종종 듣긴 하지만 오지랖도 정도껏이어야지, 주머니 안에 칼이라도 품고 있으면 어쩌려고. 심야 방송에서 보았던 미해결 살인사건에 대한 다큐멘터리 내용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지만 옆자리의 남자에게선 피냄새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는 제법 매끄러워진 도로를 천천히 달리며 A시로 향하는 이정표대로 핸들을 꺾었다.
“…….”
그렇게 집에 도착할 때 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렸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맨션 앞에 차를 세운 채 앞유리를 후두둑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었다. 억수같이 쏟아지던 빗줄기는 그 기세가 약해져 제법 분위기 있게 길거리를 적시고 있었다. 꽤 늦은 시간이 되어 한산한 거리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드물었다. 힐끔, 조수석을 보았으나 남자는 여전히 깊은 잠에 든 채였다. 느릿하게 핸들 위로 몸을 기대 엎드렸다. 계기판 한쪽에 박힌 전자시계는 자정에 가까운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부슬부슬 잘은 빗소리 너머로 아득하게 전철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마지막 전철일 그 소리를 들으면서도 나는 곤히 잠든 남자를 깨우지 않았다. 와이퍼를 꺼 축축하게 젖은 앞유리가 마치 엷은 유리로 빚은 레이스 커튼 같았다.
다시 봐도 참 잘생겼네. 축축하게 젖은 속눈썹이 촘촘히 박혀있는 눈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반들반들한 눈꺼풀 너머, 물을 잔뜩 먹은 옅은 갈색 눈동자를 떠올렸다. 엷은 머리칼 끝에 어느 새 가득 모인 물방울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아, 떨어지겠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물기를 닦아주려는 순간 거짓말처럼 반짝, 눈꺼풀이 들어 올려진다.
“…….”
“…….”
손을 뻗은 채로 덜컥 굳어버렸다. 잠에서 깨어나는 기색 하나 없이 반짝, 그야말로 반짝이라는 것 말고는 표현할 수 없는 느낌으로 눈을 뜬 남자는 그 어떤 표정 변화도 없이 나를 고스란히 바라보고 있었다. 허공에 멈춘 손을 천천히 내리며 핸들 위로 기댔던 몸을 바로 세웠다. 흠, 어색함에 목을 가다듬어 봤지만 볼품없게 갈라지는 소리만이 새어나왔다.
“너무 곤히 주무시기에, 차마 깨우기 죄송해서요. 어쩌다 보니 저희 집 까지 와버렸는데…….”
“……그랬나요.”
“많이 피곤하셨나봐요.”
하하, 어색하게 웃음을 버무리며 말을 건넸지만 남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허리춤을 단단하게 붙들고 있던 안전벨트를 달칵, 풀어낼 뿐이었다.
“태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앗, 아니에요. 제가 먼저 권한 거고.”
손사래를 치는 나의 말에 남자는 고개를 가볍게 숙여 감사의 인사를 건넨다. 조수석 손잡이를 쥐려던 남자는 무언가 떠올랐는지 행동을 멈춘다. 이거, 하고 가벼운 목소리와 함께 단단히 쥐고 있던 손수건을 나에게 내민다.
“감사해요.”
보일 듯 말 듯 엷은 호선을 그린 입술이 참 매력적이다, 라는 그런 생각을 했던가. 고작 그 짧은 순간에 걷잡을 수 없는 이런 저런 생각들이 쏟아졌다. 그러니까 가령, 예를 들자면.
“자고 갈래요?”
“…….”
“전철 끊겼…, 을 거거든요.”
따위의, 평소의 나였으면 말도 안 되는 생각 같은 게 말이다. 어차피 전철도 끊겼고, 버스도 끊겼다. 남자의 목적지는 아마도 A시가 아닐 것이었다. 그런 묘한 확신 같은 것이 내 의지를 벗어난 말을 남자에게 집어 던졌다. 나의 이상한 권유에, 남자는 잠시 가만히 나를 바라본다. 그 얼굴을 보면서, 이 남자를 이대로 보내고 나면 엄청난 후회를 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영 모를 얼굴로 한참을 그렇게 가만히 바라보다가 아주 작게,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
나의 공간에 타인이 들어온 것은 오랜만의 일이었다. 최근 회사 일이 바빠 지인들과의 연락이 뜸하기도 했고 밖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걸 좋아하지만 그만큼 내 공간에서는 나만의 시간을 즐기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있기엔 좁진 않을 거예요, 물론 넓지도 않겠지만. 다급하게 덧붙인 머쓱한 말에도 남자는 괜찮다는 말을 했다. 급하게 온수를 틀어 욕조에 물을 받았다. 아직까진 추운 날씨는 아니었지만 오랜 시간 비를 맞은 몸은 창백할 정도로 질려 있었기 때문에 남자의 의견을 묻지도 않았다.
남자는 나의 권유를 거절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기뻐보이지도 않았으나 그거면 된 거라고 생각했다. 갑작스러운 나의 충동에 이렇게 어울려 주는 것만으로도 괜찮았다. 남자는 딱딱한 분위기를 굳이 부드럽게 하려 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점도 어쩐지 퍽 마음에 들었다. 물렁한 공기덩어리처럼 내 방안에 둥둥 머물러 있던 남자는 내가 시키는 대로 욕실로 들어갔다. 남자가 욕조에 몸을 담그는 동안 나보다 신장이 한 뼘은 큰 남자가 입을 만한 옷을 찾기 위해 옷장을 한참 동안 뒤져야했다. 두 사람이 누울 수 있게 침구를 정돈하고 적당히 알맞은 온도로 끓여진 차를 컵에 따를 때 쯤, 욕실 문을 여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거기에 입을 옷 뒀어요.”
겨우 말을 끄집어 낸 목덜미에서 삐걱삐걱, 녹슨 소리가 나는 기분이었다. 욕실에서 나온 남자는 바스타올만을 허리춤에 걸친 채였다. 못 볼 걸 본 것도 아닌데 뻣뻣하게 굳은 목덜미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꽤 마른 몸이었으나 그런 것 치곤 제법 단단해 보였다. 남자는 나의 당황을 알아차린 건지 모르는 건지, 여전히 읽을 수 없는 얼굴로 욕실 앞에 둔 새 옷을 집어 들어 몸에 꿰었다. 움직일 때 마다 남자의 마른 몸이 팽팽하게 당긴다. 긴장한 눈이 뻑뻑하게 잠길 때쯤, 컵에 따르던 차가 왈칵 넘친다. 아, 서툴고 민망한 손길이 부랴부랴 식탁 위를 정돈했다. 이제는 귓불까지 벌겋게 열이 올랐으나 남자는 웃지도, 난처해하지도 않았다. 그저 제가 입었던 젖은 옷을 가지런히 정돈하고 기장이 조금 짧은 내 옷을 마저 갖춰 입었다.
“옷, 불편하진 않아요?”
“괜찮아요.”
느릿하게 손을 뻗어 젖은 행주를 쥔 내 손을 잡은 남자가 가만히 바라본다. 따스한 습기를 머금어 말캉한 남자의 살갗이 내 손을 부드럽게 매만진다.
“데이진 않은 것 같네요.”
무심하고 훅, 흩어지는 공기 같은 가벼운 말이었으나 나는 고작 그런 것에 묘한 기분이 되었다. 감정의 시소가 삐딱하게 내 쪽으로 기울어 있는 듯한 감각. 하지만 그런 것이 하나도 억울하지 않았다.
내가 끓여준 차를 마시며 남자가 기다리는 동안 어설프게 몸을 데우고 하루의 피로를 씻어냈다. 무자비한 빗길을 내내 신경이 곤두선 채로 달렸더니 피로가 갑작스럽게 달려들었다. 눅눅하게 피로에 젖은 머릿속으로 가만히, 그 어마 무시한 빗길을 떠올려 보았다. 왜 그런 버스도 차도 다니지 않던 길을 혼자 걷고 있었던 걸까. 하루 종일 비가 내렸을 텐데 왜 우산도 없이 걷고 있었던 걸까.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이상하게 남자의 앞에만 서면 그 어떤 것도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남자는, 그 존재가 어쩐지 조금 허무하고 손을 휙, 휘저으면 금세 흩어져 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목욕을 마치고 나갔을 때 차로 적신 찻잔 하나만 남기고 휙 사라져 버린다고 해도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 내가 멋대로 상상했던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남자는 가지런히 빈 찻잔을 정돈하고 거실 한 쪽에 걸어 둔 정물화처럼 식탁에 앉아있었다. 진득한 오렌지색 조명을 받으며 앉아 있는 남자는 제가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까먹지 말라는 듯 가끔씩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내뱉고 눈을 깜빡였다.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나는 남자의 맞은 편 의자에 앉는 순간 단 하나의 의문만이 머릿속에 둥실 떠올랐다.
“제가 그 쪽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남자는, 나의 질문에 눈을 가만히 깜빡였다.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불편하시다면 말하지 않아도…, 하고 뒷말이 따라 붙기도 전에 남자의 목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왔다.
“오이카와 토오루.”
“…….”
오이카와, 토오루. 남자의 입술이 조그맣게 달싹이는 것이 늘어진 비디오테이프처럼 느릿한 템포로 보였다. 오이카와 토오루. 입안에 조그맣게 굴려 본 이름이 스르륵 혓바닥에 녹아 없어진다. 남자는 대답 대신 느슨하게 입매를 끌어올린다.
여전히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창문을 적셨다. 꽤 늦은 시간이 되어 이따금 젖은 도로를 스치는 차바퀴 소리만 간간히 들렸다. 느슨하게 몰려오는 피로감에 바라 본 시계는 새벽 두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피곤하시죠?”
슬금 기어 나오는 하품을 꾹 참아보려 애썼으나 결국 보였는지 남자가 먼저 물어본다. 하하, 어색하게 웃어 넘겼으나 멋쩍음에 귀 끝이 따끈하게 달아오른다. 찻잔을 정리하고 잘 정돈해 놓은 이부자리로 안내 했다. 자주 쓰지 않아 겉감이 빳빳한 손님용 이불은 움직일 때 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무드등을 켜둔 방안이 적당히 어두웠다. 실루엣만이 어른하게 보이는 방안에는 뒤척일 때 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멀찍이 들리는 빗소리가 섞여든 그 소리에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너무 피곤하면 오히려 잠도 오지 않는다더니, 온 몸의 신경이 수면을 요구하는 소리가 요란해 점점 잠에서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오이카와 토오루.
어째서 이 남자는 그런 이름을 가졌을까 하고 생각했다. 녹아 흩어졌던 이름이 입안을 따끔하게 할퀴었다. 규칙적으로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 사이로 내 것이 아닌 숨소리가 차분하게 잠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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